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화 게르에서 (1)
“이거 순 미친 새끼들 아냐?”
조별로 왕진을 가야 한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지 않나.
당연히 태화 봉사단 측과 미리 협의를 했다는 얘기였다.
심지어 신현태는 원장으로서 먼저 조를 짜서 보내오기까지 했다.
강혁은 그 명단을 보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한때 각자 분야에서 최고로 불렸던 제자들이 우르르 서 있었다.
“그러게요. 아니, 왜 원장단이 다 붙어 있으려고 해?”
그중 제일 늙은, 심지어 강혁보다도 늙은 사람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제 90이 넘은 노인 중의 노인이었는데 여전히 강건해 보였다.
바로 대한민국 전직 장관 중 가장 활동적인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한유림이었다.
“신현태, 이현종, 이수혁. 이수혁이 그 천재라던 앤데…… 이뻐 죽는다더니 여기서도 이러네.”
강혁은 아까 통화도 했던 참이었다.
그리고 꽤 놀랐다.
신현태는 자신을 무서워하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생전 처음으로 반항을 했기 때문이었다.
수혁과 따로 떼어 놓겠다고 했더니 그랬다.
“떼어 놔야지.”
물론 반항한다고 해서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었다.
필시 무언가 이유가 있긴 하겠지만, 강혁은 여전히 성질이 더러운 사람이어서 그랬다.
‘그래, 그랬지.’
강혁은 조원 발표를 하기 전에 얼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이후로는 서로 바쁘단 이유로 딱히 얘기를 하지 않은 까닭에 상대는 여전히 조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설마 원장인데 내 의견 짬 시키겠나…….’
‘나도 이제 나이가 몇 갠데.’
신현태와 이현종은 설마설마하면서 백강혁의 입을 바라보았다.
조 발표 한다는데 여전히 오물거리며 양고기만 먹어 대고 있는 수혁과는 다분히 대비되는 장면이었다.
“일단 1조는…….”
“2조는…….”
“3조는 이수혁, 안대훈 그리고…….”
“끼야호우!”
“4조는 신현태…….”
“5조는 이현종…….”
중간에 안대훈이 미친 사람처럼 좋아했던 걸 제외하면 참으로 조용한 발표였다고 할 수 있었다.
신현태와 이현종 모두 누구 하나 죽일 거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상태 그대로 양고기만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강혁은 아예 둘의 얼굴도 확인하지 못했다.
“당직도 이 조대로 돌아갑니다. 여기가…… 인구는 적은데, 오시면서 보셔서 알겠지만 도로 사정이 아주 열악해요. 그리고 차들이…… 차들이 그냥 막 갑니다.”
“아……. 그렇긴 하더라.”
강혁의 말은 계속되었다.
계속 중요한 얘기였다.
왕진에 당직.
확실히 여기도 만만한 곳은 아닌 모양이었다.
게다가 사고도 무척 많을 거 같았다.
관광지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혼잡한 곳은 정말이지 이래도 되나 싶었다.
“일단 차들 상태가 좀 열악해요. 중고차들이 대부분인데…… 관리가 잘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브레이크 제동도 잘 안 돼요. 게다가 아직은 보행자 우선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자리하질 못했어요.”
원래 교통사고는 아예 미개발 지역일 때 제일 적다가 개발이 진행되면서 폭발적으로 늘고, 선진국에 접어들면서 줄어드는 법이었다.
울란바토르는 아직 개발이 한창인 곳이다 보니 이런저런 사고가 많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된 병원이 없어서…… 수도 전체를 통틀어서도 여기가 제일 좋아요. 교민들이야 당연히 이리로 오고. 게다가 신문, 방송 통해서 여러분들 오는 거 광고 때려 놔서 앞으로 일주일 동안 환자가 엄청 많을 거예요. 그럼, 오늘 만찬 즐겨 주시고…… 내일부터는 파이팅 바랍니다.”
말이 길었는데, 요약하면 오늘이 마지막으로 쉴 수 있는 날이니 즐겨 둬라 뭐 이런 느낌이었다.
대신 돌아가기 전 3일 정도는 관광 일정도 잡혀 있긴 해서 일행 얼굴이 그리 어두워지진 않았다.
