617화 이번엔 이비인후과인가 (1)
발렌타인 30년산의 위력은 대단했다.
향도 좋고 맛도 좋다 보니 술술 넘어가지 않았겠나.
안주는 병원 앞 식당에서 시킨 사구려 닭볶음탕이었지만.
와인이 아니라 위스키쯤 되면 술의 향과 맛이 모든 것을 압도해 버리기도 하는 법이었다.
“어우.”
“나 집에 못 가겠다. 야, 대훈아 당직실 비는 데 있니.”
“네네.”
“근데 너 머리가 왜 이렇게 빨개.”
“술 마셔서 그렇습니다, 센터장님.”
모조리 취해 버렸다.
이미 신현태는 이현종 연구실 의자에 앉아 곯아떨어져 있었다.
왕년엔 술깨나 마셨다고 하더니만 요새 원장 업무까지 보느라 피곤한지 저 모양이었다.
아마 이현종이 제정신이었다면 저거 보면서 혀라도 찼을 텐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바람에 오바를 해서인지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래, 술 마셨지. 어우. 야 수혁아. 넌 괜찮니?”
처음 시작은 발렌타인 30년이었으나, 백화점 주류 코너에서 사면 90만 원을 호가하는 위스키 한 병이 사라지는 것은 뚝딱이었다.
다행인지 뭔지 이현종 연구실에는 그 외에도 조니워커블루라든지 잭 다니엘이라든지 하는 술들이 꽤나 놓여 있었다.
이기자 교수와 잘되긴 전, 그러니까 의학과 결혼했다고 공언했으나 실제로는 그냥 독거노인이었던 시절 사 둔 것들이었다.
그걸 다 털어먹었으니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했다.
“아, 네.”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 바로 이수혁이었다.
‘나 왜 멀쩡해?’
[많이 안 마셨으니까요. 한 잔씩만 마셨잖아요?]
‘왜 그랬지? 나도 위스키는 꽤 좋아하는데.’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까 그렇죠. 애초에 저 양반들이 신나서 달리는 바람에 끼어들 틈도 없기도 했고.]
‘아 그렇지.’
하여간 여기서 괜찮다는 건 같이 안 달렸다는 뜻이었다.
이현종으로서는 속상할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당연히 상대가 수혁이라면 두뇌가 풀가동해서 합리화시키기 바쁜 인간이라 그런 일은 없었다.
“젊어서 그런가. 술이 세구나?”
“아, 네, 아빠. 일단 저도 좀 도울게요.”
“아서라, 아서. 네가 다쳐. 난 여기 대훈이랑 간다. 당직실 뭐 안 멀지?”
그저 젊어서 그렇다고 퉁 치고는 안대훈에게 의지해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이 꼴을 환자들이 다 보게 된다면 참 난감할 터였다.
당직도 아니고 뭣도 아니니 잘못은 아니긴 하지만 하여간 의사가 병원 내에서 취해 있는 꼴이 보기 좋은 건 아니지 않나.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교수 연구실은 따로 엘리베이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안대훈은 벌게진 머리통을 해 가지고서는 이현종과 함께 그걸 타고 지하 당직실로 향했다.
“어, 원장님?”
“어어. 이쪽으로.”
“아니, 오늘 뭔 날인가? 왜 이렇게 취하셨어?”
“대훈아, 너는 뭔데 원장님이랑…….”
당직실에 소란이 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각 병동 당직실과는 달리 지하에 위치한 당직실은 진짜 당직들이 자는 곳이라기보다는 집에 가기엔 업무가 너무 끝나고 또 일찍 시작하는 이들이 자는 곳이면서 동시에 여러 과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그랬다.
‘아직 9시도 안 됐는데.’
이현종과 안대훈이 본의 아니게 평화롭던 당직실을 뒤흔들어 놓는 동안 수혁은 신현태가 몸을 뉜 의자를 완전히 젖히고 위에 가운을 덮어 두면서 시계를 힐끔 바라보았다.
말한 것처럼 아직 9시도 안 된 상황이었다.
정신이 말똥말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각 한 잔씩만 했어도 위스키다 보니 알딸딸한 기운도 잠시 있기는 했으나, 역시나 마음이 콩밭에 가 있던 바루다가 지속적으로 물 마실 것을 종용한 탓에 머리 쓰는 데 지장이 있을 거 같진 않았다.
