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5화 학회 (2)
“우 교수? 우 교수는 하지.”
“아니, 기조실장 이름을 달고? 이건 미친…… 미친 짓인데.”
만약 ‘태화 의료원 원장 신현태, 진료는 칠성 병원에서 보는 이유’라는 강의명을 상정해 보자.
아니, 기사명이라 해도 난리가 날 터였다.
태화에서의 직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태화에 대한 신뢰도가 팍 깎일 테니까.
아마 기사가 나는 순간, 눈앞에 태화에서 보낸 저승사자들이라도 당도하지 않을까?
“아……. 이건 협의해 봐야지.”
“이게 협의가 되는 거라고 생각해?
“글쎄.”
“글쎄는 무슨! 아니, 수혁아. 너는 왜 가만히 있었어!”
신현태는 외롭고 고독했다.
왜 나만 이러고 있단 말인가.
정말 나만 불편한 거야, 이거?
“우 교수님이 도움받기는 했거든요, 삼촌.”
“수혁아…….”
어른들의 세계는 그런 게 아니란다.
도움을 받아도 쓸 수 있는 말이 있고, 없는 게 있어요.
이건 엄밀히 말해서 상상도 못 할 말이라고.
“그냥…… 학술이사 우창윤이 경험한 통합진료센터…… 이 정도로 갑시다.”
괜히 이따위 말을 했다가 우창윤 꼭지 돌게 할 일 있나.
사실 우창윤 꼭지 돌게 해도 별일이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그 인간 인생에는 크나큰 재앙이 있긴 할 터였다.
칠성보다는 낫겠지만 아선 쪽 조직 문화도 그리 만만치는 않았으니까.
“기조실장을 넣고 싶은데…….”
“안 된다니까? 이걸 우창윤이 미쳤다고 받아? 그 인간 차기 원장이 꿈인데!”
“그 실력으로?”
“실력만으로 원장 하나?”
“하긴.”
“왜 나를 그렇게 보면서 말해.”
“아니, 나는 정말 아무 소리도 안 했어.”
신현태는 씩씩대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 복장 터지게 하는 형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눈치 보던 안대훈이 제목을 슬쩍 바꾸었단 점이었다.
중간에 제 눈치가 아니라 수혁이 눈치를 보았다는 게 살짝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들과 어울리려면 강제로라도 긍정킹이 되어야만 했다.
안 그러면 죽을 수도 있었다.
순수하게 열이 받아서.
“그럼 박국진 교수는 괜찮지?”
“어…… 아유. 이것도 사실. 이게. 박 교수님 괜찮겠어요? 정말?”
“저야, 칠성 엿 먹일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죠.”
“아, 그러시구나.”
생각 같아서는 여기도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본인의 의지가 저리 투철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박국진은 그야말로 충성을 다했던 조직에서 버림받지 않았나.
아니, 버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망가뜨리려고 했더랬다.
“그럼 넘어가고…… 다음은. 다음이 수혁이 세션 아냐?”
“맞아.”
“어……. 외과, 내과 가릴 것 없이 통합진료센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유. 음.”
이것도 제목이 너무 세긴 했다.
네가 누구건 간에 일단 우리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뜻 아닌가.
대상이 어디 의대생이라면 모르겠는데, 이건 의사들을 대상으로 한 학회였다.
심지어 교수들도 대거 쏠려 있을 터였다.
왜냐고?
신현태도 원장 이름을 달고 초대장을 보냈거든.
‘내가…… 내가 이걸 확인하고 보냈어야 했는데.’
태화 의료원 원장이 와서 자리 빛내 달라고 하면 혹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라이벌 구도에 있는 병원이 아니고서야 다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신현태는 모르고 있었으나, 학회 창설 기념회의 위명이 이미 여기저기 퍼진 참이었다.
호텔 뷔페를 빌린 것도 모자라 아이돌까지 와서 축하 공연을 하다니.
대통령 취임식 같았다는 평까지 있었다.
물론 이건 대통령은커녕 국회의원 행사에도 가 보지 못해서 할 수 있는 무식한 소리이긴 했지만.
하여간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도 묻지 않고 다들 오겠다고 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신현태는 어휴어휴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창윤 건을 봐서 그런가, 수혁의 강의는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대로면 되겠어?”
