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0화 마저 깨고 (2)
8년에서 9년이라.
이렇게 되면 만성이라는 말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기껏해야 나이가 21살인데 8, 9년이라니?
인생의 동반자와 같은 증상이지 않나?
근데 이제야 심각성을 인지했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두통과 피로감…… 흔한 증상이라고 해도 NRS 점수가 이 정도면 일상에서 불편감을 느꼈다는 얘긴데…….’
[네, 뭔가 다른 질환으로 착각했을 만한 요인이 있었을까요?]
‘다른 질환?’
[두통과 피로감은 말 그대로 흔한 증상이니까요.]
‘아무리 흔하다 해도…… 몇 년을 헷갈린다고?’
흔한 증상일수록 감별 진단이 중요하기는 했다.
실제로 진단이 어렵기도 했고.
제대로 된 진단이 되기까지 오래 걸리는 것도 맞았다.
하지만 8, 9년은 제대로 선 넘지 않았나.
아예 환자가 손을 놓고 있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지간하면 이미 진단이 되었어야만 했다.
[실제로 환자는 진단이 되지 않은 채로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하긴, 그것도 그렇네.’
이번에도 바루다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확률이 낮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지금 눈앞에 환자가 있는데.
“그렇게 오래되셨는데…… 왜 병원에 안 가셨어요?”
생각을 정리한 수혁은 화면에 대고 물었다.
그동안 인터넷이 끊겼나 하고 있던 환자와 신도는 즉시 답을 해 왔다.
둘 다 적극적이었는데, 신도는 수혁의 실력을 아주 잘 알고 있어서 그랬고 환자는 신도가 하도 입을 털어서 그랬다.
“그게…… 제가 수험생이라서요.”
“8, 9년 전이면…… 초등학생인데요?”
“싱가포르 입시가 만만치가 않아서요. 한국도 심하다고 들었는데요.”
“그 정도는……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아닌가?”
수혁은 보육원 출신으로 과외나 학원은커녕 인터넷 강의조차 제대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일반적인 입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지 못했다.
실제로 의대 들어가서 본격적인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나서야, 소위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혹독하게 공부를 하는지 알게 되었을 지경이었다.
[중요한 게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환자는 당시에 이미 수험생이라고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중요한 문제겠죠.]
‘그렇지.’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바루다 덕에 무엇이 중한지 깨달은 수혁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그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어서 머리가 아프고, 피로하다고 생각했다는 거죠?”
“네.”
“그렇다고 해도 8년은 긴데…….”
“너무 힘들면 타이레놀을 먹거나 했습니다. 그땐 약을 먹으면 그래도 잘 들었어요.”
“그렇군요. 그럼 그때는 입시가 끝나면 다 좋아지겠다고 생각했겠네요?”
“네? 아, 네. 그렇습니다.”
비단 이 환자 아니더라도, 많이들 하는 생각이었다.
입시가 워낙에 큰 관문이지 않나.
이것만 끝나면 그사이 생긴 모든 문제는 저절로 사라질 거라 믿는 사람이 참 많았다.
실제로도 그런 경우가 있다 보니, 점점 더 믿음은 고착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환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근데 입시가 끝나고도 나아지지 않았군요?”
“나아지지 않은 정도가 아니에요. 더 심해졌어요. 예전엔…… 이렇게 아픈 게 일주일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는데…… 요새는 매일 이래요.”
“얼마나 아프냐고 물었을 때 7점 정도 된다고 하셨는데…… 계속 그 정도라고요?”
“네. 거의 매일.”
“지금은요?”
수혁은 대화를 이어 나다가 말고 화면에 뜬 환자 얼굴을 바라보았다.
NRS 7점은 그냥 일상적인 통증은 절대 아니었다.
그 정도의 통증이 있다면 제대로 대화를 이어 나가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나 이 환자는 적어도 지금 나누고 있는 대화에서만큼은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거 같지 않았다.
