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9화 기저질환이 있으면 (1)
수혁은 걸음을 옮기면서, 방금 건너건너 들은 정보를 떠올렸다.
‘에이즈 환자에 항문 근처 농양이라…….’
[이미 면역력이 떨어져 있다면. 항문 근처 농양도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그나마 거기는 혈액순환이 활발한 곳이긴 한데…….’
이런 생각을 하면 좀 더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텐데.
항문의 구조는 어찌 보면 입술하고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만큼 혈액순환이 좋다, 뭐 이런 뜻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항문은 대장균과 함께 변을 내보내는 기관이니까.
그저 근육으로만 이루어져 있으면 손상을 입기에 십상이었다.
‘그만큼 패혈증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
[게다가 압력이 계속 가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과거 조선 시대에는 왕조차 항문 종기로 사망하곤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의 종기는 쉽게 낫질 않았으니까.
드르륵.
게다가 면역 저하자라면 어떨까?
더더욱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는 게 옳을 터였다.
과연 태화 의료원의 응급실 펠로우는 경험이 적지 않아서, 환자를 일단 처치실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곤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아, 외과 당직 샘이에요?”
방금 수혁과 통화했던 외과 당직의에게 전화를 걸기 위함이었다.
“아, 네. 그 환자 좀 기다려야 될 거 같은데요?”
“응? 이 환자는 방금 왔는데…….”
“아. 또 있어요?”
“누가 노티했었나 보네. 나 응급실 펠로우예요.”
“아……. 네네. 말씀하세요.”
수혁이 던진 환자만 해도 쉬운 환자는 아닌지라 한숨이 푹푹 나오던 와중이었는데.
여기서 또?
게다가 펠로우가?
분명 방금 왔다고 했는데…….
‘뭐냐, 이번에는…….’
당연한 말이지만 태화 의료원의 응급실은 체계가 꽤 잘 잡혀 있는 곳이었다.
트리아지, 즉 환자 분류를 통해 경증 환자는 인턴들이 보고 그렇지 않으면 레지던트나 펠로우가 초진을 봤다.
당연한 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놀랍게도 아직도 많은 병원이 거의 모든 초진을 인턴에게 맡기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태화의 시스템은 분명 대단한 것이었다.
‘만만할 리가 없겠는데…….’
그 와중에 펠로우가 봤으니 외과 당직의는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환자에 대한 각오가 첫 번째였고.
둘째로는 윗사람들의 갈굼에 대한 각오였다.
너는 왜 이렇게 내공이 안 좋아서 당직만 서면 응급 환자들이 오냐는 핀잔이 눈에 선했다.
“남자 42세, 에이즈 감염자입니다.”
“아.”
일단 에이즈라는 말을 듣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머리로는 알았다.
이 또한 수많은 감염병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또 임상으로 에이즈를 겪다 보면 느낌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 질환의 경과는 여전히 두렵고 무서운 것이었다.
아직까지 인류는 에이즈를 완전히 컨트롤하지 못했다.
“항문 주변 농양으로 바스티야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고…… 거기서 절개 배농도 한차례 했다고 합니다. 근데…….”
펠로우는 환자의 바지를 벗기고 관찰하고 있었다.
장갑과 고글을 착용한 채였다.
‘어우.’
정말 어우 소리가 절로 나오는 상태였다.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을 테니.
환자의 항문 주변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그 와중에 부풀어 오른, 그러니까 아마도 농양이 가득 차 있을 부위는 끔찍하기까지 했다.
“또다시 잡혀 있네요. 절개 배농부터 해야 할 거 같아요. 환자 39도입니다. 혈액 검사는 이제 나가서 아직 결과는 안 나왔는데…… 이전 병원에서 시행한 결과에서 CRP(C-Reactive Protein, 감염 시 상승하는 C 반응성 단백)가 11입니다.”
“11이요?”
“네.”
“아……. 내려갈게요.”
“네, 선생님. 처치실에 있습니다.”
“네.”
CRP란 급성 염증을 나타내는 지표로, 현재 대학 병원에서 감염병을 볼 때 가장 널리 쓰이는 지표이기도 했다.