“어? 어어. 뭐…….”
“그래, 아유. 왜 이렇게 예민해. 그냥 학회인데.”
“학회 강연 제목을 기사 제목처럼 뽑으니까 그렇지.”
“어차피 우리끼리만 보는 건데 뭔 상관이야.”
“무슨 우리끼리야! 나한테 형이 부탁한 사람만 백 명이 넘는데!”
“워워. 이러다 협심증 오겠다. 왜 이렇게 화를 내. 하여간…… 그럼 프로그램 안내는 이렇게 해서…… 오겠다고 한 사람들 대상으로 다시 뿌리자. 장소까지 다시 공지하는 거야.”
씩씩대는 신현태를 이현종은 저리로 밀어 놓고는, 나머지에게 얘기했다.
이현종계는 다른 계파와 차이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절대 충성이었다.
이현종이 아니라 수혁에게 충성하는 사람도 있긴 했으나 결과 자체는 별 차이 없었다.
그저 하자면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들 손이 빨랐다.
아차 하는 순간 메일이 완성되더니 전송되었다.
“진짜 저렇게…… 어.”
신현태는 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다가 품속을 더듬었다.
전화가 와서 그랬다.
“웬일이시지?”
발신인을 보니, 한국 외과 학회장이었다.
솔직히 잘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냥 병원일 하면서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알게 된 정도?
그러다 골프 한번 친 게 인연의 다였다.
‘티가 비었나.’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받은 신현태는 깜짝 놀랐다.
“시……신 원장. 방금 메일 받았는데.”
“무슨 메일이요?”
“그 통합진료센터……?”
“아, 아아아.”
방금 보낸 메일이 언급되어서 그랬다.
“이거 제목이…… 이거 해킹당한 거 같은데. 박국진 교수가 나도 아는데 이럴 사람이 아닌데…….”
“네? 아, 그게. 음. 그건 학회 측에 문의를 하셔야…….”
“아니, 나는 자네 초청으로 가는 거라. 음, 하긴 그런가? 근데 문의 번호가 없어.”
“없어요?”
“응. 없어. 하여간 이거 진짜라 이거지?”
“그…… 아마 그럴 겁니다.”
“가야겠네.”
“네?”
말도 안 되는 제목을 봤는데 왜 간단 말인가.
뭐 이런 짧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들어 보니 당연히 가야 하는 학회이긴 했다.
“우창윤 학술이사. 이 사람 아선 기조실장 아니야?”
“그렇죠.”
“박국진에 우창윤에. 이런 꿀잼이 어디 있겠어. 게다가 외과도 도움을 받으라니. 이거야 원. 하하. 내 평생 제일 재밌는 학회가 될 거 같은데?”
‘재밌는’이라는 단어를 ‘개막장’이라는 말로 바꿔도 별반 차이가 없을 거 같았다.
‘다행인가.’
그럼에도 신현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화 안 내는 게 어디냐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다 착각이었다.
외과 학회장이야 호탕한 사람인 데다가 칠성도 아선도 아니라서 이런 것이었을 뿐, 관계가 있는 이들은 반응이 전혀 달랐다.
특히 칠성 측은 격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깽판이라도 쳐야 되나?”
“근데 초대받은 사람 아니면 못 들어간다던데요?”
“칠성에 없어?”
“없어요.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이런 미친놈들이. 학회를 칠성을 빼고 만들어?”
너무 화나는 포인트가 많아서 대체 어디서 더 빡쳐야 하는 건지도 헷갈렸다.
일단 박국진.
이 배신자 놈을 충동질해 가지고 이런 데 써먹는 것부터가 열 받는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통합진료센터라는, 그래도 나름 요새 핫한 센터에서 주최하는 학회인데 지척에 있는 병원인 칠성을 빼?
거리를 빼고 봐도 3대 병원이지 않나.
이건 다분히 의도적인 엿 먹임이라고 봐야 했다.
“아선은?”
“아선은…… 그냥 초대받을 만한 사람들은 다 받은 모양이에요. 분과장들은 거의 다……? 외과 계열도요.”
“그럼 정말 우리만 쏙 뺀 거네?”
“네.”
“그 와중에 박국진은 넣었고?”
“네.”
“허.”
