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8화 봉사단 (2)
‘너 오라는데’라니.
무슨 뒷골목 깡패가 오라는 것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뭔 소린지.”
“어, 이해가 잘 안 가나 보구나. 하하하. 아무튼, 오라면 가야 해.”
“네? 저희 근데 학회 준비…….”
“어, 그거. 그거 좀 미루자. 우리 가야 돼.”
“그렇게 중요한 자리예요?”
수혁은 이현종과의 통화에서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현종이 좀 비굴해 보이는데요?]
‘어……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냐?’
[네. 근데 이상합니다.]
‘이런 적이 있었나.’
이현종이 누구란 말인가.
권력 앞에서도 초연한 사람이지 않나.
수혁을 마음속에 품고 난 후에는, 아무래도 지킬 것이 생겨서인지 그나마 주변을 신경 쓰는 편이 되었다지만.
그 전에는 대통령이건 뭐건 간에 하여간 부당한 방식으로 진료 청탁을 해 오면 바로 까 버리곤 했던 인물이었다.
심지어 태화 의료원 입장에서는 가장 높은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유원 회장조차 쉽게 보지 못했던 것이 원장 이현종이지 않았나.
근데 비굴해?
백강혁이 대관절 어떤 사람이길래?
“중요? 음. 중요하다기보다는…… 음. 하여간 가야 돼.”
“뭐, 아빠도 가시는 거예요?”
“그렇지. 가지.”
“그럼 가죠, 뭐. 이거 봉사단에 얹혀서 가면 휴가도 안 빠지는 거 아니에요?”
“응.”
“근데…… 우리 둘 다 가면 통합진료센터는 어째요?”
“아, 잠깐 쉬어야지. 이건 어쩔 수가 없어. 그룹 차원에서도 양해해 준 내용이야.”
“아…….”
그룹에서도 양해를 해 주었다니.
새삼 백강혁에 대한 의문이 확 강해졌다.
태화 그룹이 대체 어떤 기업이란 말인가.
명실공히 세계 제일의 기업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한데 백강혁의 요청에 양해를 해 주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란 말인가.
[검색해 봐요. 이현종하고는 대충 대화 끝내고요.]
‘그래, 그래야겠다.’
다행히 수혁에게는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다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나무위키가 그 주인공이었다.
부정확한 내용도 많이 있다지만, 적어도 개뿔도 모르는 상황에서 뭐라도 보려면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백강혁.’
검색을 했더니 역시나 나무위키 문서가 떴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문서들이 있었는데, 자잘한 것들인 데다 연도가 좀 된 것들이 많아서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아.’
[뭐야. 왜 아무것도 안 떠요?]
‘요청에 의해 접근이 불가하다는데?’
[뭔…… 이런 경우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상하네.’
옳다구나 하고 들어가 봤으나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단 하나도 없었다.
관련된 문서들 또한 매한가지였다.
어디를 들어가도 뜨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사진들은 좀 남아 있는데, 아주 젊을 때 사진들뿐이었다.
20년 이내에 찍은 사진들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뭐여…… 누가 의도적으로 지웠나?’
[그러게요.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사람 기록이 이렇게까지 없을 수가 있나요? 이 사람 한때 국제 외상 외과 학회장도 하지 않았나?]
‘했지. 우리 병원에서도 대서특필했잖아. 차라리 양재원 교수님 정보가 훨씬 많네.’
[이분은 어디 가신 거예요? 태화 출신이잖아요.]
‘미국 가셨지. 엄청나게 좋은 조건으로 가셨을걸. 백 교수님 1세대 제자들은 지금 다 미국에 있어.’
[흐음……. 미국이라.]
의학에 대한 서칭이라면 또 모를까.
일개 의사에 대한 검색에 열을 올리는 건 비생산적인 일일 터였다.
적어도 바루다나 수혁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점점 더 다른 일에는 관심이 떨어져만 가고 있었다.
