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0화 생각보다 흔해 (1)
오성흠이 태화가 주도하는 통합진료회의에 가서 끝없이 딸랑거렸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말도 있지 않나.
이게 조선 시대에도 통용되던 말이니, 21세기에는 얼마나 빠르겠나.
벌써 칠성 병원 실세들은 다 알게 되었다.
“노인네가 노망이 났나?”
“이상한 분장하고 까불더니 가서 그 지랄을 해?”
“아니…… 백날 태화 타도하자고 떠들던 사람이 대체 왜?”
“그러니까 노망 얘기가 나오는 거지.”
병원 1층 구석에 위치한, 아는 사람들만 아는 흡연실에 교수들이 모여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오성흠을 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태화 타도라는 말을 했던 건 그냥 태화보다 잘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서 그랬다.
그룹 차원에서 계속 주문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원장이?
“어…… 문자 왔다.”
“누구한테 왔길래 그렇게 긴박하게 어깨를 때려?”
“원장님이야. 회의 열자는데.”
“회의? 어제 그 일 때문인가……?”
“그럼 가야지.”
“아오. 뭔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계속 씹어 대면서 담배를 태우고 있으려니, 단체 문자가 왔다.
개인 번호가 아니라 칠성 내 이메일 시스템에서 발송된 문자였다.
그 말은 곧 원장이 병원에 와 있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누구누구에게 발송된 문자인지도 공개되어 있었다.
회의 명단이 공개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어제 사고 친 줄은 아나 보네.”
“아휴.”
교수들은, 그러니까 담배를 피우고 있던 교수들은 곧 원장실로 직행했다.
명단을 보아하니 딱 자기 심복들에게만 보낸 듯했다.
그래야만 하는 타이밍이긴 했다.
이건 자칫하면 다른 계파에서 물어뜯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렇게 되면 차기 원장을 노리던 기조실장이나 미래의학연구센터장 또는 QI 실장 등의 굵직한 사람들 죄다 새 되는 것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곧 들어오라는 명이 떨어졌다.
‘아이고…….’
고작해야 주말 지나고 마주하는 얼굴인데, 그 며칠 되지도 않는 시간 동안 오성흠은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초췌하기 이를 데 없다, 이 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사고 친 줄은 알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어떻게…… 된 겁니까?”
현 기조실장.
그러니까 차기 원장에 제일 가까운 사나이, 안국태가 물었다.
분장하고 들어간 게 적발된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오리무중이었다.
안국태는 안대훈에 의해 밖으로 내몰렸기에 그랬다.
다시 들어가 보려고 했으나 그때부터는 호텔 직원에게 막혔다.
- 마, 내가 누군 줄 알아! 내가 칠성 병원……!
- 자중하시죠. 누군지 알려지면 그게 더 큰 일 아니겠습니까? 아실 만한 분이…….
참으로 묵직한 협박도 들었다.
돌이켜보면 호텔 신라도 초거대 기업 수중에 있는 그룹이었다.
안국태가 칠성 그룹의 로열이라면야 또 모를 일이었으나.
기껏해야 그룹 변방의 의료원에 속한 사람일진대 감히 개긴다?
안 될 일이었다.
‘나는 당연히 원장님도 그냥 딸려 나온 줄 알았지.’
상황이 그러했으니, 안국태는 오성흠 원장도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쫓겨났을 거라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풀이에 떡하니 나타나서 옹호 발언을 할 줄이야.
잠시 이 사람이 밀정이었나 싶을 지경이었다.
태화에서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칠성에 잠입시킨 밀정.
무슨 북한도 아니고.
“말하자면 복잡한데…….”
오성흠은 안국태, 그리고 나머지 교수들을 보며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
내막이라고 해 봐야 별거 아닌, 정말이지 하찮은 것이라는 뉘앙스를 가득 풍기기 위함이었다.
‘죽어도 말 못 하지.’
사실은 자세히 말하면 죽을 것 같아서였다.
막말로 아까 한참 창가를 서성이기도 했다.
