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689화 (689/1,303)

689화 뒤풀이 (2)

“와하하하!”

“하하하하하!”

“껄껄껄!”

관대하신 알 나지르 왕자는 음식뿐만 아니라, 와인도 하사하셨다.

그것도 쩨쩨하게 가성비 따위 찾지 않고 그냥 맛 좋은 와인으로.

솔직히 교수들이 언제 이런 음식과 술을 원 없이 먹어 볼 수 있겠나.

나이든 교수들이야 시절도 좋았고, 애초에 금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도 많아서 예외였으나.

이 자리에 있는 교수들은 태반이 젊은 사람들이었다.

수혁과 이현종 그리고 나머지 학회 이사들이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변화에 더 유연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서 그랬다.

“하아…….”

그렇다 보니 다들 신이 나서 모든 테이블이 왁자지껄해지고 있었다.

단 한 사람 오성흠을 제외하고서였다.

“뭘 그렇게 우거지 죽상을 하고 있어. 이제 화장도 다 지웠겠다. 어? 이따 인사도 할 건데.”

“하아…….”

이현종은 그런 오성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요. 오 원장님. 사람들이 3대 메이저니 뭐니 하면서 라이벌 구도 형성해도…… 우리 다 같이 사람 고치는 사람들 아닙니까. 동료죠, 동료.”

신현태도 나서서 깐족거렸다.

그의 평소 인성을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었다.

기인들이 가득한 태화에서 신현태의 역할은 정상인이었으니까.

‘이 새끼들. 우리 수혁이 다리 날려 먹은 새끼들. 똑같이 잘라먹어야 되는데.’

하지만 신현태도 수혁 앞에서는 한낱 신도일 뿐이었다.

신앙 고백이 없었을 뿐, 수혁을 향한 애정은 이미 정상적인 수준을 넘어가 있었다.

“하하. 오 원장님. 이왕 이렇게 된 거 웃으면서 갑시다. 저도 해 보니까, 이거 할 만합디다.”

놀랍게도 우창윤도 합세해 있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제일 열심이었다.

죄다 태화 교수들밖에 없었으니 얼마나 외로웠겠나.

게다가 자신은 아선의 기조실장인데 이러고 있으니, 이 모임에 올 때마다 좌불안석이었더랬다.

하지만 오성흠이 낀다면 어떻게 될까.

기조실장 따위는 짬처리해도 그만이었다.

칠성 병원의 원장에겐 그만한 위세가 있었으니까.

“오 원장님. 평소 원장님 논문 많이 읽었습니다.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다들 입을 놀리고 있자, 수혁도 나섰다.

[살짝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느낌이 드는데, 제 오판일까요?]

바루다가 만류했지만 수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상한 데서 고집이 있었다.

‘뭔 소리야. 나는 좋은 말만 하는데.’

[뭐…… 여기서 뭐라 하지는 못할 테니. 괜찮겠죠.]

오성흠은 모두의 말을 들으면서 부들부들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부들부들 떨었다.

‘이 시발…….’

실로 오랜만에 원색적인 욕설도 내뱉었다.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아까 자신을 검거? 아니, 적발했던 대머리 놈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어서 그랬다.

‘또 찍고 있을 거 같은데.’

이미 대차게 흑역사 하나 만든 참인데 여기서 또?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왜 그렇게 떨어. 추워? 옷 벗어다 줄까? 우리 왕자님이 섭섭하실라.”

오성흠과는 정반대로 이현종은 그저 웃었다.

저 멀리서 다른 병원 교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왕자를 보면서였다.

이렇게만 보면 한 관대한 왕자가 넘쳐나는 돈으로 돈지랄 하는 것으로만 보이겠지만.

김다현 사장에게 전해 들은 바가 있는 이현종으로서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똑똑한 사람이지.’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좀 있는 사람이었다.

왕은 이미 한참 전에 포기해야 했을 정도.

