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9화 몽골이랑도 (2)
“보냈는데요.”
하늘이 무심하시지.
평소에는 그렇게 일 잘하는 것 같지도 않더니.
오늘만은 예외로 두기로 했는지 벌써 도장 딱 찍어서 보낸 참이었다.
심지어 답신도 와 있었다.
<회장님께도 보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이면 아마 이유원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강혁은 미군과 함께 일하던 시기에 당시 전자 부사장이었던 이유원과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다.
재벌가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과 함께 반골의 상을 동시에 지닌 묘한 인간이었다.
강혁은 그런 간극이 있는 인간을 좋아하는 편이라, 여지껏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망할 새끼들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빠릿빠릿해.’
하여간 거기까지 올라갔으면 이제 무르는 건 불가한 일이었다.
지금껏 받아먹은 게 있는데 예의를 잃어서야 되겠나.
심지어 이번에 온 태화 봉사단도 사실상 큰 도움이었다.
덕분에 울란바토르 병원을 이 지역 전체에 알릴 수 있었다.
한류 때문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요샌 한국에서 의사들 온다고 하면 다들 난리였다.
‘아……. 귀신.’
귀신이라 그럴까?
딱 생각만 했는데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뻘겋게 된 채로였다.
아마 강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힉 하고는 뒤로 넘어갔을 터였다.
그만큼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와, 졸려.”
“우리 수혁이. 졸려? 어제 잠자리가 불편했나.”
“안대훈 새끼가 코를 엄청 고네요.”
“무엄한지고. 감히 수혁이보다 먼저 잠이 들었어?”
이현종은 버럭 화를 냈다.
말도 안 되는 사유였으니, 안대훈으로서는 억울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안대훈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황공합니다. 제가 어찌…… 아무리 피곤했기로서니.”
이렇게 되면 암만 수혁이 잠을 못 자 언짢은 상황이라 해도 별말을 못 하게 되는 게 정상이었다.
“에이.”
나이가 좀 더 들고, 교수로서의 특권에 더 취하게 되면 또 모를 일이었지만.
지금의 수혁은 아직 30대 초반이었다.
그저 고개를 흔들고는 안대훈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오늘 쉬는 날인데 뭐. 근데 너 살은 빼야 돼. 그냥 코만 고는 게 아니라 끅끅대더라.”
“네? 저 수면 무호흡이 있어요?”
“어. 꽤 심하던데. 몰랐어? 같이 자는 애들이 말 안 해주디?”
“어쩐지…… 당직방에 들어가면 다 나가더라고요.”
“아니, 그건.”
코골이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겠단 말을 하려다 간신히 참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열심히 광을 낸 머리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경건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뭐랄까.
괜히 불경을 저지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수면 무호흡 있으면 수명이 준다고. 오래 살아야 할 거 아냐.”
해서 수혁은 그저 하고자 했던 말을 했다.
의사라면 다른 의사에게 응당 해야 할 거 같은 그런 말이었다.
하지만 안대훈에게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가, 감사합니다. 오래 살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은혜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금세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도 오래 살고 싶다, 수혁아. 뭐 할 거 없니?”
“그러니까. 대훈이만 신경 써?”
신현태, 이현종은 아쉬워하고 있었다.
저 멀리 짬밥에 밀려나 있는 조태진도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 형도 너 오래 보고 싶다고.
‘하.’
[근데 말할 게 없지는 않죠.]
‘그래서 더 이상해.’
[그냥 하시죠. 그럼 좋아서 까무러칠 거 같은데.]
이게 가까이서 봐도 희극이었지만, 멀리서 보면 더 괴상한 희극이었다.
강혁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을 지경이었다.
‘무를까.’
잠시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수혁은 이미 이현종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는.”
“어어.”
보통 의사들은 자기 건강에 대해 누가 왈가왈부하는 걸 무척 꺼려 하는 편이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있지 않나.
아는 것과 실천하는 건 누구나 알다시피 별개의 일이었다.
아마 이런 경험도 다들 한 번쯤 있을 터였다.