“아……. 입원을 해서 그런가. 조금 나은 거 같아요.”
“음, 신도…… 아니. 이름이 뭐죠? 레지던트 샘?”
“아, 저는 조 지우런이라고 합니다.”
“닥터 조라고 하면 돼요?”
“네, 교주님.”
“하.”
마무리가 좀 그렇긴 했지만.
입원하고 나서 좋아졌다는 건 어쩌면 단서가 될 수 있을 거 같았다.
수혁이 아까 슥 훑어본 바에 따르면 약이 딱히 달라진 것은 없지 않았나.
만약 오늘 약이 바뀐 게 아닌데, 좋아졌다고 느낀다면 지금껏 지내 온 환경이 원인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지금 환자 약 뭐 들어가고 있죠?”
“그냥 필요시마다 들어갑니다. 일단 타이레놀 써 보고 안 들으면 나프록센입니다.”
“둘 다 그냥 일반적인 약이네요?”
“네. 기질적 원인을 찾지 못해서요.”
“외래에서 받았던 약과 다릅니까?”
“아뇨. 정확히 같은 약입니다.”
“용법이 달라진 것도 아니고요?”
“아뇨.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 오늘 아침부터 나프록센은 투약하지 않았습니다. 맞죠?”
레지던트의 말에 환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라고 하면서였다.
사실 입원 자체로 호전이 일어나는 것도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다.
플라세보 효과라는 말이 괜히 있겠나.
무언가 치료를 시작했다는 생각만으로도 좋아지기도 하는 것이 신체 증상이었다.
‘하지만 이 환자는 입시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다음에 증상이 더 심해졌어.’
[보통 신체화 증상은 스트레스가 아주 강한 유발 요인으로 작용하죠. 가능성이 떨어집니다. 그보다는 환경적 요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확률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수혁은 우선 플라세보는 제쳐 두었다.
실제로 저만한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플라세보부터 들이미는 건 옳지 않은 거 같았다.
게다가 바루다가 말한 환경적 요인이 더 그럴싸해 보이기도 했다.
“혹시 입시 끝나고…… 환경이 바뀌었나요? 이사를 갔다든지?”
“아…….”
“왜 그러세요?”
“어떻게 아셨나 해서요. 제 집은 센토사 근처에 있는데, 학교는 북쪽이라서요. 지금 1인 기숙사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흐음. 기숙사가 혹시 시설이 어떤가요?”
“아주 좋습니다. 깨끗하고요.”
“그래요? 으음.”
환경이 바뀐 건 맞았다.
집에서 기숙사로.
그렇다면 기숙사에 있는 어떤 요인이 환자의 증상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아뇨, 그렇다고 하기엔…… 집과 기숙사에 모두 악화 요인이 있을 거라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그렇네.’
수혁이 딱 희망적인 생각을 품었을 때, 바루다가 초를 쳤다.
아니, 초를 쳤다기보다는 더 합리적인 의견을 말해 왔다.
확실히 우연에 우연을 거듭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세상엔 상상 가능한 모든 일이 생길 수 있는 만큼 아예 ‘0’라고 확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하여간 밀어붙이기엔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럼 뭐지?’
[아직 모르겠는데요? 환경을 비교해 볼 수 있으면 몰라도…….]
결국,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었다.
하여 수혁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실로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표정은 즉시 안대훈에 의해 해석되었다.
‘단서가 더 필요하시군. 지금까지 추론 과정을 미루어 볼 때…… 교주님이 의심하는 건 아마도 환경의 변화…….’
수혁을 다년간 바로 옆에서 보좌해 온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안대훈은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니,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 정도까지 수혁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안대훈에게는 수혁이 갖지 못한 똘끼도 있었다.
<양 지부장.>
<네.>
<지금 즉시 이 주소로 가서 영상 통화해요.>
<네? 여긴…… 대학 기숙사인데요? 무슨 수로…….>
<교주님이 원하는 일입니다.>
<아, 네. 그럼 해야죠.>
그리고 그 똘끼를 전염시키는 데도 도가 튼 사람이었다.