하지만 자신의 영향력까지 포기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떠올린 국가가 대한민국이었다.

자유 진영에 속한 나라이면서,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면서, 동시에 이슬람 국가들의 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국가.

알 나지르는 대한민국과의 관계에 있어 키맨이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온 김에 정치, 경제 수반들과도 만난다고 했는데 사실은 그게 주목적이겠지.’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이현종으로서는 수혁과 함께 세운 이 학회가 제대로 자리 잡을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별 상관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후우…….”

그런 이현종의 속내 따위 알 길이 없는 오성흠은 다시금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저 왕자가 돌아오는 순간, 자신은 눈 앞에 놓인 와인잔을 티스푼으로 팅팅 치면서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이게 수치플 뭐 그런 건가.’

눈앞에 펼쳐진 음식은 그야말로 만찬이었다.

뷔페이면서 동시에 왕자가 따로 주문한 음식들이 테이블에 차려져 있어서 그랬다.

랍스타에 북경오리에 스테이크에 갈비…….

하여간에 화려한 음식들이 호텔 단품 수준의 퀄리티로 주르륵 올라와 있었다.

본래 식탐이 좀 있는 오성흠으로서는 그걸 보는 자신이 아예 식욕이 돌지 않는 지금 상황이 참 한스러웠다.

“아, 왕자님. 인사 다 나누셨어요?”

“하하, 그렇네. 서울 내에 있는 거의 모든 병원 사람들이 다 온 거 같던데…….”

“그렇습니다. 칠성 빼고는 아마 다 인사 나누셨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분과 인사 나누시죠.”

“칠성과는 원래 관계가…… 근데 이분은 누구신가?”

“칠성 병원 원장, 오성흠 선생입니다.”

“오.”

왕자는 안 그래도 기분이 참 좋은 참이었다.

이 자리에 대한 후원은 애초에 수혁을 위한 것으로도 충분했더랬다.

겸사겸사 두바이 국제 의료원의 영향력을 확대하면 두바이 내에서의 영향력도 강화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좀 판을 키워 볼 수 없냐는 요청을 하긴 했는데, 그게 이 정도까지 될 줄이야.

이미 두바이 고위 인사들은 알 나지르 왕자와 친분을 다지기 위해 애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한민국 의료 체계의 위상이 전 세계적으로도 거의 최고 수준에 달했기에 그랬다.

‘아직은 김승규 교수 사단의 간 이식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이대로면 내과도 잡을 수 있어. 그럼…….’

내과는 과 특성상 환자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수술과는 달라서 현지 병원 수준이 너무 딸리는 게 아니라면, 조언만으로도 어느 정도 진단과 치료를 따라갈 수 있다지만.

그 조언이 누구의 입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지 차이였다.

왕자가 볼 때 이현종과 이수혁, 둘 중에서도 특히 이수혁은 괴물이었다.

거기에 더해 한국 내 의료계에서의 영향력도 커지고 있다면 무조건 좋은 일이었다.

“이거야, 원. 칠성 원장님이라고?”

여기까지만 해도 자꾸 웃음이 나왔는데 칠성까지?

왕자는 함박웃음을 지은 채 손을 내밀었다.

‘하.’

당연히 악수하자는 뜻이었다.

오성흠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머리와는 달리 몸은 솔직해서 냅다 손을 내밀었다.

누가 뭐라건 간에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두바이의 왕자이지 않나.

솔직히 말해서 두바이의 정치 구조는 잘 모르지만, 하여간 돈이 억수로 많은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잘 알았다.

오성흠은 돈도 좋고, 돈이 많은 사람도 좋은 인간이었다.

“당연히 와야죠. 이런 의미 있는 학회인데요. 게다가 창설 기념 학술대회 아닙니까.”

방금 전까지 똥 씹는 얼굴 하고 있던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청산유수였다.

“하하, 이거 참 고맙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천근만근처럼 무겁게만 느껴졌던 와인 잔도 경쾌하게 들어 올렸다.

