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1화 생각보다 흔해 (2)
수혁의 명의병이야 유명하지 않던가.
환자, 그중에서도 특히 어려운 환자가 있다고 하면 환장하는 사람이었다.
“수혁아……?”
자신에게서 휙 관심이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 조태진이 수혁을 불렀다.
혼자 달린 것치고는 지나치게 많이 마신 참이어서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있었다.
핑곗거리는 있었다.
일단 이수혁, 이현종 부자와 같이 일을, 그것도 장기 프로젝트를 하게 된 셈 아닌가.
게다가 그 일이 아주 성공적인 첫발을 내디딘 참이었다.
거기에 칠성에도 엿을 한 움큼 먹였고.
“아, 형.”
“어어. 나 아파.”
“네네.”
“아니, 나 아프다니까. 왜 보지도 않고 고개를…….”
반면 수혁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조태진의 통증이 거짓일 거라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우리가 흔히 숙취라 부르는 현상은 결국, 알코올의 대사 부산물인 아세트알데히드에 의해 발생하는 ‘증상’의 집합이지 않나.
머리도 아플 것이고, 속도 불편할 것이고, 무엇보다 탈수로 인한 갈증과 피곤함이 겹쳐서 느껴질 터였다.
‘죽을병은 아니잖아?’
[자업자득입니다, 수혁.]
기전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딱히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심지어 바루다는 아예 차갑게 선을 긋고 있었다.
수혁이 조금 너무한 거 아니냐는 말을 하려는 찰나, 영상도 틀어 주었다.
영상이라고 해 봐야 수혁의 머릿속에서만 돌아가는 회상일 뿐이었지만.
하여간 수혁에게는 영향이 대단했다.
- 크어. 이거…… 이거 설마 발렌타인 40년!
- 어어, 형. 그거 왕자님이 따지 말라고. 아.
- 응? 뭐라고?
- 아니에요. 어차피 저는 혼자 술 절대 안 먹으니까…….
발렌타인 40년.
전 세계에서 100병만 한정 판매하는 프리미엄 위스키 중에서도 하이 엔드에 속하는 위스키.
각 병마다 연도와 넘버링이 되어 있었는데, 어제 조태진이 까 잡수신 건 무려 1번이었다.
애초에 100병 거의 전부가 전 세계에 포진하고 있는 VVIP들만 살 수 있는 물건 아니겠나.
1번은 그중에서도 선호도가 탑을 찍는, 그야말로 값을 따지기 어려운 보물이었다.
알 나지르 왕자라고 해도, 매년 살 수 없는 넘버였으니 당연한 얘기였다.
‘음. 자업자득…… 맞네.’
[그렇다니까요? 저거 팔면 파인 다이닝이 대체 몇 끼입니까.]
‘아, 그쪽으로 빡이 친 거야?’
[그럼 수혁은 어느 쪽으로 빡이 치셨습니까?]
‘빡이 친 것까지는 아닌데. 그래도 아까운 술이니…….’
[술이 술이죠. 돈과 치환할 수 있으면 좋은 술. 아니면 후진 술. 그렇지 않습니까?]
‘음, 뭐…….’
객관적으로만 보면 맞는 말이었다.
술이 술이지.
게다가 의사의 눈으로 보면 술은 결국, 독약의 일종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묵인하게 된 중독성 있는 독약.
“수혁아…… 어디 가…….”
생각은 그렇게 좋게좋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수혁은 바루다와는 달리 사람이지 않나.
아무리 그래도 왕자가 신경 써서 선물한 전 세계에서 하나뿐인 술이 반쯤 비게 되었는데 기분이 막 좋기는 어려웠다.
이현종도 그랬다.
“억. 왜 때려요.”
“새꺄. 너 어제 기억 아예 안 나?”
“네? 안 나요.”
“네가 새꺄, 발렌타인 홀랑 깐 것도 기억 안 나?”
“네? 제가 발렌타인도 먹었어요?”
“이걸 죽여야 되나. 그 술을 꽐라가 돼서 먹다니.”
당시 이현종은 거의 반쯤 죽어 있었다.
아무리 정정한 편을 넘어 건장한 편이라고 해도.
나이가 깡패인 의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노인이었다.