만약 이현종이 약속 안 지키고 영상 올리면 바로 뛰어내리려고 했다.
- 걱정 말어. 어제 말한 대로만 하면, 내가 이거 지운다.
다행히 이현종에게서 온 문자가 그의 생명줄을 잡아 주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는 것뿐.
물론 ‘뿐’이라는 말을 하기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원래 아랫사람 건사하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있지 않나.
심지어 그들의 충성을 통해 원장까지 해먹은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흠흠.”
오성흠은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정리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 혹시 자네들 두바이 아나?”
“네?”
영 엉뚱한 소리로 포문을 열었다.
아마 이들이 듣기엔 그럴 터였다.
갑자기 두바이가 왜 나온단 말인가.
“거기 왕자 중에 알 나지르가 있어.”
“그건 알아요. 통합진료학회 스폰서 아닙니까. 그래서 돈 펑펑 쓰던데.”
“내가…… 개인적으로 그 사람하고 엮이게 됐는데.”
“오……?”
하지만 왕자와 개인적인 친분 운운하자 모두의 이목이 훅 하고 쏠렸다.
하여간 하나같이 속물들이었다.
나름 학회에서 이룩한 업적이 적지도 않은 사람들임에도 그랬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원래 병원 내에서 한자리해 먹고자 하는 이들은 어느 정도 정치적인 면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현종, 김승규처럼 실력으로 다 씹어 먹을 수 있거나 아니면 신현태처럼 얼떨결에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건 극히 희박하다고 보면 되었다.
이건 오성흠 자신을 포함하는 말이었고, 따라서 이들의 속성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직 구체적인 제안이 오간 건 아니야.”
“네네. 원장님.”
어느새 안국태부터가 앉은 자세를 달리했다.
이들이 왜 그룹의 지침을 신경 쓰겠나.
그들이 목줄을 쥐고 있어서 그랬다.
보통 목줄이 아니라, 칠성 병원이라는 거대 병원의 교수라는 직함을 쥐고 있어서 그랬다.
돈이야 밖에 나가서 개원하는 것보단 못해도, 손해 보는 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명예를 제공하는 자리이지 않나.
한데 두바이 왕자와 친분이 있어?
이건 또 다른 얘기라고 봐야 했다.
‘이게 사실 거의 구라라는 걸 알게 되면 날 어떻게 할까.’
오성흠은 양심을 잠시 곱게 접어 마음 한쪽에 밀어 두고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사실도 있기는 하지 않나.
어제 들은 말이 적지 않았다.
“일단 지금부터 하는 말은 다 대외비야. 알겠지?”
“네, 원장님.”
“청라에 태화 의료원이 하나 더 들어간대. 규모는 대략 2,000병상.”
“네? 2,000? 그럼 본원만큼 크잖아요?”
“그렇지. 거기에 두바이 자금이 들어간대.”
“아…….”
“그래서 이름도 태화-두바이 국제 의료원이 될 거 같다는데, 이건 가제니까 넘어가고.”
“네네.”
오성흠의 갈팡질팡하는 마음과는 달리 나머지 교수들은 각 잡고 듣고 있었다.
꿈과 희망이 가득한 소리이지 않나.
욕심이 일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이었다.
“거기 핵심 부서가 바로 통합진료센터가 될 거다, 이 말이지. 그 말은 대량 채용이 있을 예정이라는 얘기가 되고. 문제는 지금 태화에 있는 센터도 펠로우 캐파가 많아야 2명이야. 그걸로 어느 세월에 교수 키워서 거기다 보내겠어? 본원 센터에서도 인력 수급이 필요할 텐데.”
“그렇죠.”
“외부에서 영입할 거란 소문이 파다해. 우창윤 알지? 아선.”
“알죠. 영악한 놈인데.”
“그래, 아주 발이 빠르더라. 왜 거기서 알랑거리나 했더니…… 제자들을 일부 보내기로 했나 봐.”
“오…….”
원장에게는 이 자리에 모인 놈들이 골치였지만.
