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1화 기저질환이 있으면 (3)
환자는 곧 수술실에서 나와 회복실로 향했다.
어차피 다음 환자가 내려오려면 한참 남은 상황.
그렇다고 구경 나온 수혁에게 뭐 할 일이 있을 리는 없지 않겠나.
해서 회복실의 환자에게로 향했다.
[굳이?]
‘내일부터는 다시 바쁜데…… 그땐 얼굴 보지도 못할걸. 내가 개입한 환자가 좋아지는 건 봐야지.’
[뭐…… 그건 인정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 또는 삶의 질에 관여한 후였다.
그 사람이 소중하게 여기는 기계나 물건도 아니라, 그냥 그 사람 그 자체에 개입했다는 얘기였다.
비단 의사들뿐만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라면 일말의 책임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게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하면 또 한없이 괴로울 만한 일이었으나 지금은 정반대되는 상황이었다.
진단은 정확했고 수술 계획도 정확했으며, 외과 의사의 수술 또한 정확했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으…….”
다만 환자의 몰골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원래 수술실에서 바로 나온 직후에는 이랬다.
‘음…….’
[돌이켜 보니, 이번이 처음이군요?]
‘그러게. 거참.’
외과 계열 의사들에게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마취약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온 상황이라고 해도, 마취에서 딱 깨자마자 정신이 멀쩡해지는 약은 아직 존재치 않았다.
괜히 회복실 매뉴얼에 난동 부리는 환자를 다치지 않게 제압하는 법이 상세히 적혀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수혁에게는 모두 낯선 광경이었다.
그에겐 처음이었으니까.
세상에.
이 작은 병원에 여전히 처음 겪는 일이 있을 줄이야.
수혁은 남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즐거움을 머금은 채 재차 입을 열었다.
“환자분. 이수혁 교수입니다. 아까 응급실에서 뵀었죠.”
“으……. 아. 그…… 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술 시간이 아주 길지만은 않았다는 얘기였다.
진단명은 거창한 것을 넘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처음 보는 질환이었으나, 치료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태화 의료원의 외과 계열 의사들의 실력이 괜찮은 것도 한몫했다.
그 덕에 환자는 잔뜩 찌푸린 얼굴일지라도 어떻게 어떻게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환자분 진단명은 복부 고치 증후군이 맞았습니다.”
“네…….”
“너무 늦지 않게 수술에 들어간 덕에 소장 절제는 최소한으로 막을 수 있었습니다. 수술은 잘되었고요. 길어도 5일이면 퇴원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
“안심하시고. 이제 다시 주무세요.”
“네, 감사합니다…….”
수혁의 말에 환자는 눈을 감았다.
고통 때문인지,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고여 있던 눈물이 동시에 주르륵 환자의 머리 뒤로 흘러내렸다.
‘좋아. 이제 다시 갈까?’
[네. 다음 환자는…… 진단이 중요합니다. 만약 비호지킨이 맞는데 단순 절개 배농만 하게 된다면…….]
‘환자를 잃게 될 가능성이 아주 크겠지.’
수혁은 응급실에서 봤던 남자 환자를 떠올렸다.
이제 고작해야 42살이었다.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일단 고름이 그렇게 항문에서 줄줄 흘러나오는데 안색이 좋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않겠나.
하지만 체격 자체는 망가져 있지 않았다.
이번에 잘 넘기면, 에이즈 자체가 약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 건강한 사람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여생을 늘릴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이게 맞느냐인데.’
[확인해 볼 필요성은 있습니다. 반드시 조직 검사는 해 봐야 해요.]
‘그래. 내가 그래서 들어가는 거지.’
[네. 아마 외과 쪽은 생각도 안 하고 있을 겁니다.]
바루다도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생각도 못 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터였다.
적어도 수혁은 그렇게 판단했다.
외과에서 잡아내기엔 영상 속 소견이 너무 애매해서 그랬다.
‘영상의학과에서 봤다고 해도…… 임상적 추론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의심 못 할걸.’