심지어 닥터 양은 안대훈을 직접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면서도 깊이 감화되어 광신도가 되어 있을 지경이었다.
배경 화면을 수혁이 띄운 몰타 십자가로 해 두었을 지경이었다.
“지금 바로 여기로 가 주세요.”
“어…… 뭐, 급한 일인가 보죠?”
“네? 네. 응급입니다.”
“아이쿠, 그럼.”
양은 지시가 떨어진 즉시 병원 밖으로 뛰어나가 택시를 잡았다.
가운을 입은 채였기에 택시 기사는 이게 정말로 급한 일이라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응급인데 왜 앰뷸런스가 아니라 택시를 탔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걸 물어보기엔 양의 얼굴이 너무 심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 사람 하나 넘어갈 듯한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닥치고 운전이나 하자.’
여기서 무슨 일이에요라고 하면 너무 눈치 없는 사람 될 거 같았다.
해서 택시 기사는 싱가포르의 엄준한 교통 법규마저 요리조리 어겨 가며 환자가 다니는 대학 기숙사에 도달했다.
러시아워를 피해서 그런가, 지옥이라는 평을 받는 싱가포르임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가량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 수혁은 이미 다음을 기약하고 전화를 끊은 참이었다.
머릿속으로는 내내 그 생각을 하고 있긴 하지만, 단서가 너무 부족했다.
‘비행기 표 끊을까?’
[돌았어요?]
‘지금 말고 주말에.’
[아, 그건 좋죠.]
급기야 직접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려는 찰나, 안대훈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왜.”
“양입니다.”
“양……? 너 어린양이니 뭐니 그런 소리 하는 거면…….”
“어, 그런 생각은…… 진짜 닥터 양인데요.”
“아, 그래. 음. 웬일?”
“지금 기숙사 방에 들어왔답니다.”
“어?”
“그 환자 기숙사요.”
“허.”
제대로 된 교수라면 여기서 대체 왜 그 사람이 남의 기숙사에를 갔냐라든지.
아니면 미쳤냐 법규를 위반한 거다라든지 하는 말이 튀어나가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수혁은 전혀 제대로 된 교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또라이라고 보면 옳았다.
“잘됐네.”
가타부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전화를 받았을 지경이었다.
“네, 교주님. 분부대로 들어왔습니다.”
받자마자 자신은 하지도 않은 미친 소리가 들려왔음에도 괜찮았다.
직접 싱가포르로 날아가면 어떨까 싶었을 만큼이나 궁금해 죽겠는 찰나에 그걸 해결해 주기 위해 들어간 사람 아닌가.
“잘했어.”
오히려 칭찬이 튀어 나갔다.
“방 안에 비춰 봐.”
“네.”
그리고 즉각 지시를 내렸다.
덕분에 수혁은 곧 기숙사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확실히 환자가 말했던 것처럼 깨끗했다.
그것도 아주아주.
[컴퓨터 앞에 휴지가 많네요.]
‘응? 아, 그거. 남자 방은 원래 그래.’
바루다는 이상한 점을 바로 잡아냈지만, 수혁은 그게 이상한 거란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수혁이야 가정형편상 다인실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친구들은 자취생들도 많지 않았나.
하나같이 저러고 살았다.
[너무 많지 않습니까?]
‘너무 많아?’
하지만 바루다가 다시금 말을 꺼내고 나서부터는 수혁도 조금 이상하긴 하단 생각이 들었다.
“양, 거기 컴퓨터 책상 아래 쓰레기통 좀 봐 봐요. 뭐 있나.”
“네? 아, 네.”
해서 양에게 확인을 시켰고, 양은 무심결에 쓰레기통을 들여다보다가 비명을 질렀다.
“에, 에그머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