정상이 0.3 미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11이라는 수치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 대략 가늠할 수 있을 터였다.
당연히 레지던트는 시발시발 하면서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위 연차에게 노티를 했더니 욕이 사발로 튀어나왔다.
“야, 이 새끼야. 그럼 가서 쳐 보고 노티를 해야지. 지금 말해?”
의미 있는 욕은 아니었다.
내려가서 노티했지? 그래도 욕을 했을 게 뻔했다.
그런 게 있으면 바로 노티해서 수술 준비를 하던 하게 했어야지, 왜 내려갔냐고. 네가 보면 아냐고.
‘화풀이…….’
그냥 환자 생긴 게 싫어서 그랬다.
1년 차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흠…….’
외과 1년 차가 수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 수혁은 어느새 대훈과 나란히 처치실 안에 몸을 들여놓고 있었다.
우선 들어오자마자 한 일은 간단했다.
환자를 관찰하는 것.
‘혈압 150/100mmHg, 맥박 92회/분, 호흡수 24회/분, 체온 38.8도. 완전히 급성 감염 징후네.’
[그나마 환자가 젊어서 패혈증까지 오지는 않았습니다.]
‘응. 에이즈 외에…… 다른 기저질환은 없었던 거 같아.’
[그렇지만 에이즈입니다. 그것도 진행한. 면역 저하가 있다면…….]
‘사실 이것보다 심각한 기저질환도 없지.’
면역력.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몸을 지켜 내는 힘.
이것이 사라진 인체는 너무나도 나약하기 마련이었다.
정말 별의별 병에 다 걸릴 수 있었다.
‘항문 농양을 본 적이 많지는 않은 거 같은데…….’
[네, 그렇습니다. 대개 케이스 리포트나 논문 또는 교과서에서 발췌한 자료입니다.]
수혁은 대훈이 건네준 장갑과 고글 등을 착용하면서 환자의 항문 근처 농양을 바라보았다.
절개 배농을 한번 하고 왔다더니.
흔적이 보였다.
‘짼 곳은 괜찮네.’
[네. 항생제도 쓰고 있으니까요.]
‘이번에 발생한 곳은…….’
저번에 생긴 농양은 그야말로 항문 근처에 발생했었던 듯싶었다.
그러나 이번 농양은 달랐다.
직장 안쪽에서부터 뻗어 나온 모양새였다.
실제로 방금 직장 수지 검사를 마친 펠로우의 손가락에 고름이 잔뜩 묻어 나왔다.
“아우.”
고약한 냄새가 처치실을 가득 메웠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시발…….”
환자의 입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저히 자기 몸에서 나온 냄새라고는 믿기 싫을 냄새가 풍겨 와서 그랬다.
고통과 수치 등이 한데 뒤섞여 뭐라 정의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통 농양이 저렇게까지 잡히는 경우가 있나?’
[면역 저하자에게는 발생할 수 있습니다. 작은 상처도 치명적인 경과를 밟게 될 테니까요.]
‘하긴, 또 그렇겠네. 으음.’
[으음.]
그런 환자를 보면서 수혁과 바루다 또한 묘한 기분이 되었다.
확실히 어려운 케이스이기는 했다.
일단 기저에 깔린 질환이 어렵지 않나.
하지만 진단 자체가 어렵다고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에이즈 감염으로 인한 후천성 면역 저하가 발생했고, 그로 인한 농양이 다였으니까.
‘아니, 아니야.’
[네?]
‘방금 뜬 검사 결과를 봐 봐.’
[별로 특이점은 없습니다만.]
‘혈색소 13.9g/dL, 혈소판 187,000/mm3, 백혈구 10,500/mm…… 거기에 CRP가 25가 떴어.’
전 병원에서는 11이라고 했는데.
그게 오늘 아침에 뜬 검사라고 했는데 지금 나간 검사로는 25가 떴다.
세상에, 25라니.
미친 수준이었다.
그러나 감염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하면 또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그게 뭐요.]
바루다는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수혁은 아니었다.
