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688화 (688/1,303)

688화 뒤풀이 (1)

“무슨 생각에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묻지 않겠어.”

이현종은 지금 칠성 병원 원장과 연자 대기실에 있었다.

말이 좋아 연자 대기실이 사실상 통합진료학회의 중추가 모인 방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번이 첫 학회다 보니 외부인들에게는 아예 강연을 요청하지도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칠성 원장 오성흠으로서는 아예 적진 한가운데에 떨어진 기분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우창윤…… 저 인간은 대체 왜…….’

이해가 안 가는 일이 하나 있다면 바로 우창윤이었다.

어린 교수라면 지금 적을 두고 있는 곳이 아선이건 칠성이건 간에 별로 중요하지 않을 터였다.

태화에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해 줄 수 있는 확률이 높으니까.

하지만 우창윤은 어떤가.

저놈은 이미 학회에서도 자리를 잡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저 어린 나이에 벌써 기조실장에 올랐고, 별일 없다면 차기 원장도 노려볼 수 있었다.

3위에 자리하고 있던 아선을 어찌 되었건 잠시나마 1위를 경험하게 해 주었고, 지금도 칠성은 제쳤으니까.

“어디 봐?”

“아, 네. 원장님.”

“나 원장 아닌데.”

“어, 그…… 센터장님?”

“어허. 여기가 어디지?”

“아, 학회장님.”

“그래, 그래.”

이현종은 연신 우창윤을 힐끔거리고 있는 오성흠을 채근했다.

오성흠도 어찌 되었건 원장 자리에 올랐을 만큼의 눈치는 있는 사람이라 금세 이현종의 비위를 맞추었다.

땡땡.

그사이 시간은 바람처럼 흘러, 쉬는 시간이 끝나 버렸다.

우창윤은 마지막으로 정리한 발표 자료를 한 번 더 점검한 후,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오성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욕보시고요.”

욕보라는 말.

실로 오랜만에 들어 보는 말이었다.

레지던트 이후론 처음 같았다.

그런데도 실감이 팍 났다.

정말 욕볼 상황이었으니까.

“이거 봐. 아까 찍은 영상이야. 사실 지금 찍으면 더 웃길 거 같긴 한데.”

이현종은 그렇게 우창윤이 나가자, 영상 하나를 틀어 주었다.

주연 오성흠, 감독·연출은 안대훈이 맡은 걸출한 작품이었다.

학회장에서 끌려 나오는 오성흠, 화장실로 직행하는 오성흠, 거기서 메이크업을 절반만 지우는 오성흠 등이 차례로 흘러나왔다.

그 짧은 시간에 편집도 했는지 얼굴이 드러날 때는 이상한 효과음까지 나왔다.

‘이 미친놈.’

오성흠과 이현종은 각기 다른 생각으로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

당연히 전자는 원망을 품고 있었고, 후자는 대견함을 품고 있었다.

‘하아.’

뒤에 서 있던 정상인, 신현태는 이마를 짚었으나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잡았어요?”

이제 아까 강연을 끝내고, 질문을 비롯한 접대를 마치고 들어온 수혁도 한패였으니.

차라리 이현종한테는 개길 수 있었으나, 수혁에게는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신세였다.

“어, 잡았어.”

“오, 역시 삼촌.”

“어, 나도 도왔어.”

아니, 한패로 보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말을 하면서도 내가 왜 이러나 싶었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수혁을 향한 애정은 이해의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아, 안 돼!”

“이거 어디 올라가면 파장이 좀 있겠지?”

하여간 이현종은 영상을 보자마자 이병헌이라도 빙의한 듯 ‘아, 안 돼’를 외치고 있는 오성흠을 향해 말을 이었다.

“올리지 않으려면 대가가 필요하겠는데.”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올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에 희망 또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이게 올라가게 되면 쪽팔려서 죽을 거 같았다.

아침엔 뭐에 홀린 모양이었다.

대체 왜 이런 분장을 했을까?

“칠성에서 책임지고 매달 열 개 정도 케이스를 보내면 되겠는데.”

“네? 아니, 그건.”