[환자 보러 가는 건 내일 가더라도 협진 온 거는 확인하죠, 그럼.]
‘좋아. 삼촌은 저대로 두면 되겠지?’
[신현태 말입니까? 완전 뻗어 버린 게 좀 그렇긴 한데…… 구두에 양말까지 벗겨 줬으면 된 거 아니겠습니까. 아까 그 촉감이 썩 기분 좋지는 않았습니다.]
바루다는 알고 싶지 않은 이유로 촉촉이 젖어 있던 신현태의 양말이 떠올랐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건 수혁도 마찬가지였다.
제아무리 신현태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이건 좀 아니었다.
‘오케이. 이따 들여다보지 뭐.’
[좋습니다.]
해서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구실 불을 끄고 병동으로 향했다.
중간에 얼굴이 너무 빨갛지는 않나 확인도 해 봤는데 다행히 울긋불긋한 기운은 없었다.
사실 병동 스테이션으로 간다고 해서 누구나 편하게 말을 걸어오지도 않지 않던가.
소문이 무성하기도 하거니와 지금의 수혁은 너무 높은 사람이었다.
‘흠……. VIP네?’
이비인후과에서 보내온 협진은 정식 협진 라인을 통해 날아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저 태화 인트라넷에 있는 수혁의 개인 쪽지함에 들어와 있었다.
심지어 보낸 이도 교수가 아니라 레지던트였다.
‘몰래 봤다고 뒤집어씌우려고 하는구나.’
[전부터 쭉 든 생각인데…… 인간들은 참 쓸데없는 짓에 정력을 소모하는군요.]
‘그러니까 말이다. 아니, 환자 잘 보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 아냐? 어차피 내가 뭐 가서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닌데.’
[맛있는 거라도 사 주면서 이러면 또 모르겠는데…… 하여간 읽어 보시죠. VIP인 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요?]
쪽지에 뜬 등록번호를 쳐 보니 차트에 VIP라고 떡하니 쓰여 있었다.
예전엔 이 표시만 보면 손이 벌벌 떨려 올 때도 있었다.
VIP 뜻이 매우 중요한 사람이지 않나.
대체 얼마나 중요하면 이렇게 박아 놓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병원 생활을 하다 보니 이렇게 쓰인 사람 중 진짜 VIP는 드물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냥 레지던트 지인만 해도 일단 표시는 이렇게 해 주기도 하지 않던가.
때문에 세상과 야합한 지 오래인 수혁도 바루다의 말에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일 따름이었다.
‘하여간…… 뭘로 입원했나 보자고.’
[해결되지 않는 기침, 인후통 그리고 이물감……? 이런 걸로 입원도 하나요?]
‘아닌데. 우리 병동 모자란데. 이상하네?’
[아무래도 진짜 VIP인 모양인데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증상으로…….]
‘응, 그런갑다. 아, 그리고…… 증상이 너무 오래됐어. 아무거로도 치료가 안 됐어.’
[이글 신드롬인가?]
‘파노라마에서는 아무것도 없네. 그건 아냐.’
[흠.]
하여간 왜 왔나 보자는 심정으로 차트를 슥 읽어 보니 증상이 좀 이상했다.
평범한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입원시킬 만한 증상은 아니지 않나.
‘쌔한데?’
[정말 별거 아닌 거면…… 의미가 없을 텐데요?]
‘그렇지? 나름 다 알아봤는데 뭐가 안 나와서 보낸 거겠지? 그렇다고 해도 이런 증상은…… 음.’
[입원을 오늘 해서 딱히 검사가 된 것도 없습니다. 이대로는 아무 실마리도 잡을 수가 없어요. 현재 나열된 증상만 보면 제일 흔한 것은 편도염 또는 인후염입니다.]
‘그러게. 근데 입안 사진을 보면 멀쩡해. 약간 발적이 있기는 한데…….’
[노인에서는 구강 건조증이 흔하니, 이 정도 발적은 있을 수 있겠죠.]
환자의 나이도 좀 걸렸다.
이비인후과는 보통 환자 나이대가 좀 젊은 축에 속하지 않나.
기껏해야 50대면 많다고 봐야 했다.
물론 암을 보는 두경부외과 파트로 가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지겠지만.