게다가 오늘의 양고기는 정말이지 훌륭하기 그지없었다.
최고라는 말도 아깝지 않을 지경이었다.
“조는 찢어도 숙소는 붙여 놨네. 다행이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마련된 숙소로 향했다.
수혁이 여태 외국 나가서 가 본 곳 중에서는 제일 후진 곳이었다.
이곳이 유별나게 후진 곳이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간 수혁이 다녔던 곳들이 너무 좋은 곳들이라 그랬다.
일단 가 본 나라라고 해 봐야 두바이, 싱가포르 그리고 미국이 다이지 않나.
게다가 워낙 소수 인원이 다녔던 참이라 호텔에서만 묵었다.
심지어 고위 인사랑 엮인 후에는 아예 스위트룸으로 변경이 된 적도 있고.
[개후지네…….]
‘야, 이만하면 깔끔하지. 당직실보다는 좋잖아.’
[외국에서는 무조건 호텔에서 자는 건 줄 알았죠.]
‘그럴 리가 있냐? 우리가 다 합치면 거의 200명인데…… 아무리 태화라고 해도 호텔 내주긴 어렵지.’
그에 비해 이곳은 아담한 기숙사 느낌이었다.
아니, 실제로 기숙사 역할을 한다고 했다.
태화 울란바토르 병원은 단지 환자만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교육 기관으로써의 역할도 하고 있어서였다.
각지에서 보내오는 학생이나 레지던트 또는 펠로우들이 지내는 곳이었다.
당장 수혁이 지내게 된 방만 해도 원래 주인은 휴가를 줘서 고향으로 돌려보낸 상황이라고 했다.
당연히 호텔을 기대했다면 눈에 차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맥주라도 할까?”
“맥주를 가져왔어요, 형?”
“가져왔지.”
“와…….”
하지만 일행 중 어느 누구도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었다.
소탈한 사람들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이현종은 몰라도 신현태는 가족 여행 갈 때만큼은 비행기도 무조건 비즈니스석 이상으로 끊고 5성급 호텔에서만 자는 사람이니까.
사실 이현종도 사람이 무던한 편이긴 해도 먹는 건 또 까다로운 편이지 않나.
다만 지금은 다들 봉사 활동 왔다는 걸 자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음먹기에 따라 이런 숙소가 더 좋기도 했다.
“죽이네.”
“그러니까. 우리가 뭐 연구실에서 한두 잔 할 때는 있어도…… 또 언제 이렇게 캠프 오듯 지내겠어.”
“그러니까요.”
“하하하.”
군대 말고는 나이 든 사람들이 이렇게 한데 모여 잘 만한 기회도 잘 없었다.
특히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현종, 신현태, 수혁, 조태진 그리고 안대훈처럼 잘 맞는 사람들끼리 있을 확률은 극히 드물었다.
덕분에 이들은 밤이 깊도록 술잔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워 나갔다.
혹시 백강혁한테 걸려서 뒤지게 혼날까 봐 커튼을 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가지고 온 골판지로 창문을 가려 빛이 새어 나가지 않게 조마조마했다는 것만 빼면 최고의 밤이었다.
‘체력 좋던데?’
물론 강혁을 상대로는 다 의미 없는 짓이었다.
그의 예민한 눈을 가리기엔 다 큰 어른들이 벌인 생쇼도 좀 모자란 감이 있어서였다.
그렇다고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들은 의사이지 않나.
그것도 대학 병원에서 일하는.
자기 책임이 된 환자를 고작 몸 좀 피곤하다는 이유로 내팽개치지는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게다가 왕진은 복불복의 영역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어떤 날은 정말 환자 하나 없어서 그저 수다나 떨고 먹을 거나 얻어먹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자, 그럼 외래는 원래 돌아가던 대로 가고…… 조마다 차량에 탑승해 주세요.”
해서 강혁은 봉사단 인원들에게 별말 없이 아침 먹이고 차에 태웠다.
오프로드 달리기에 적합한 지프 차량들이었다.
타이어 휠이 한국 도로에서는 불법으로 잡힐 듯이 컸다.