실로 엄청난 영상이니만큼 대가도 엄청났다.

천하의 오성흠이 말을 다 더듬게 되었을 지경이었다.

물론 이현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라면 솔직히 올려라 하고 배 쨀 거야.’

저깟 영상이 뭐라고 남에게 고개를 숙인단 말인가.

하지만 체면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인간들에게는, 어쩌면 저 영상 하나가 사형 선고가 될 수도 있는 법이었다.

실제로 오성흠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럼 올릴까?”

“아니…….”

“우리 오성흠 원장…… 학자 인생에 크나큰 오점이 될 텐데 괜찮겠어? 원장 그거 잘해서 뭐 하는데? 설마 우리 칠성에서 다른 계열사로 영전해 줄 거라 믿는 건 아니지?”

“으…….”

원장직은 기본적으로 2년이 끝이었다.

기깔나게 잘하면 연임을 통해 4년까지 해 먹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하여간 그걸로 끝이었다.

다시 평교수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니 결국, 명예직이란 얘기였다.

내가 칠성 병원 원장이란 말이야, 내지는 전직 원장이란 말이야 하고 떠들 수 있게 해 주는 자리였다.

물론 현직에 있을 때야 인사권에 한해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릴 수도 있고 욕심이 있으면 돈도 좀 챙길 수 있는 자리긴 하지만 하여간 기본적으로 교수는 폼생폼사들이었다.

‘이게 올라가면 어떻게 될까.’

일생일대의 위기에서 오성흠의 비상한 머리는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코스프레어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히히히히.’

‘오, 온다. 온다! 오늘은 맨얼굴이시네요?’

어떻게 돌려 봐도 개판이었다.

지금껏 학자로서 쌓아 온 명성은 한순간에 개판이 될 것이 뻔했다.

‘그럼 환자를 보내면……?’

두 가지 상황 모두를 돌리고 있었다.

‘이러면 박국진은 왜 날렸어요?’

‘이러고도 연임 가능할 거라고 봅니까?’

‘원장님…… 원장님만 보고 온 우리는 뭐가 됩니까…….’

이쪽도 개판은 개판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우스워 보이진 않았다.

물론 자기를 따른 사람들은 다 새가 되겠지만.

이게 나아 보인다고 하면 내가 너무 개새끼일까?

“제가 책임지고 보내겠습니다.”

머리는 아직 고민 중인 듯했으나, 가슴은 솔직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이현종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좋아, 아주.”

“그럼 그 영상은…….”

“응? 이거? 이걸 내가 왜 지워. 일단 원장 임기 마치는 때까지는 들고 있어야지.”

“아…….”

“걱정 마. 약속은 지킬 테니까. 지금 내가 문젠가? 그쪽이 문제지. 당장 가서 보낸다고 하면…… 칠성 충성파들이 보내겠어? 회의 제대로 주재할 자신은 있고?”

“음.”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학교 기반의 병원과 달리 기업 병원은 아무래도 충성심 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사회의 입김이 절대적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칠성 그룹의 회장이 쓰러졌을 때, 전임 원장이 어떻게 했던가.

상황이 정리되는 데까지 하루 이틀 수준이 아니라 몇 달이 걸렸는데도 집에 가질 않았다.

심장 문제라 일반 외과였던 원장은 할 일이 딱히 없었음에도 그랬다.

물론 그 대가로 차도 바꾸고 했다고는 하는데…….

“제가 해야죠. 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 그럼 뺑이 쳐 봐.”

“후.”

“한숨?”

“아뇨, 결의를 다진 겁니다.”

“그래. 그럼 마저 지워. 이게 대체…… 왜…… 아니, 안 물어보기로 했지. 하하하.”

이현종은 오성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낄낄 웃으면서였다.

‘칠성은 어찌해야 하나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정말 아무 기대도 없었는데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셈이었다.

반면 오성흠은 낄낄 웃는 이현종을 보면서 두려움에 떨었다.

‘내가 전략에 말렸구나.’

설마 여기까지 계산했나 싶었다.

칠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듯한 액션을 취하면, 고립되면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칠성에서는 무리해서라도 교수를 잠입시킬 거라는 예상.