‘뭐냐니. 새꺄. 너무 지극히 정상적인 수치 변화잖아.’
[아. 면역 저하 상태인데…… 음. 그렇군요.]
‘근데 농양이 잡힌 부위를 생각해 봐. 저기는 또 이상하잖아.’
[확실히 그렇습니다. 비정형 감염이죠. 근데 반응 자체는 정상적이고. 흐음.]
‘그렇다고 다른 원인을 떠올리는 건 좀 오바지?’
[네. 원래 진행한 에이즈에서도 저런 혈액 수치는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는 있으니까요.]
바루다도 수혁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조했다.
하지만 확실한 무언가가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일단 있었다.
“환자분…… 아, 여기 계시네.”
그사이 외과 당직의가 내려와 환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다지 의미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1년 차가 살피는 게 뭔 의미가 있겠나.
수술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외에 다른 치료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와 X됐다 라는 느낌만을 받게 되었을 뿐이었다.
“네, 선생님. 그…… 지금 봤습니다.”
“어때.”
1년 차는 그 느낌을 최대한 위 연차에게 전달하려 애를 썼다.
“에이즈 감염자이시고요……. 농양이…… 이게, 한번 절개 배농했는데…… 깊숙이 있어요.”
“뭔 개소리야. 뭐가 깊어. 구멍 났어?”
“아, 아뇨. 그건 아니고요.”
농양이 심해지면 살이 뚫려서 안쪽 장과 연결이 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런 게 아니었다.
기존의 염증은 해결이 되었다.
다른 염증이 안쪽에서 발생했을 뿐.
“직장 수지 검사를 해 보면 안쪽에…… 안쪽에 농양이 있습니다. 통증도 그쪽으로 호소하고요.”
“거기에 상처가 났구나. 하……. 골 때리네.”
“네.”
“일단 수술해야 되는 건 맞는데…… CT 찍어 보자. 그거 찍고 노티 해. 그럼 교수님께 수술방에서 내가 말씀드릴게. 정규 취소돼서 망정이지. X될 뻔했네.”
다행히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에이즈에 안쪽에 농양이 있다고 하는데 설렁설렁 생각하는 놈이 있다면 그놈은 의사도 아니긴 했다.
그리고 현재 태화 의료원 외과에 들어가는 이들은 이유가 뭐가 되었건 일정 부분 사명감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1년 차는 안도한 얼굴이 된 채 전화를 끊으려 했다.
수혁이 봐도 저건 아닌데 싶은 순간, 당연하게도 상대가 질문을 던졌다.
“네, 선생님.”
“아, 랩은 어때.”
“랩은…… 일단 백혈구가 만 넘고…….”
“아니, 새꺄. 수술하는 데 혈소판이 중요하지. 중요한 거부터 얘기해.”
“혈소판…… 아, 정상입니다.”
“체스트는? 마취 걸 수 있어?”
“어…….”
질문이 이어질수록 버벅거리는 시간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아, 이 새끼.”
위 연차도 답답했지만.
“줘 봐요.”
“네?”
수혁도 답답했다.
어서 빨리 CT 찍고 안쪽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고 싶어서 그랬다.
“저 통합진료센터 이수혁입니다.”
“네?”
위 연차는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아니면 이 환자가 혹시 교수 지인인가.
서둘러 달라는 건가.
뭐 이런 오만 가지 생각을 하며 물었다.
그냥 다 아니고, 수혁이 조급증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는 결론은 꿈에도 다다르지 못했다.
“내가 보니까 수술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노티해요. 마취과에서 뭐라고 하면 제 이름 팔아도 됩니다.”
“아…… 네!”
지인이구나 싶었다.
이름까지 팔라고 하면서 푸시하다니!
해서 위 연차는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응급실에…… 있는 환자 이수혁 교수님, 지인입니다. 직접 내려가서 보고 있는 모양인데요.”
“어? 수술하기로 한 환자 있어.”
“아…… 에이즈 환자요?”
“잉. 그 환자가 에이즈래? 화씨.”
“벌써 연락 주셨군요?”
“어. 아까.”
“아…….”
뭔가 대화가 꼬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