이 자리에 모인 교수들에게는 밑에 있는 펠로우들이 골치였다.
그냥 부려먹고 버린단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기는 했다.
가령 안국태 같은 쓰레기.
하지만 양심이 터럭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그게 어려웠다.
한데 탈출구가 있을 수도 있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알 나지르 왕자가 두바이-한국 수교의 가교 역할을 하게 될 거래. 대사도 있기는 한데, 대사야 유명무실한 사람이고. 그래서 말인데.”
오성흠은 모두가 홍조를 띠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입 터는 것을 멈추고, 본격적인 제안에 들어갔다.
“우리가 해 줘야 하는 일은 되게 간단해. 월에 한 열 명 정도만 의뢰하면 돼.”
“음…… 그거 근데 그룹에서 가만히 있을까요?”
“들어 보니까, 성적이 좋긴 좋아. 학자의 양심을 걸고 말하지. 도움이 될 거야.”
“으음.”
양심 운운하는 건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특히 안국태가 그랬다.
하지만 위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만약 칠성 병원 원장쯤 되는 사람이 양심선언 했는데 그걸 짬 때린다?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그렇지 않아도 대기업이라고 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굳이 척을 질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열 명은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를 가질 뿐, 실질적인 손해로 다가가진 않을 터였다.
“그 대가로 받는 게 크지 않아?”
사실 대가 따위는 약속된 게 하나도 없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면피용으로 아무 소리나 지껄이고 있으니 당연한 얘기였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추진해 보죠. 문제는 저쪽인데…….”
“그건 나도 최선을 다해 볼게. 어찌 됐건 자네들한테 피해 안 가게 할 테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원장님.”
해서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
오성흠은 교수들이 나가자마자 이현종에게 문자를 보냈다.
잘 되어 가고 있다고.
“오성흠이가 똥줄 심하게 타나 보네. 분장하고 학회 들어온 게 별일이라고. 하하.”
마침 이현종은 어제 너무 과음을 한 나머지 수혁의 집에서 잔 참이었다.
다시 말해 수혁의 옆자리에서 출근 중이라는 뜻이었다.
“으어어.”
“아무튼, 저 새끼 응급실에 눕히자.”
이만하면 양반이라 할 수 있었다.
조태진은 지금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뒤풀이에서 마신 것도 아니었다.
다리가 불편한 수혁이 이현종을 부축하는 건 힘들 테니, 자신이 하겠다고 하고 수혁의 집에 온 후 한 잔만 더 할까 하더니 저리되었다.
정작 대작해 준 수혁은 어느 순간부터 술이 아니라 물만 마셨는데도 저랬다.
“네. 아니…… 나이도 이제 적지 않은데 왜…….”
“너무 신났나 보지. 나도 신나더라. 오성흠이 떠는 꼴 봤어?”
“봤죠. 대훈이가 다 찍었대요. 다시 볼 수도 있어요.”
“후하하. 그놈이 그거, 아주 난놈이야. 역시 우리 교숫감이라고.”
“네, 네에.”
영상 잘 찍는 거랑 통합진료센터 교수하는 거랑 뭔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안대훈이 난놈이라는 의견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나름 의학적인 실력도 많이 늘지 않았나.
거기에 더해 어제와 같은 상황에서의 활약 또한 발군이었다.
부우웅-
수혁은 응급실 구석에 차를 세웠다.
아침이라 그런지 나름 한산했다.
조태진 하나 정도는 누일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수혁과 이현종이 함께 온 마당 아닌가.
안에 있던 레지던트들부터가 우- 하고 달려 나와서 조태진을 눕혔다.
그중에는 신도도 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표정이 좀 어두워 보였다.
“무슨 고민 있어?”
해서 수혁이 물었다.
신도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들어라. 다 내게로 오라.”
그래서 이렇게 답했다.
“수멘.”
“미쳤어?”
“아, 아니. 교수님. 그게 아니라…… 저기 계신 환자분…….”
“오, 환자분. 계속 말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