그리고 그중에는 원장이 있을 거라는 예상.

그 원장을 이용해 케이스를 받아들이려는 예상까지.

어느 것 하나 이현종이 떠올렸던 것이 없었으나 지금 오성흠이 보는 이현종은 거의 제갈량급이었다.

‘무서운 인간.’

절대로 이 인간에게 대항해서는 안 되겠단 생각까지 들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저희 학회의 최대 후원자이신 알 나지르 왕자님을 소개하겠습니다.”

우창윤의 강의도 충격이었다.

우창윤이 그래도 내분비내과 학회의 거두까지는 아니더라도 샛별을 벗어나 그 위로 향하고 있는 신성은 될진대.

그런 우창윤이 내분비 내과 쪽 케이스로 도움을 받았을 줄이야.

게다가 말하는 투로 미루어 짐작할 때, 이미 마음속으로 감복한 게 틀림없었다.

‘저 인간이…… 저거 승부욕 미치는 인간인데.’

동기들은 다 알았다.

아니, 선후배가 다 알았다.

별 쓰잘데기없는 데서도 승부욕을 발동시키는 인간이라는 것을.

심지어 운동 선수들한테도 자꾸 이겨 먹으려 해서 오히려 골탕 먹었던 적도 많았다.

‘진짜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거나…….’

‘아예 진단부터 치료까지 진짜 다 도움을 받은 모양인데?’

아선 병원의 기조실장이 태화가 주도하는 학회에 연자로 서기까지 과정이 평탄했을 리는 없었다.

여기 와 있는 대부분은 협박을 예상하고 있었다.

실제로 협박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협박에 의한 발표가 이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의사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는데, 그때 흰옷을 차려입은 사람 하나가 연단에 올랐다.

누가 봐도 나 아랍 사람입니다, 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그리고 돈이 많아 보였다.

부티가 나게 생기기도 했는데, 의사들이 그런 걸 알아볼 리는 만무하지 않나.

‘저거…… 손목에 다 금인가?’

말 그대로 휘황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안 그래도 조명이 번쩍이는 연단 위를 휘젓는 모양새로 걸어와서는 마이크를 잡았다.

“통합진료센터에 와 주신 여러분 모두를 환영합니다.”

모인 사람들은 일단 박수를 쳤다.

이제야 누가 돈을 다 댔는지 알게 되지 않았나.

물주는 마땅히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 법이었다.

“이 자리를 빌어, 제 애인…… 이제는 부인이 된 인연을 치료해 주신 이수혁 교수님께 다시금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이어지는 말과 함께 웅성거림이 더 강해졌다.

‘이런 미친……. 어쩐지 두바이에서 공을 들인다 했어.’

‘하긴. 같이 일한다고 이렇게까지 해 줄 리가 있나?’

이수혁의 빽이 더없이 든든하다는 걸 만천하에 공개하는 순간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만 끝나면 두바이 클래스가 아니었다.

아직 놀랄 일은 남아 있었다.

“바쁘신 분들은 어쩔 수 없겠지만…… 소소하게 뒤풀이를 준비했습니다. 장소는 멀리 이동할 필요 없이, 바로 옆에 위치한 파크뷰 뷔페입니다.”

“오오?”

뒤풀이를 호텔 뷔페에서?

원래 명당 10만이 넘는 가격을 자랑하는 곳 아닌가.

여기 모인 전원이 다 갈 수는 없겠지만, 다 간다고 치면 이것만 5천만 원이 넘었다.

“사실 뷔페라는 것이 좀…… 단품에 비해서 별로죠. 그래서 특별히 더 괜찮은 메뉴를 주문해 두었습니다. 시간 되시는 분들은 모두 함께하셔서 즐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데 거기에 더 돈을 냈다는 선언이 있었다.

“어, 여보. 나…… 여기 이현종 교수님이 막 붙잡고 그러네? 저녁은 못 먹겠는데?”

“어어. 내가 2차는 갈게.”

“어…… 어, 아들. 오늘은 그냥 버스 타고 오면 안 될까?”

시간이 없었는데요,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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