건강 검진받고 살 빼고 담배 끊으란 말을 하는 의사가 뚱뚱하고 심지어 입에서는 담배 냄새가 났던 경험.
이현종이야 기인이니만큼 그런 게 훨씬 심한 인간이었는데, 지금은 경청 중이었다.
“이제 와인도 줄여야 해요. PPI 먹죠?”
“아니, 그걸 어떻게.”
“맨날 같이 다니는데 어떻게 몰라요.”
“앗, 아아.”
그 정도가 아니라 숫제 감동 중이었다.
“삼촌은.”
“어어.”
신현태도 사람 좋은 것과 별개로 고집이 굉장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집은커녕 아예 자기 생각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지방간 있죠?”
“어……. 그건 또 어떻게.”
“장강명 교수님이 다 불었어요. 고기 좀 줄여요. 그리고 약은 왜 안 먹어요?”
“그, 귀…….”
“귀찮다고요? 오래 사는 게 귀찮은 거예요?”
“아니, 먹을게. 오늘부터 먹을게.”
“그래요.”
이 둘에 비해 조태진은 사실 아직 이렇다 할 문제가 없었다.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해서 혼자 유일하게 수혁에게 칭찬받을 생각에 가슴을 내밀고 있었다.
타고 나기도 했거니와 평소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에 우람한 대흉근이 딱 눈에 들어왔다.
그래야 정상인데, 정작 수혁의 눈알은 조태진의 팔꿈치에 가 있었다.
간혹 조태진이 저기를 문지른다는 사실을 수혁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형은 운동할 때, 팔꿈치 자세 좀 신경 써요.”
“어, 어?”
“특히 누가 볼 때 무게 더 올리던데…… 그러지 말고 제발. 건강하려고 하는 거지, 보여 주려고 하는 거 아니잖아요. 팔꿈치 이러다가 다 나간다니까? 가슴으로 받을 무게를 왜 관절로 받고 있어요.”
“어, 어어어. 어어. 그래!”
수혁이 그렇게 세 사람의 의사를 침몰시키고 돌아올 때쯤 바루다가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응?’
[수혁은 지방간도 있고, 운동도 안 하고, 위 식도 역류증도 있죠.]
‘아.’
[수혁이나 좀 잘하십쇼.]
‘아.’
그 덕에 수혁까지 침몰했다.
분명 수혁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해서 조언을 들은 것이고, 또 조언을 들을 수 있어 기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건강 문제가 있다는 직시하게 된 탓에 침울해졌다.
그러니까 식당 한쪽 구석이 어두워졌다는 얘기였다.
강혁이 보기엔 정말로 웃기는 놈들이었다.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게 무슨 사춘기 애들도 아니고.
‘종교에 빠져서 그래. 나무랄 일도 아니지. 귀신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보통 귀신도 아니고, 아마 천재 의사의 귀신일 터였다.
그럼 일반인으로서는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잊자, 잊어.’
하여간 본인은 절대로 빠질 생각이 없었기에, 강혁은 애써 정신을 차린 후 앞으로 있을 관광 일정에 대해 브리핑을 마쳤다.
일정이라 봐야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1박 2일 동안 초원에 있는 게르에서 지내는 게 다였다.
물론 풍경은 끝내주긴 할 터였다.
적어도 한국에는 이런 곳이 없었다.
드넓은 초장에 푸른 물가 그리고 느긋하게 왔다 갔다 하는 동물들.
거기에 더해 맛만큼은 최고라 할 수 있는 점심과 저녁까지.
‘이 정도면 우리 불쌍한 의사들은 만족이지.’
다들 너무 성의 없이 준비하신 거 아니냐고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태화에서 온 이들은 모두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노예선에서 잠시 휴가받은 사람들처럼 보여서 살짝 마음이 아팠다.
“와, 진짜 멋있다.”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게르에 도착한 일행은 대만족이었다.
풍광이 일단 죽여줬다.
“와, 진짜 맛있어.”
점심도 맛있었다.
