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698화 (698/1,303)

698화 응급실 취미 생활 (3)

인턴은 남몰래 배를 쓸어 내렸다.

아까 수혁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상황이지 않나.

‘복부 고치 증후군……?’

세상에.

이런 병도 있단 말인가.

정말이지 의학의 세계는 넓고도 오묘하단 생각만 들었다.

옆에서 보고 있을 땐 흥미진진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본인이 직접 노티를 해야 한다고 생각이 들자마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래서 신앙을 가지나…….’

수혁은 바로 그때 구원의 손길을 뻗은 참이었다.

물론 어린양을 하나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라거나, 그것도 아니면 단지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전혀 아니었다.

‘이건 수술방 가서 보자.’

[좋죠.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니까요.]

그저 문헌만으로 접했던 병이 실제로는 어떻게 생겼는지, 그게 궁금할 따름이었다.

“네, 외과 1년 차 정승재입니다.”

해서 수혁은 인턴에게 물어 응급실 당직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연하게도 기운 빠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다 그런 법이었다.

응급실 번호로 콜이 오는데 신난 목소리다?

그럼 오히려 큰일이라고 생각해야만 했다.

이미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엑스트라로 일이 더해지는 상황이었으니까.

혹자는 응급실 당직이면 딱 그것만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아쉽게도 그럴 수 있는 과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 통합진료센터 부센터장 이수혁입니다.”

“어, 엇.”

허튼소리 하면 조져 놔야겠다 마음먹고 있던 외과 당직의는 모처럼 당황했다.

수술과 수술 사이에 겨우 받은 전화다 보니 짜증 수치가 맥스를 찍고 있었는데, 인턴 나부랭이가 아니라 부센터장이라고?

‘시바……. 나 뭐 잘못한 거 있나.’

당연히 사고 회로는 이쪽으로만 돌았다.

다행한 것은 수혁도 만만치 않게 성질 급한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아니, 원래는 느긋하지만 취미 생활 중이다 보니 서두르고 있었다.

‘빨리 처리하고…… 한 곳만 더 가고 싶다.’

[콜.]

바루다도 당연히 미친 지 오래다 보니 합세해서 마구 날뛰었다.

“다름이 아니라 응급실 환자 때문에요.”

“어, 어어엇. 네. 교수님.”

“여자 22세 환자로…… 복통을 주소로 내원했어요. 대략 5개월 전부터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잘 안 되는 증상, 그리고 체중 감소가 있었고요.”

“아, 네.”

체중 감소.

의사들이 제일 신경 쓰는 말 중 하나였다.

단순히 피곤하다는 진술도 중요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살이 빠지고 있다는 건 무언가 안 좋은 일이 몸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뜻했기에 그랬다.

외과 1년 차면 아직 햇병아리라고 보는 게 맞겠지만.

그래도 이제 곧 가을이었다.

수혁은 상대의 목소리에 긴장이 깃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초음파 및 CT를 확인했고…… 일레움(Ileum, 회장) 주변으로 소장을 둘러싸는 형태로 자라난 종양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주변 장막과 살짝 융합도 이루고 있고요. 이로 인한 장폐색입니다.”

“네네.”

외과 1년 차는 여전히 긴장하고 있었다.

비록 수혁이 하는 말 중에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이제 문장에서 단편적인 단어 몇 개로 대폭 줄어든 참이긴 했지만.

‘초음파, CT…… 일단 검사 다 했고. 일레움, 종양, 장폐색…….’

중요한 단어는 모두 조합할 수 있었다.

여기서 뭘 떠올릴 수 있을까.

“암인가요?”

암뿐이었다.

수혁은 하마터면 터져 나올 뻔한 실소를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긴 했지만, 상대가 일단 1년 차이지 않나.

1년 차에게는 과를 막론하고 자유가 있는 법이었다.

몰라도 됐다.

사고 치기 전에 상급자에게 물어보기만 하면 되었다.

“아, 아뇨. 제가 의심하고 있는 건 복부 고치 증후군입니다.”

“네……?”

“원발성 경화 캡슐화 복막염이라고도 합니다. 영어로 하면 Primary Sclerosing Encapsulating Peritonitis, PSEP죠.”

“어…….”

이대로 있다간 사고 칠 거 같았다.

살짝 어지러운 게 단순히 어제 잠을 잘 못 자서는 아닐 터였다.

잠이야 매일 못 자고 있었으니까.

“제가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수술방 잡아야죠. 아……. 오늘 당직 교수님께 연락드리면 됩니다.”

“아, 그. 진단명 한 번만…… 제가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감이 잘…….”

“음.”

해서 1년 차는 수혁에게 해결 방안을 물었다.

살짝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수술실을 열어야 하는데 왜 자신에게 묻는단 말인가.

아마 수혁이 아니라 다른 교수였다면 여기서 역정 한 번쯤 냈을 터였다.

하지만 수혁이 짜증 나는 포인트는 1년 차가 아니라, 그냥 천금 같은 시간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럼 교수님 번호를 줘요. 제가 전화 드리게.”

“아, 그. 네.”

해서 교수 번호를 받아다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

옛날 같았으면, 그러니까 수혁이 아직 레지던트 시절이었다면 통화는 분명 어려운 방향으로만 끌려갔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복부 고치 증후군……?’

심지어 상대가 나름 수혁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외과 교수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연배야 더 위였지만 직급에서 한참 밀리는 상황이지 않나.

게다가 상대는 교수임에도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게 뭔데, 이 내과 놈아…….’

그렇다고 여기서 ‘저는 모르는데요?’라고 하면 외과 가오가 죽기 마련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수술 잡죠.”