기분에 취하고 또 술에 취한 덕에 정신이 없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 집에 가서도 소파에 내내 누워 있었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수혁의 목소리라도 더 들으려고 애써 정신을 부여잡고 있었다.
하지만 들리는 것은 조태진의 잔뜩 취한 목소리뿐이었다.
“아아, 그만 때려요. 그만. 어, 거기는 수액 잡은 곳인데!”
“오, 미안. 여기 다시 좀 잡아 줘. 이거 빠졌어.”
“피, 피!”
“의사가 이 정도 피 가지고.”
“뒤로 피한 주제에 그런 말 하지 마시라고요! 가뜩이나 지금 탈수됐을 텐데!”
“그러게 왜 이기지도 못할 술을 그렇게 마셨어?”
수혁은 나잇값 못하는 아니, 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 두 교수를 뒤로한 채 신도를 따라나선 참이었다.
신도로서는 참으로 감사한 일이면서 동시에 살짝 불안한 순간이었다.
“저, 교수님. 근데 저 두 분 그냥 저렇게 둬도 되나요? 특히 조 교수님은 많이 아파 보이시는데.”
“응? 술 먹고 꽐라 된 건데 뭐.”
“아……. 그렇게 말씀하지면…….”
“내 계산으로…… 워낙 건강체셔서 30분 안에 1ℓ 풀 드립 하면 훨씬 나아질걸. 당도 섞어서 놔 주는데 뭔 상관이야.”
“아, 네.”
그리고 의외의 대목에서 신앙심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과연 이수혁 교주 아닌가.
술 취한 것도 언제 깰지 계산이 딱 될 줄이야.
이제는 대단하다는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누구, 이 환자분이야?”
“아, 네.”
하여간, 신도 레지던트는 이제 환자 앞에 당도한 참이었다.
다행히 처치실은 아니었고, 일반 섹션에 있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네.’
[혈관이 좀 얇아져 있네요. 항암 치료를 시행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 그렇네.’
바루다의 말을 듣고 보니 피부도 좀 거뭇거뭇했다.
햇볕에 그을린 느낌이 아니라 그저 내부적인 소인으로 인해 발생한 거뭇함이었다.
의사들은 이런 것을 ‘안색이 안 좋다’라고 부르기도 합의했던 바 있었다.
“남자 52세. 앓고 있던 질환 없던 자로 1년 전 시행한 건강 검진에서 빈혈, 혈소판 감소증 확인되어 근처 내과에서 정밀 검사 시행했습니다. 다시 혈구 감소증이 확인되어 만성 간 질환, 특발성 혈소판 감소성 자반병(자색반병) 등을 의심하여 검사하였으나 음성 소견 보여 본원 의뢰되었습니다. 골수 검사에서 골수이형성증후군 소견 보였습니다.”
“아……. 그럼 치료는 아자시티딘(Azacitidine, 골수이형성증후군 치료제)으로 했나?”
“네. 적혈구, 혈소판 수혈과 더불어…… 아자시티딘 치료를 6차 시행하였습니다. 완료 당시 소견상 호전된 양상을 보였으나, 추적 관찰에서 다시 악화되었음이 보여 11차까지 재시행하였습니다.”
“그럼 오늘은?”
“갑자기 몸이 피곤하고 멍이 잘 드는 것 같다고 외래에 전화하셔서, 응급실로 오시라고 전달드렸습니다.”
“아하.”
몸이 피곤하고, 멍이 잘 든다.
병력을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는 떠올려야 할 질환이 굉장히 많을 터였다.
멍이 잘 드는 것은 꽤 특이적인 증상이지만, 그럼에도 그랬다.
하지만 이 환자는 골수이형성증후군을 앓고 있던 상황.
‘악화를 먼저 떠올려 봐야겠지?’
[당연한 수순입니다만…….]
‘그랬으면 나를 불러오진 않았겠지.’
신도라서가 아니라 그냥 내과 레지던트라 얼굴과 이름 그리고 연차를 기억하고 있었다.
안대훈과 같은 연차인 3년 차.
그러니까 치프 그레이드였다.
내과가 3년제가 되면서 치프라는 이름값이 많이 가벼워진 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3년 차는 3년 차였다.
얼토당토않은 거로 노티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나한테 교주라고 했어. 안대훈하고 같이 공부하고 있다면…….’
