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705화 (705/1,303)

705화 내과 학회 (1)

학회라고 하면 그냥 하나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그 수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터였다.

현대 의학이 미친 듯이 발전하면서 도저히 내과 학회를 단순히 내과 학회 하나로 묶어 둘 수가 없어서 그랬다.

당연히 소화기내과, 혈액종양내과, 호흡기내과, 내분비내과 등의 분과 학회가 따로 있었다.

또 각 분과 안에서도 주로 다루는 질환에 따라 나뉘기도 했고, 통합진료학회처럼 전혀 다른 성격의 학회도 있었다.

“모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문재 내과 과장은 실로 오랜만에 모두 모인 내과 분과장 및 센터장들을 바라보았다.

그중에는 신현태 병원장도 있었고 또 이현종 통합진료센터장도 있어서 꽤 긴장이 되었다.

‘쫄리면서도 할 말은 하는 사나이…… 그래, 그게 나다.’

김문재는 얼마 전 들어온 보고를 떠올렸다.

보고라기보다는 내과 학회에서 내려온 공문이라고 보는 게 좋았다.

‘아니지…… 그건 협박이었지.’

온갖 예의 바른 문장들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우리 회원님들 다들 잘나셔 가지고 지들 분과 학회나 유관 학회 활동만 존나게 하시는데…… 그사이에 친정인 내과 학회가 개박살 났다는 건 모르셨지? 지금 대한영상의학과 학회는 학회지가 무려 SCI에 등재되고 그 위상이 세계적으로 날리기 시작하는데…… 우리 내과 학회는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SCIE 자격도 위태하다고. 이번 학회도 대충 분과, 유관 학회 발표하고 남은 거로 짬 처리하면 뒤질 줄 아셔들.

아니, 실제로 이렇게 전화가 왔다.

지금 내과 학회장이 건 것도 아니었다.

몇 기수 위더라.

이미 정년 퇴임하고도 한참 지난 사람의 전화였다.

“이윤형 교수님이 연락을 주셨습니다. 아마 이 중에서도 따로 연락받으신 분들이 있을 줄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제 겨우 50살 갓 넘은 김문재는 그 교수님을 레지던트 때만 겪은 바 있었다.

그때도 이미 정년을 코앞에 두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연배가 더 위인 신현태, 이현종 등은 교수일 때도 이윤형 교수를 모셨더랬다.

‘하……. 노인네…….’

‘형도 노인이야, 이제.’

‘나는 은퇴하면 학회 일에서 손 딱 뗄 거거든?’

‘지랄 마…….’

‘은퇴를 안 한단 소리지.’

‘아.’

그런 이름이 나오자 그렇지 않아도 심상찮은 분위기에 짓눌려 있던 교수들이 더더욱 조용해졌다.

기껏해야 이현종과 신현태가 아주 잠깐 잡담 나눈 것이 다였다.

원로 중에서도 으뜸을 달리는 교수의 무게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아시는 분은 아실 텐데 지금 대한영상의학회에서 발간하는 Korean Journal of Radiology…… 일명 KJR. 이거 기세가 장난이 아닙니다. 인용 점수가 해가 다르게 오르고 있어요.”

“그건…… 영상의학회에서 내는 논문이 인용하기 좋아서…….”

“어허! 그게 문제입니다! 왜 우리는 인용하기 좋은 논문을 못 내는 겁니까?”

“그, 죄송합니다.”

무심결에, 또 억울하단 생각에 대꾸했던 장강명이 입을 다물었다.

김문재가 아무리 회개하고 이수혁파에 합류한 지 오래라지만 그 성질머리가 어디 가겠는가.

엄밀히 따지고 보면 장강명의 학번이 더 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납게 대들었다.

근거는 있었다.

이윤형의 전화는 지금 떠올려 봐도 가슴 떨리는, 그야말로 무서운 것이었다.

게다가 실제로 들이파 보니 지금 내과 학회 사정이 참으로 엉망이기도 했다.

언제 이렇게까지 망가졌지 싶을 지경이었다.