“언제쯤 될까요? 환자 증상이 꽤 심해서요. 이대로 더 눌리면 저 부위 괴사가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정규 수술 하나가 취소돼서. 중간에 하나 낑겨 넣을 수는 있을 거 같습니다. 1시쯤?”

“아, 잘됐군요. 감사합니다.”

“아뇨. 근데…… 아니, 아닙니다.”

외과 교수는 수혁에게 이거 아니면 어쩔 거냐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반감과는 별개로 수혁의 실력은 이제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서 그랬다.

게다가 괜히 개기다가 또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도 두려웠다.

‘이 미친놈들은 학회에 박제해 버리잖아.’

얼마 전 있었다는 통합진료학회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

아랍 왕자가 통 큰 후원을 했다든지 칠성의 원장도 왔다든지, 뷔페를 쏜다든지 하는 가십거리들이 대다수이긴 했으나.

일부는 학회 세션에서 있었던 얘기들을 전해 주었다.

- 이현종, 이수혁이 공개 처형하던데.

정식으로 의뢰 넣은 건에 대해서는 어떤 과, 어떤 병원에서 보낸 것인지 따로 언급을 안 했다던데.

교수가 고집부리는 바람에 레지던트 선에서 알음알음 들어간 의뢰에 대해서는 얄짤없었다고 들었다.

아는 진단명이었다면 얘기가 또 달랐을 텐데.

이건 처음 듣는 진단명이었다 보니, 외과는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 순순히 수락해야만 했다.

‘좋아. 또 해결. 1시까지는 시간 좀 있으니까…….’

[서두르면 하나 더 볼 수 있겠군요. 아주 좋습니다.]

외과 교수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수혁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그리 방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이미 위에서 다 수혁을 봐주고 있고, 그 기대 이상의 부응을 하고 있는 마당 아닌가.

게다가 수혁은 천성이 긍정적인 데다가 이제는 명의병까지 세게 얻어서 주변을 잘 돌아보지도 않았다.

“교수님.”

그런 수혁의 눈빛을 읽어 낸 안대훈이 다시 돌려돌려 돌림판을 내려 두었다.

CT실 바로 앞에였다.

“음, 잠깐.”

마음 같아서는 지금 바로 돌리고 싶었지만.

수혁은 그래도 할 일을 완전히 잊지는 않은 참이었다.

그는 CT를 찍고 나오고 있는 환자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환자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 아뇨. 근데 저…… 정확히 뭔가요?”

“복부 고치 증후군이라고 하는데…… 그냥 장의 막 부분이 자라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게 소장을 틀어막아서 소화가 안 되는 거고요. 수술로 풀어 주면 금방 나을 겁니다. 암 같은 것은 절대 아니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대신 보호자께는 연락드리죠. 수술도 수술인데, 입원도 좀 하셔야 될 겁니다.”

“네, 교수님.”

수혁은 그렇게 환자에게 설명을 해 준 후, 응급실 복도에 주저앉았다.

‘뭐야, 저거?’

‘경품인가…….’

어느 병원이나 그렇겠지만.

태화 의료원의 응급실은 특히 오가는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의사 가운 입은 사람 둘이 돌림판을 돌리고 있으니 당연히 이목이 집중되었다.

심지어 누군가는 사진도 찍었다.

물론 그 누구도 이 돌림판의 진실을 가늠하지는 못했다.

내내 옆에 있던 인턴이나 간호사도 마찬가지였다.

‘뭐지…….’

‘뭐야…….’

그저 수혁이 돌리는 바늘 끝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디냐…… 어디야.”

수혁이 돌아가는 바늘을 보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어서 그런지 괜히 긴장도 되었다.

대체 어디에 멈춰야 좋은 건지도 모르겠는데도 그랬다.

그렇게 아직 바늘이 멈추지 않은 상황에서, 응급실 한쪽 구석에서 소란이 일었다.

“아니, 나 진짜 너무 아프다고요!”

“응?”

수혁도 대훈도 일단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젊은, 그러나 얼굴이 초췌해 보이는 남자 하나가 침대에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어색한 자세로 소리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병색이 완연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제 막 구급차 타고 온 건지 옆에는 다른 병원 의사로 보이는 사람 한 명과 응급실 의료진들이 같이 있었다.

마침 바늘 끝을 보니 다시 응급실인 상황이었다.

‘이러면 또 못 참지.’

[네. 별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요.]

‘하여간 가 볼까.’

수혁은 대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대훈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돌림판을 등에 짊어졌다.

그러곤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사이에도 당연히 설명은 이어지고 있었다.

중간중간 환자가 외치는 고함 때문에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환자분 남자 42세고…… 에이즈 감염자입니다.”

“어어, 당신 그거 개인 정보야!”

“아…… 네.”

“5일 전 항문 주위 통증을 주소로 본원 내원했고…….”

“병원이 어디라고 하셨죠?”

“바스티야 병원입니다.”

“아.”

응급실 펠로우는 바스티야라는 이름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에이즈 환자를 보려 하는 병원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치명적인 감염병이었기 때문이었다.

의료진이 감수해야 하는 위험 외에도, 다회 사용할 수 있는 소모품도 한 번만 사용해야 한다거나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바스티야 병원은 원장이 사명감으로 운영하는, 조금 특별한 병원이었다.

“아무튼, 확인해 보니 항문 주변으로 농양이 들어차 있었습니다.”

“아.”

펠로우는 환자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제야 왜 이런 어정쩡한 자세로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항문 주위 고름집은 통증이 아주 심하기 때문이었다.

“저희가 절개 배농했는데…… 잠깐 차도가 있다가 또 심해져서요. 항생제도 쓰고 있는데 효과가 없기도 하고…… 환자분도 상급 병원 전원을 너무 강력하게 원해서.”

“알겠습니다. 저희가 보죠.”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