[매번 같이하지는 못했을 텐데, 그래도 괜찮은 실력자라고 판단하는 게 맞을 겁니다.]
‘그렇지.’
해서 수혁은 다시 레지던트를 바라보았다.
이심전심이라고 레지던트는 왜 교주가 자신을 이렇게 지긋이 바라보는지 즉시 알아차렸다.
“네, 교수님. 혈액 검사상 백혈구 1,600, 헤모글로빈 3.5, 혈소판 12,000 나왔습니다.”
“분명히 완전히 호전됐었나?”
“네.”
“그런데 이렇게 됐다…….”
골수이형성증후군도 치료가 쉬운 병은 아니긴 했다.
앞서 이 환자에게 시행했던 치료는, 그저 대증적인 치료라고 보면 되었다.
조혈 모세포 이식이 가능해질 때까지 버티기 위한 치료.
하지만 대증적인 치료가 의미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적어도 골수이형성증후군일 때는 효과적이었다.
‘악화가 아니군.’
[네, 안타깝게도…….]
수혁은 쯧 소리를 내고는, 조태진에게로 돌아갔다.
“오, 수혁아.”
방금까지만 해도 누워서 앓는 소리를 하고 있더니만 이제는 제법 몸을 일으켜 앉아 있었다.
표정도 밝았다.
워낙에 체격이 좋은 사람이라 그런지, 아니면 타고나기를 건강하게 태어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무척 금방 숙취를 극복한 참이었다.
“형, 일어날 수 있어요?”
“수혁이가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나야지. 뛸 수도 있다.”
살짝 아직 취했나, 싶기도 했다.
말투가 어딘지 모르게 전체주의자 또는 파쇼에 심취한 사람 같아서 그랬다.
돌연 한쪽 팔을 펄쩍 펴면서 하일 이수혁이라고 해도 딱히 놀라지 않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수혁은 몸을 일으킨 조태진을 대동한 채 다시 환자에게로 돌아갔다.
“어, 환자분.”
“어, 교수님.”
혈액질환은 지리한 질환이라고 보면 되었다.
치료가 더디기도 하고 또 고생스럽기도 하고.
의사 혼자서 열심을 내도 효과가 별로였고, 환자 혼자 열심히 알아봐도 효과는 없었다.
의사와 환자가 같이 이인삼각처럼 겅중겅중 뛰어가야만 한다는 얘기였다.
그러한 면에서 조태진은 꽤 좋은 의사였다.
자신은 늘 진심이었고, 동시에 환자의 열심을 이끌어 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거…….”
조태진은 환자가 골수이형성증후군으로 치료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마지막 수치 확인에서 호전되었었다는 사실도 기억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환자는 호전과는 거리가 좀 있어 보였다.
무엇보다 그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멍이었다.
혈소판 수치가 정상이라면 저럴 리가 없었다.
“수치…… 어떻지?”
방금 전까지 이현종한테 뒤통수 얻어맞아 가면서 시시덕대던 사람은 이제 없었다.
그저 혈액종양내과 교수 조태진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는 더없이 심각한 얼굴로 레지던트를 향해 물었다.
“혈액 검사상 백혈구 1,600, 헤모글로빈 3.5, 혈소판 12,000 나왔습니다.”
레지던트는 아까 읊었던 수치를 다시 읊었다.
차이가 있다면 수혁의 덧붙임이 있었다는 점 정도였다.
대놓고 크게 말하는 일은 없었다.
나쁜 소식일수록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의 이행이…… 강력하게 의심돼요.”
“하아.”
조태진의 생각도 일치했다.
원래 혈액 질환들이 이렇긴 했다.
좋아지고 있다는 믿음은 늘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하고 살아야 하는 게 혈액질환을 보는 교수의 삶이었다.
처음 겪는 일은 당연히 아니었다.
수도 없이 겪었다.
“저, 환자분.”
하지만.
이 환자에게는 처음 있는 일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명은 오직 하나뿐이기에, 조태진에게 주어지는 기회도 하나뿐이었다.
아무리 경험이 쌓여도 이건 변하지 않는 명제였다.
그렇기에 말을 잇는 조태진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일단 무균실로…… 모시겠습니다. 골수 검사를 다시 해 봐야 할 거 같습니다.”
“네?”
“우선…… 우선 검사하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만 서둘러야 합니다. 최대한 빨리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