이 환자가 입원한 병동은 별관, 즉 비과 아니면 이관데 최지은 교수가 관여했다면 비과였다.
한데 이 환자는 75세였다.
‘나이가 많아서 감기라도 입원시킨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폐 쪽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서술이 없는데.’
[궁금하네요.]
‘그러니까.’
환자에 대해 적혀 있는 건 나이, 증상 그리고 남성이라는 성별 정도가 거의 다였다.
외래를 다닌 기간 자체는 꽤 길었으나 죄 헛다리 짚은 것밖에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최지은 교수가 실력이 없다는 얘기는 또 아니었다.
할 만한 실수 아니, 내릴 만한 진단을 내려왔다.
원래 진단의 기본은 환자가 가진 증상을 나타낼 수 있는 질환 중 가장 흔한 것을 골라내는 과정이지 않나.
즉 최지은 교수가 인후염을 넘어 역류성 식도염 그리고 후비루 증후군 등을 의심하고 치료했던 과정 자체는 합리적이라는 얘기가 되었다.
‘이것들이 다 아니라는 건데…… 어쩌지?’
[뭘 어쩝니까?]
‘나 너무 궁금해서 이대로라면 잠이 안 올 거 같은데?’
[아.]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처음 진단 내린 사람이 아예 삽질을 해 놓은 상황이라면 이 정도는 아닐 터였다.
에이, 이 멍청한 놈, 이게 그거겠어?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 수 있을 테니.
하지만 이 환자는 지금까지 진료한 대략 6개월간의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기보다는 그저 시행착오가 있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있음 직한 진단은 다 빗나간 상황이다 보니 이제 앞으로 남은 건 미지의 단계였다.
그게 수혁을 몸살 나게 만들고 있었다.
“교주님. 역시 여기 계실 줄 알았습니다.”
그때 안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감았는지 아니, 세수를 좀 넓게 했는지 보송보송해 보였다.
심지어 붉은 기운도 많이 사라져 있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이현종, 신현태만큼이나 신나서 달린 주제에도 그랬다.
아무래도 진짜 젊어서 술 센 놈은 이놈인 듯했다.
“교주, 교주 하지 말…… 응?”
“숙취 해소제입니다. 그리고 이거.”
“수액?”
“네. 저는 벌써 맞고 있습니다. 술 깨는 데는 이게 직빵이죠.”
“야, 너 이거 위험할 수 있는 건 알지?”
“알죠. 근데 젊잖아요. 괜찮습니다. 그리고…… 교수님. 가시고 싶으시잖아요?”
녀석이 내민 것은 병원 편의점에서 파는 숙취 해소제와 수액 라인이었다.
뒤에는 시니어 간호사 하나가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이제는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신도다.’
[어떻게 알아요?]
‘안대훈이 데려온 사람인데, 처음 보는 사람이고 저렇게 웃고 있다. 100%야.’
[타당한 분석이군요. 알고리즘에 추가합니다.]
하여간 수혁은 이 악마의 유혹을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몸은 솔직한 법 아닌가.
환자를 지금 당장까지는 아니더라도, 하여간 1시간 내에 보러 갈 수 있다고 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 진짜 내가 미쳐 버렸구나 싶은 상황이기는 했으나.
어쩔 수 없지 않나.
이미 버린 몸이었다.
[빨리 먹고, 맞으시죠. 안대훈이가 참된 신도군요, 정말로.]
‘그, 그래.’
게다가 바루다도 저쪽 편이었다.
버린 몸으로 치면 이쪽이 한참 윗줄이라서 그랬다.
태어날 때부터 의학에 미치게 만들어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음.”
“따끔해요. 왜케 떠세요.”
“주사 싫어해서…….”
“내과 교수님들이 꼭 이러시더라. 조직 검사니 뭐니 아플 만한 건 잘만 권유하시면서.”
“그러게요…… 읍.”
“읍은 무슨. 잘 들어갔어요. 풀로 틀어 드려요?”
“네. 희석해서 내보내야 해서요.”
“네. 당도 들어 있는데, 당뇨는 없으시죠?”
“없습니다.”
해서 수혁은 하는 수 없이 수액을 맞게 되었다.
안대훈과 나란히 앉은 채였는데, 안대훈은 그게 그렇게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수혁도 비슷한 얼굴이라는 점이었다.
‘대체 어떤 환자일까?’
아까부터 이 생각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