“일단…… 지금 본인이 속한 유관 학회나 분과 학회에서 이미 발표하셨거나 초록 내신 분들은 손 들어 보세요.”

김문재는 눈을 부릅뜨고 좌중을 돌아보았다.

-이거 잘되면 차기, 또는 차차기 이사장으로 밀어줌세.

이윤형 교수가 말했으면 이건 거의 확실한 얘기라고 보면 좋았다.

물론 그사이에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다 없는 얘기가 되기야 하겠지만.

은퇴하고 아예 아무 활동도 안 하는 교수라면 모를까, 이윤형처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잘 죽지도 않았다.

“어이구……. 손 안 드는 분이 단 한 명도 없네. 그럼 이 중에서 추계 학회에도 초록 내신 분들 계시면 그분들은 손 내리세요.”

김문재는 분노와 탐욕으로 얼룩진 눈으로 말을 일었다.

‘저 새끼 갑자기 왜 저 지랄이래.’

‘내과 학회가 개판 난 건 맞잖아요. 생각해 보니까 나도 감염 학회만 신경 썼고…… 내과 학회는…… 형은 어떤데.”

‘나야 심장 내과의 희망인데 어떻게 그냥 냅둬. 게다가 통합진료학회 학회장이잖아. 나한테까지 저러면 선 넘는 거지.’

‘음……. 그렇게 따지면 나도 원장이라 바쁜데.’

불만이 생겼지만, 그 누구도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눈깔이 돌아가 있다고 해야 할까?

오랜만에 전투력 만렙 상태의 김문재를 마주하고 있었다.

“와……. 손 내린 사람이 열 명도 안 되네. 우리 이거 되겠습니까? 아무튼…… 일단 추계 학회 초록. 지금 여기 계신 분들 책임지고 꼭 하나씩 내세요.”

“네? 아니 얼마나 남았다고?”

“얼마 안 남았는데 초록이 모자라요. 그나마 들어온 초록들도 제가 검토했는데…… 아유……. 뭔 레지던트 초록만 한가득이야. 이러니까 회원들이 오고 싶겠어요? 와도 술이나 먹고 가지.”

“으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에게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있기는 했지만.

나 하나쯤이야 라는 생각이 쌓이고 또 쌓이다 보니 내과 학회는 정말로 버림받은 몸이 되고야 말았다.

그 위상이 10년 전이 아니라 단순히 몇 해 전과 비교해도 많이 떨어지지 않았나.

“하여간 그렇게들 아시고…… 올해 안에 논문도 하나씩 이쪽으로 제출하세요.”

“어? 아니…… SCI에 낼 논문거리도 부족한데…….”

“그 SCI를 우리 학회로 만들어 보자, 이런 취지 아닙니까!”

“아니…….”

SCI가 무슨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저렇게 말한다고 어영부영 될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김문재의 돌아간 눈은 분과장들의 눈을 회피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심지어 이현종도 슬쩍 고개를 틀고 있었다.

‘낼 게 없는데…… 케이스나 낼까?’

‘케이스요? 그걸로 되겠어요?’

이따위 소리나 하면서였다.

그걸 들은 건지 아니면 미리 알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는데, 김문재 교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케이스로 대충 퉁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오리지널 논문만 셈하겠습니다. 이거 미충족하는 분과는 펠로우 선발에서 불리할 거라는 점…… 참고해 주세요. 그럼.”

아주 칼을 갈고 오셨나, 독한 말을 내뱉고서는 즉시 방을 빠져나갔다.

김문재가 사라지자마자 여기저기서 한숨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 한 달도 안 남은 추계 학회에 어떻게 초록을 내.”

“그것도 케이스는 안 된다고?”

“안 되지 이거. 이거 불가능한 일인데.”

그래 봐야 별 소용은 없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김문재보다 지위가 낮아서는 아니었다.

그가 하는 말에 일리가 있어서 그랬다.

심지어 이현종이 보기에도 그랬다.

“자네들이 좀 열심히 하지 그랬어? 아니, 이게 뭐야? 학회지가 언제 이렇게 망가졌어?”

“그…….”

차이가 있다면 이현종은 탄식 대신 남들을 비난했다는 점이었다.