그 외에 또 특이한 것은 몇몇 지프 차량엔 오토바이가 실려 있다는 점이었다.
‘뭐여.’
[저도 모르죠. 저는 수혁이 알고 있는 것만 압니다.]
‘묘하게 나를 비난하는 느낌이 드는데.’
[괜히 양심에 찔리시는 거겠죠. 저는 그런 말 안 했습니다.]
수혁을 비롯한 모두가 이를 궁금해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수혁과 같은 조에 강혁이 끼어 있다는 점이었다.
아니, 원래 같은 조는 아닌데 그냥 조마다 돌아가면서 잘 돌아가는지 보려고 합류했다고 했다.
“저거…… 여기서 응급 터지면 의사들이 더 빨리 가야 할 때 타려고 구비한 거야.”
“아…….”
강혁은 수혁의 얼굴을 보자마자 뭐가 궁금한지 알겠다는 얼굴로 답을 해 주었다.
그리고 곧 차량이 출발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였다.
“여기 풀이 거의…… 함정 같을 때가 있거든. 결초보은이라는 말이 괜히 중국에서 나온 게 아니라니까. 마력이 엄청나야 해.”
강혁의 말대로 마력이 대단한 모양이었다.
도로는 금세 뚝 하고 끊겨 버렸다.
제대로 포장된 도로가 없어졌다는 얘기였다.
다음부터는 그저 차가 오래 다니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흙길이었다.
동시에 풍광이 어제 오면서 잠시 보았던 초원으로 바뀌었다.
다시 봐도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디쯤이래?”
“며칠 대기할 거라고 하는데…… 늘 만나던 곳에서 합류할 거 같습니다.”
“그래.”
수혁이나 안대훈처럼 태화에서 온 이들이 바깥 풍경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에도 운전대를 잡은 기사와 강혁은 바빴다.
유목민들이다 보니 실시간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있어서 그랬다.
진료해 주러 가는 건데 좀 기다려 주면 안 되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동물 치는 입장에서 그게 잘될 리가 없었다.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현지인에게 맞춰야 하지 않겠나.
해서 강혁은 늘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유목민을 따라잡는 편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게르까지 싹 치고 잠시 머무를 곳에 있을 모양이었다.
“아, 저기.”
“오……. 교주님, 생각보다 큰데요?”
“그러니까. 뭐라고 하나, 저걸?”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맨날 의학만 공부하다 보니까 저런 건 다 까먹어서.”
“나도 그래. 그리고 저거 모른다고 무식하단 소리는 안 들을걸.”
강혁은 무식한 소리 찍찍해 대고 있는 둘을 가만히 보다가 이내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벌써 여러 차례 방문했던 부족이라 그런가, 환영 인사를 해 주기 위해 몇몇이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상하게 좀 부산스러운데…….’
한데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단지 환영만을 위해서라면 저렇게까지 서두를 필요가 있나 싶었다.
“혹시 아까 통화할 때 별 얘기 없었어?”
“통화 음질이 아주 좋진 않아서 많은 얘기는 못 했습니다.”
“아. 그래. 그렇긴 하겠지.”
강혁은 혀를 차고는 차가 멈추자마자 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아까부터 차량 오는 걸 보고 있던 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백 교수님!”
수혁은 처음 듣는 언어를 해 가면서였다.
‘몽골어인가?’
[누누이 말하지만 저는 수혁이 아는 것만 압니다.]
‘에이.’
다행히 강혁은 말이 통하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 주었다.
그러면서 차량에 실려 있던 물품을 내렸는데, 태화에서 온 이들은 눈치를 보면서 그걸 도왔다.
병원에서 맨날 하는 게 눈치 보는 거다 보니 다들 잘했다.
이럴 때 다행이라는 말을 써야 되는지는 의문이었지만 하여간 그랬다.
그렇게 짐을 바리바리 들고, 다리가 불편한 수혁만 가벼운 짐을 든 채 따라가고 있으려니 강혁이 마침내 몽골인들과의 대화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열나는 애들이 많다는데, 전염성이 있을 수도 있겠어. 우선 가져온 장비에서 마스크랑 고글은 챙겨서 입자고.”
전염병이라.
그건 자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