옆에 좀 일반적인 사람들이 있었다면 이게 이상한 일이란 것을 자각할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수혁 주변에 있는 이들은 이현종, 신현태, 조태진 그리고 안대훈, 우하윤 정도가 전부였다.
죄다 제정신은 아니란 얘기였다.
‘왜 갑자기 눈을 반짝여?’
[미국이 큰물이기는 하죠.]
‘그래서 미국 가자고? 나 여기 교순데. 이렇게 밀어주는데.’
[아뇨, 굳이 계속 갈 필요가 있나요? 연수 가서 맛을 좀 보여 주면 되지. 그럼 원격으로라도 진료를 볼 수 있겠죠.]
‘아, 그렇게. 으음. 거기서 그렇게까지 해 주려나.’
의학에 미친 둘이 보기에도 미국 의료는 만만한 시장은 아니었다.
완전 자유 경쟁 시장 체계를 갖춘 곳이지 않나.
단점도 이루 말할 수 없을 많기는 했다.
오바마 케어가 필요했을 만큼.
하지만 적어도 최정상의 의료 행위만은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었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진단법이나, 치료법은 거의 미국에서 튀어나오고 있다고 보면 되었다.
그러니 수혁이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제가 있는데 뭔 걱정입니까?]
‘너랑 나는 개인이잖아. 거기는 국가 시스템이 달라.’
[그거야 부딪쳐 보면 알 일이죠.]
‘그것도 그렇긴 하지. 게다가…….’
[게다가?]
‘북미 대륙엔 또 얼마나 많은 병들이 있겠어. 그거 보는 일도 즐거운 일이겠지.’
[역시. 이래야 이수혁입니다.]
하지만 바루다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기대감에 눈이 초롱초롱하게 되었다.
새로운 환자에 대한 열망은 늘 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수혁아.”
그때 이현종이 다가왔다.
어쩐지 수척해진 얼굴을 하고서였다.
“네, 아빠.”
“어, 아까 말한 거 말야.”
뒤를 슬쩍 보니 다른 교수들도 줄줄이 사탕처럼 서 있었다.
신현태, 조태진 그리고 김승규도 있었다.
‘김승규?’
다들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대학 병원 교수로 저 나이 되도록 있다 보면 저런 얼굴을 할 일은 드물지 않겠나.
어딜 가도 다들 인정해 주고, 어려워하는 삶이 바로 대학 교수의 삶이었다.
게다가 김승규는 무직이라도 아마 그렇게 되었을 터였다.
그런 얼굴을 갖고 있는 사내였다.
“그거 때문에 대책 회의하려고 하는데. 잠시 이쪽으로 올래?”
수혁이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닌 모양이었다.
이현종은 더없이 수심에 찬 얼굴로 수혁을 불러서 센터 내에 자리한 회의실로 들어갔다.
여느 때 같았으면 다른 레지던트들도 다 불렀을 터였다.
이곳은 통합 진료 센터고, 진료만이 아니라 교육에 대한 목적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곳이었으니.
찰칵.
하지만 이현종은 남들을 부르기는커녕 바로 문을 잠가 버렸다.
차르륵.
신현태는 커튼까지 쳤다.
“여기 뭐 프락치 없지?”
이현종은 그렇게 바깥과 차단한 후 입을 열었다.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서였다.
“아빠, 뭔 소리예요?”
“넌 몰라.”
“네?”
“넌 모른다……. 평생 모르길 바랐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
수혁의 의구심을 뒤로하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프락치가 설마 여기 있겠어, 형?”
“야, 내가 왜 프락치에 집착하게 된 줄 몰라?”
“그거…… 하긴. 뭐, 그렇긴 해.”
“하여간 없지? 없어야 해. 아니면 나 집요한 거 알지?”
조금 이상한 회의였다.
이곳이 병원이고, 구성원이 죄 의사들이란 것을 감안하면 진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끼어들기에는 또 너무 심각하네.’
[뭘까요? 진짜 오랜만이네요, 이런 상황.]
‘그렇지? 진짜 영문을 모르겠어.’
보통 그러면 바로 끼어들 텐데, 그럴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현종아.”