아선도 빠졌으면 이해해 주려고 했다.
3대 메이저 중에 둘이 빠지면 그건 그냥 태생이 한계가 있는 학회란 뜻이 되니까.
하지만 반대로 칠성만 빠지게 되는 건 기분이 상하는 일이었다.
아니, 어떤 위기감마저 들었다.
실제로 최근 태화와 아선은 약진하는 데 반해 칠성은 주춤하고 있어서 그랬다.
‘악재가 있었지.’
언론 플레이를 하다가 이현종한테 완전히 밟힌 적이 있지 않나.
불난 집이 있다고 해서 놀리러 갔더니 홀라당 탄 것은 내 집이었고요.
게다가 박국진도 나가고.
후원회도 흔들리고.
위기의 연속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아무리 작은 학회라 해도 칠성을 배제한 놈이 나오자 불안해졌다.
‘그렇다고 가게 해 달라고 해?’
이 말을 하는 것도 애매했다.
단순히 자존심 문제가 아니었다.
박국진의 강의가 문제였다.
저런 걸 떡하니 박아 놓고 하는데 가게 해 달라고 한다.
이건 안 될 일이었다.
“원장님.”
“응?”
고뇌에 고뇌를 거듭하고 있으려니 기조실장이 불렀다.
뾰족한 수가 있는 모양이었다.
“명예훼손으로 걸까요?”
아니었다.
뭉툭하기 그지없었다.
병원이 학회를 고소한다고?
명분이 있어도 미친 짓이었다.
게다가 이 건에 대해서만큼은 칠성도 사실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박국진이 그러다 쓸데없는 소리라도 하면…… 우리 나락이야.”
“그룹 차원에서 움직여도요?”
“저기도 우산이 있잖아.”
“작은 학회일 뿐…….”
“이것 봐. 저런 강의명을 설마 박국진이 정했겠어? 설령 정했다 해도 승인한 건 학회장이야. 이현종, 이수혁. 그 둘이 지금 태화 실세라는 거 몰라서 그래?”
전면전으로 번졌다가는 일단 다 타 죽는다고 봐야 했다.
아니, 어쩌면 여기만 죽을 수도 있었다.
저 둘은 태화 핵심 프로젝트의 일원이니까.
실제로 저 센터가 들어선 이래, 태화는 다시금 독보적인 1위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심지어 칠성이 아선과 점차 벌어지기 시작한 것도, 내 집이 탔어요 건도 있긴 하지만 저 통합진료센터로의 접근성 여부도 있었다.
근데 저 둘을 태화에서 내친다고?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에 비해 현 원장이나 기조실장은 칠성에서 그렇지 않아도 내칠까 말까 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런 짓은 하지 말고…… 초대받고 가겠다고 한 사람들…… 좀 물색해서. 우리 사람 대신 꽂아 봐.”
“네? 그게 될까요?”
“초대받은 인원이 수백 명은 될 거라며. 그걸 어떻게 다 알아. 그냥 들어가면 장땡이지. 큐알이니 뭐니 그런 것만 있으면 될걸.”
“아,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그럼 가서…….”
“뭘 할 생각은 말자고. 그냥 분위기를 봐. 아니, 아냐. 나도 가지.”
“네?”
생각해 보니까 화낼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이건 두려워해야 할 일이었다.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칠성이 뒤처지고 있지 않나.
그리고 그 칠성의 원장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뻗대고 있다가는 그냥 날아갈 것 같았다.
‘봉합…… 봉합해야지. 내가 이현종 그 노인네 앞에서 무릎을 꿇든 뭘 하든…….’
이현종이 설마 그냥 우리 기분 나쁘라고 이런 강의명을 보냈겠나.
이건 다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것일 터였다.
숙이랄 때 숙이라는.
그래, 확신이 섰다.
“내가 간다. 진짜 무서운 노인네네, 그 사람.”
이렇게 칠성 원장이 결의를 다지고 있을 때, 이현종은 회의 같지 않던 회의를 마치고 병원 뒷골목에서 맥주를 빨고 있었다.
정말 이런 제목으로 되겠냐는 신현태의 말에 껄껄 웃으면서였다.
“기분 나쁘대? 그럼 성공인데. 하하!”
정치는 개뿔.
그냥 아무 생각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