[맞는 말입니다. 생각보다 영상 판독이…… 아직은 영상만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죠.]
어떤 소견은 영상만으로도 진단이 가능하긴 했다.
하지만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 위해 임상 정보가 필요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누가 판독을 하고 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복부 영상 파트의 김진실은 물론이거니와 이하언 정도 되는 교수라 해도 그랬다.
‘내 말을 믿어 주려나.’
[병원 내에서 수혁의 위치를 생각하십시오.]
수혁은 위치란 말에 옆에 선 대훈을 돌아보았다.
오늘 종일 같이 다닌 데다가 아까는 가르침까지 줘서 그런가, 눈알이 묘하게 반짝였다.
빤딱빤딱하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레지던트들 중에서는 신봉하는 애들이 있긴 하지. 그래도.’
[음. 교수들은 아니란 거죠?]
‘외과 쪽은 최낙필 교수님 중심으로 해서 날 엎으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당장 지금 외과 교수도 어떨지 몰라.’
[그럼 쉬운 방법이 있죠.]
‘뭐.’
[이현종을 부르는 겁니다.]
‘아.’
이현종이라.
아빠를 부르면 뭐가 되긴 할 터였다.
일단 개판부터 되고, 말을 따르게 되겠지.
단순히 뛰어난 의사가 아니라 지랄할 줄 아는 의사라서 그랬다.
같은 편이면 더없이 든든하지만 남의 편일 때는 지옥 그 자체였다.
굳이 여기서 지옥을…… 지옥도를 그려야 할까.
[정 그러면 조태진을 부르죠.]
‘형?’
[형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꽤 많지만, 이미 그렇게 부르기로 작심한 지 오래된 거 같으니 그 문제는 넘어가겠습니다. 하여간…… 조태진도 혈종 교수 아닙니까. 에이즈 환자에서 발원하는 비호지킨성 림포마는 그 종류가 일반인과는 다르니, 당연히 관심이 있을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에이즈, 그리고 그 에이즈로 인해 발생하는 또 다른 병들.
개인에게도 비극일 테지만 보건의학적으로 봐도 비극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류는 전례 없이 수명이 늘어난 시대를 향유하고 있지 않나.
아직 사회적으로는 그로 인한 경제적인 부담만을 얘기하고 있지만, 의사들에게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새로운 형태의 질환이 문제였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에이즈 환자의 수명 연장과 그로 인한 새로운 질환의 등장은 당연히 의사들에게는 크나큰 도전이 된 지 오래였다.
“어! 수혁아!”
고민은 길지 않았다.
수혁이 워낙에 긍정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또 의외로 자기 객관화가 잘 되는 사람이라서 그랬다.
의학적인 능력으로야 이미 국내 최고를 자신할 수 있겠지만 아직 학계에서의 위치는 턱도 없었다.
그 어떤 집단보다 경직된 의학계라 더더욱 그랬다.
“네, 형. 혹시 지금 뭐 하세요?”
하여간 전화를 받은 조태진은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이현종, 신현태만 수혁과 노는 거 같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랬다.
바로 얼마 전에 둘이 싱가포르에 갔다 왔다는 사실 따위는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근데 전화가 와?
후후.
조태진은 병동 회진 중이었다는 것도 잊고, 심지어 병실 밖으로 쫓아 나온 환자 보호자가 있다는 것도 잊고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교수님……?’
나름 명성 있는 교수인 조태진을, 레지던트와 보호자 모두 어리둥절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정작 조태진은 개의치 않았다.
“나? 지금? 아무것도 안 하는데.”
“교수님?”
“시끄러.”
옆에서 끼어드는 사람이 있어도 그랬다.
‘저…… 중요한 전화인가 본데요.’
‘그래 보여요. 어차피…… 우리 아빠 좋아지고 있어서 감사 인사드리려고 나온 거니까…… 제가 좀 기다리죠.’
‘아이구, 감사합니다. 우리 교수님이 원래 이런 분이 아닌데…….’