“아, 선배.”
김승규가 입을 열었다.
“나 진짜 가기 싫다.”
“저도예요. 근데…… 방법 있어요?”
“그 양반도 이제 늙었을 텐데, 설마 여기까지 올까?”
“안 올 거 같아요?”
“오겠지. 가서 확 들이받을까?”
“그때처럼요?”
“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면서였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끔찍한 일이 있었던 건 맞는 거 같았다.
“아니, 그 사람은 왜 성질머리가 그 모양인데 자꾸 봉사를 나가요?”
“그런 말이 있던데.”
“무슨 말이요?”
놀랍게도 대화의 주도권은 이현종이 가지고 있었다.
김승규가 제일 위인 데다가, 얼굴도 위인데도 그랬다.
아무래도 이 상황에 대해서만큼은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이현종은 신현태의 말에 짐짓 더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람 죽일 때마다 속죄의 의미로 나간다던데?”
“뭔 미친. 의사예요, 그 사람. 그것도 최고의 의사.”
“아니, 그럼 말이 돼? 왜 자꾸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어딜 가냐고.”
“그것도 그렇긴 하네. 괜히 그런 말이 도는 건 아니겠죠.”
이현종은 모두를 보며 잠시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여간 가긴 가야 해. 그리고 잘해야 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레지던트랑 나머지 인력 잘 꾸려. 대충 갔다가는 알지?”
“어, 알았어. 내 제자들 중에 에이스만 들고 가야지.”
“저도요.”
“저도.”
“그리고 수혁아. 네가 잘해야 된다.”
“네?”
이대로 계속 뭔지 모를 회의가 진행되는 줄 알았더니, 드디어 수혁에게도 이목이 쏠리는 순간이 있었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는 건 마찬가지라 수혁은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 사람이 천재 좋아하거든? 저번에 갔을 땐…… 그나마 내가 있어서 분위기 괜찮았어. 다들 인정하죠?”
“으음.”
“그래요, 뭐.”
이현종은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라 천재 운운할 때면 늘 행복한 미소를 짓곤 했다.
하지만 지금 짓고 있는 미소는 그렇지 못했다.
도리어 조금 괴로워 보였다.
“그리고 내과 쪽 천재를 더 좋아해. 왜냐면…… 외과 쪽으로는 제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상대가 안 되거든. 무조건 성에 안 차. 아직도 양재원 교수님도 그 사람 만나면 개까인다니 말 다 한 셈이지.”
“왜 나를 보면서 말해.”
“그때 개같이 까였잖아요, 진짜. 내가 다 민망했는데.”
“하.”
그러나 김승규 교수가 짓고 있는 표정에 비하면 대단히 행복해 보였다.
김승규는 정말이지 세상에서 제일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여간 이현종은 그런 김승규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수혁을 돌아보았다.
“근데 넌 내과잖아. 그리고 천재고. 내가 이런 말 어지간하면 안 하는데…… 너야말로 나를 능가할 유일한 인재야.”
“와……. 뻔뻔한 거 봐. 유일하대.”
“너 나보다 잘해?”
“아뇨.”
“그럼 닥쳐.”
“하.”
중간에 기껏해야 영재 수준인 신현태를 닥치게 하기도 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무서워요?”
그 덕에 잠시 짬이 났다.
해서 수혁은 아까부터 궁금해하던 것을 물었다.
진짜 궁금하기만 했다.
왜냐면 수혁에게는 딱히 무서운 사람이 없었으니까.
바루다의 보정을 받기는 했지만, 무려 김승규 교수의 얼굴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담이 큰 인간이지 않나.
“어? 그걸 말이라고. 존나 무섭지.”
“그래요?”
“어, 근데 내과 쪽 천재가 뭐라도 하면 또 좋아해. 좋아하면서 잡아 두려고 하는데, 그건 안 한다고 했으니까 안심하고. 너는 그냥 가서 최선을 다해서 천재성을 보이라고. 나도 그 인간 코 납작해지는 거 한 번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