별명이 논문 기계인 주제에 내과 학회에 최근 5년간 낸 논문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는 걸 감안하면 여기서 멍석 말려 뒤져도 할 말이 없을 텐데도 그랬다.

‘와……. 이렇게 뻔뻔하나.’

신현태는 그런 이현종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생각을 했다.

비록 그가 원장이고 정말 바쁜 몸이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내과 학회의 몰락을 지켜보기는 좀 그래서 그랬다.

“장 교수.”

“네, 원장님.”

해서 자기 대신 분과장을 맡고 있는 장덕수를 불러 회의에 돌입했다.

다른 교수들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지 않나.

다행이라면 이들은 모두 분과장급의 교수들이란 점이었다.

얼마든지 아래로 짬 처리하려면 할 수 있는 위치란 얘기이기도 했다.

원래 교수들 중엔 머리 아픈 일이 생기면 일단 아래에 넘기고 싹 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우리 논문으로 낼 만한 것이 있나?”

“그…… 원내 감염 현황 같은 것들이 있기는 한데…….”

“SCI 준비하고 있는 거지?”

“네. 대형 병원 자료는 거의 다 실리니까요. 이걸 주기는 좀 아깝습니다.”

“하긴…… 이건 좀…….”

하지만 모여서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를 반복하다 보니 남는 것은 결국, 찌꺼기였다.

이거라도 내면 되긴 할 터였다.

말은 강하게 했을지 몰라도, 실제로 SCI급 논문을 바라고 있는 건 아닐 테니까.

“형, 형은 뭔 대책이 있어? 왜 그렇게 태평해?”

좌우지간 다들 혼란스러운 와중에 이현종만 태연한 얼굴이었다.

아예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호록 마시더니만 천천히 회의실 밖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원래도 별걱정 없이 사는 인간이었지만 오늘은 남들이 너무 후달려 하고 있는 와중에 이러고 있다 보니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응? 나?”

“어, 형.”

“나야 뭐…… 걱정 없지.”

“왜?”

“우리 센터에는 수혁이가 있으니까.”

“뭐……? 아니 수혁이한테 이거 시키려고? 와……. 형이 사람이야?”

기상천외한 답을 들은 신현태는 곧장 이현종을 비난하고 나섰다.

원래 논문 아래로 던지는 것이 악질 중에서도 악질이나 하는 짓이라 그랬다.

하지만 이현종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따라붙던 신현태는,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복도를 걷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이 형…… 농담 아니네? 우리 수혁이한테 논문 쓰게 하려고?”

“어. 왜.”

“와……. 언제는 아들이라고…… 어? 그러더니! 이런 걸 시켜? 안 되겠어. 내가 삼촌으로서…….”

엘리베이터에까지 따라 탄 신현태는 이제 숫제 소리치고 있었다.

그 바람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애꿎은 의료진들은 밖으로 슬금슬금 피해야만 했다.

제아무리 일이 바빠서 외부에 무신경한 일들이라 해도 원장이랑 센터장이 저러고 있으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느라 내릴 타이밍을 놓친 불쌍한 인턴만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안 들린다……. 안 들려…….’

부디 내게 신경이 쏠리지 않기를 바라면서였다.

기도가 통한 건 아니었지만 애초에 남들에게 그리 관심 없는 이현종은 당연히 신현태만 보고 있었다.

“야, 현태야. 너 그럴 자격이 있기는 한 거냐?”

“뭔 소리야! 내가 걔를 어? 얼마나……!”

“이뻐는 하지. 근데 잘 모르는 거 아닌가?”

“몰라……?”

신현태는 정말로 억울하다는 얼굴로 외쳤다.

‘뭐야…… 걔가 누구야……. 사랑싸움이야?’

인턴은 곁눈질로 둘을 돌아보았다.

웬만하면 닥치고 있을 텐데.

그러기엔 대화 흐름이 너무 이상했다.

“내기할래? 이거 얘기하면 좋아할지 아니면 싫어할지?”

그리고 인턴은 실로 자신만만한 얼굴의 이현종과 눈이 딱 마주쳤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현종이 이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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