“와, 이건 진짜 개맛있어.”
저녁은 맛있다는 말로도 좀 부족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한국에서 파인다이닝에 미친 듯이 다니던 이현종까지 쌍따봉을 날리고 있었다.
신현태나 이현종, 조태진 그리고 김승규야 말할 것도 없었다.
“자, 그럼 우리 태화 봉사단 여러분. 설문지 작성 좀 부탁드립니다. 이번 봉사가 어땠는지, 또 올 생각이 있는지 뭐 이런 거. 간단한 거니까 먹으면서 해 줘요.”
그렇게 왁자지껄한 와중에 강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문지를 나눠 주면서였다.
“음, 또 와야죠.”
“와야지.”
“좋다.”
“좋아.”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가 노예냐, 왜 봉사 와서 이렇게까지 굴러야 하냐 뭐 이런 얘기를 하던 놈들이 맞나 싶게 긍정적인 반응만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이놈들이 언제 이런 호강을 해 봤겠나.
특히 레지던트들은 거의 노예의 다른 말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심지어 교수들도 인생에서 제일 좋은 시절이 언제냐고 하면 천편일률적으로 미국 연수 시절만 꼽는 지난한 인생들이었다.
‘새끼들.’
강혁은 역시나 또 오겠다는 의견으로 가득 차 있는 서류를 보면서 씨익 웃었다.
역시 이 수법은 언제나 잘 통하는구나 싶었다.
따르릉.
그때 전화가 울렸다.
강혁은 아니었다.
수혁이었다.
“와, 이게 터지네.”
“여기 게르에는 기지국이 있더라고요. 거의 뭐 관광지로 쓰이는 곳이라서 그런가 봐요.”
수혁은 일단 전화가 왔다는 거에 놀랐다.
안대훈은 수혁에게 칭찬받기 위해 사는 사람인 만큼 사전 조사도 열심히 해 온 참이었다.
당연하게도 기지국 얘기가 뚝딱 나왔다.
“오.”
“일단 받아 보시죠. 병원 같은데요?”
“아, 진짜네. 나 나온 거 모르나.”
“알면서도 걸었다면 더 큰 일이 난 거 아닐까요.”
“아, 그렇네.”
안대훈의 조언은 실로 적절한 면이 있었다.
한창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 방해를 받은 만큼, 입이 사발만큼 나오려는 수혁의 불만이 쑥 들어갔을 정도로 설득력도 있었다.
“이수혁입니다.”
해서 수혁은 짜증 기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이것만으로도 전화 건 상대의 마음을 편안히 해 주기엔 충분한 면모가 있었다.
원래 교수에게 전화 거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 않나.
기껏 용기를 내서 전화를 걸었는데 날카로운 말투가 돌아오면 바로 쫄기 마련이었다.
“아, 교수님. 저 2년 차 우하윤입니다.”
“아, 하윤아. 웬일?”
하여간 전화를 건 이는 우하윤이었다.
신도 중에서도 열성 신도이니만큼 수혁이 지금 병원이 아니라 몽골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인간이란 뜻이었다.
“죄송합니다. 몽골에 계신데…… 소아과 신도가 급하다고 해서요.”
“어, 아냐. 어차피 지금 저녁이고, 밥 먹고 나면 할 일이 없을 거 같아.”
게르 주변으로 갈 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호수도 있고 관목으로 이루어진 작은 숲도 있었다.
낮에 말 타고 달리는 걸 보기만 했는데도 가슴이 다 시원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밤에는 모든 것이 불가했다.
아예 불이 없었다.
그러니 할 일이 없다는 건 과장이 아니란 얘기였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환아는 생후 10일 된…… 여아입니다.”
“생후 10일?”
“네.”
“그래, 얘기해 봐.”
그러던 찰나에 할 일이 생겼다.
그것도 생후 10일 환아를 원격으로 봐야 하는 일이었다.
쉬울 리가 있을까?
더럽게 어려울 일일 터였다.
그런데도 수혁의 심장은 설렘으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좋군요.]
바루다 또한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