‘이런 분이 아닌데, 이러시니까 더 기다려야죠.’
다행인 일은 조태진의 명성이 생각보다도 더 드높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이상한 일을 해도 잠깐은 괜찮았다.
“그래요? 그럼 본관 수술장 오실 수 있어요?”
“수술장……?”
“네. 에이즈 환자 수술받는데…… 지금 외과 쪽 임프레션은 항문 주변 농양이랑…… 직장 부근 농양이거든요.”
“네 생각은 다르구나.”
조태진은 이제 통화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단어 중에 예사로운 게 단 하나도 없어서 그랬다.
수술장, 에이즈, 외과 임프레션, 농양.
이미 머릿속에는 무척 상태가 좋지 못한 환자가 딱 그려졌다.
외과 쪽에서 최선을 다해 치료해 보려고 애쓰는 그림과 수혁이 그걸 제대로 된 길로 이끄는 그림까지도.
“네. 이게 위치도 그렇고…… 단순한 농양은 아닌 거 같아요. 영상 보내 드렸는데, 보이세요?”
“어? 잠깐만. 음. 폰이라 너무 작긴 한데…….”
“아 폴드 안 쓰시는구나. 엄청 좋은데. 아무튼, 보시면…… 음. 59컷에. 직장 근처에 림프절 드글드글한 거 보이세요?”
“림프절은 다른 컷에서도 많이 보여.”
“거기서…… 제가 방금 보낸 스크린 샷에 표기된 림프절 보시면, 어때요?”
“음.”
어떠냐고?
조태진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단 생각만 들었다.
수혁이 빨간펜으로 동그라미 쳐서 보낸 림프절과 그렇지 않은 림프절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는 건지 당최 보이지 않아서 그랬다.
“이게 왜 달라 보여?”
아마 예전 같았으면, 그러니까 수혁과의 관계가 자신이 없었을 땐 질문을 던지지 못했을 터였다.
멍청한 사람으로 보이기 싫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우선 수혁이 아는 걸 자신이 모른다는 게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다.
뻔뻔해졌다는 게 아니라 그저 수혁의 실력을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수혁이 형이라 부르기로 한 이상, 가족이지 않나.
이 정도 모르는 것쯤은 흠결이 되지 못할 터였다.
“아. 잘 보시면…… 덴시티(Density, 밀도)가 좀 달라요. 그냥 반응성 림프절이라고 하기엔…… 안쪽을 보세요.”
“음.”
“이게 화면이 작아서 그럴 수도 있어요. 그리고 사실 제가 말하는 게 억측일 수도 있고요. 그냥 가능성이라고만 들어 주세요.”
“어, 일단 나 가고 있어.”
“네네.”
조태진은 레지던트와 보호자에게 이따가 다시 오겠다고 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미 나머지 사람들은 조태진이 ‘네 생각은 다르구나.’라고 했을 때부터 이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병원 어디엔가 아주 심각한 환자가 있다는 느낌이 팍팍 들어서 그랬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조태진은 일말의 방해도 없이 본관 수술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어, 형.”
“어. 그래서 환자는 어딨어?”
“이제 올라올 거예요. 아직 응급실이에요.”
“아……. 근데 이 환자는 어떻게 본 거야?”
“그…….”
수혁은 답 대신 안대훈을 가리켰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훈이 등에 메고 있는 돌림판이었다.
‘뭐지…….’
조태진으로서도 쉬이 이해가 가지 않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두 번 보고 세 번 보니 알 것 같았다.
수혁은 저걸 이용해 온 병원을 헤집고 다닌 참인 듯했다.
‘우리 동생이 좀 또라이이긴 해.’
잘된 일이었다.
보통 또라이였으면 이렇게 좋아하게 되지 않았을 테니.
그래서 조태진은 자세히 묻는 대신 그저 웃었다.
“좋아. 잘했어. 하여간 들어가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달라는 거지?”
“네.”
“좋아. 기다릴까,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