그걸 보고 있는 사람들이 다 당황스러워졌을 지경이었다.

‘와, 이 새끼 이거…… 금 배지 달겠네…….’

‘칠성의 저력이다, 진짜.’

‘아선도 분발해야겠는데?’

아니, 잠시 숙연해졌다.

이건 배워서 되는 게 아니라, 재능의 영역이라서 그랬다.

[사람이 이렇게 한순간에 변하기도 하는군요?]

‘그러게. 어른들의 세계란…….’

모두의 감탄 속에 오성흠은 와인잔을 통통 두드렸다.

왕자가 몸을 일으킨 채,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주목은 어느 정도 쏠렸던 상황이었다.

그때 이현종도 이수혁도 아닌 누군가가 와인잔을 두드리니 집중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몇몇은 오성흠을 분명하게 알아보았다.

“어……?”

“저분이 왜 여기……?”

발표 자체가 칠성을 타깃으로 하고 있지 않았나?

근데 원장이 왔어?

그것도 본 학회가 아니라 뒤풀이에?

이게 말이 되나?

이런저런 수군거림이 파크뷰 식당 전체로 퍼져 나갔다.

‘기호지세다.’

오성흠은 뜨거운 반응을 보면서 심호흡을 내쉬었다.

그러곤 왕자를 돌아보았다.

저 사람이 가진 돈을 생각했다.

그러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쩐지 칠성에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도 개털이 되지는 않겠다는 믿음이 들었달까?

“안녕하십니까. 먼저 우리 통합진료학회의 창설을 칠성 병원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학회도 사실 다 들었는데…… 배울 점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이현종에 의해 자신은 케이스를 보내야 하는 참이었다.

그냥 가서 하자고 하면 애들이 말을 들을까?

절대,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아선이라면 또 모를까, 태화는 안 될 일이었다.

칠성 그룹이 태화 그룹 타도를 외치고 있지 않나.

몇 번이나 전자에서 진검 승부를 했다가 발린 적이 있어서 더더욱 그랬다.

얼마 전에는 모바일 부분에서 전면 철수하면서 체면이 왕창 깎인 마당이라 무슨 말이 나올지는 안 봐도 훤했다.

“의학자의 양심을 걸고, 통합진료센터 운영에…… 현대 의학의 미래가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의학자의 양심이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병원이라는 곳은 좀 묘한 구석이 있는 곳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곳.

그런 곳에서 경제 논리만 떠들 수는 없지 않나.

물론 돈이 참 중요하고, 결국, 돈이 있어야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도 맞지만.

안면몰수하고 그것만 떠들다가는 멀리 볼 것도 없이, 구성원들부터가 외면하기 마련이었다.

제아무리 기업 병원이라 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야…… 이 새끼 봐라?’

이현종은 양심 운운하는 오성흠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양심 없어 보이는 새끼가 이런 소리를 해?

우습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현종의 생각과는 별개로 칠성 병원 원장의 양심선언은 꽤 힘이 있는 법이었다.

“지금 당장 칠성에서도 통합진료센터를 열겠다, 뭐 이런 얘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협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초청해 주시고, 또 이렇게 환대까지 해 주신…… 학회 관계자분들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왕자님, 발언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게다가 오성흠의 발언에는 지극히 오묘한 데가 있어서 진료실에서 머리가 굳어 버린 평범한 의사들이 따라가기는 좀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일단 지금 당장 안 열겠다.

이건 영원히 안 열 수도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지 않나.

그런데 협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겠다는 건 ‘곧 일정 부분 보내 볼게?’ 뭐 이런 이야기였다.

동시에 초청 부분이 참 기가 막혔다.

‘야…… 우리가 언제 불렀어.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꼭 왕자님이 직접 초청한 거 같잖아?’

이현종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오성흠이 잔을 내려놓았고.

곧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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