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9화 이런 논문을요? (1)
내과 학회장.
또는 대한내과학회 이사장.
‘하…….’
임기는 2년.
어림잡아 계산했을 때, 수천 명에 달하는 내과 교수 중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건 고작해야 2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심지어 주로 55세 이상에서 60세 사이에서 회장직에 앉게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교수 일생에 회장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단둘 또는 셋뿐이었다.
‘하아…….’
무조건 행복해야 할 것 같은 자리였음에도 현직 내과 학회장 정용기 교수의 입에서는 연신 한숨만 새어 나왔다.
눈앞에 산적해 있는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학회 홈페이지 내에 마련된 회원 공간에 들어갈 때면 늘 이 답답함이 몰려왔다.
<학회장은 뭐 하는 겁니까? 3년제로 할 때는 분명 레지던트 지원율 올라갈 거라 호언장담하지 않았습니까?>
<내 평생에…… 설마하니 내과가 비인기 과로 분류되는 날이 올 줄이야…….>
<스테디셀러라는 말도 이제 어디 가서 쓰면 비웃음당해요. 정형외과나 신경외과처럼 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냥 더 나빠지지만 않게 하라고. 이러다 소아과 되겠어!>
맹비난이 이어져서 그랬다.
아니, 이런 걸 비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들이 하는 말에는 거의 대부분 근거가 있었다.
실제로 내과의 위상은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 일례로 레지던트 지원율이 개박살 나고 있었다.
<로컬 신경 안 씁니까? 아, 고고하신 학자님들이라…… 수가 얘기는 하기 싫다 이건가?>
<내가 로컬만 박살 나는 거면 말도 안 하지. 학회 그거…… 진짜 논문을 위한 논문만 나오고 있잖아요? 학문, 돈. 둘 중 하나는 제대로 하라고.>
<몸 고생스럽고 돈 좀 못 벌어도 내가 내과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왔는데…… 요새는 이거 힘듭니다. 무의식적으로 다른 과 친구들 피하고 있다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학문적 성과에 대한 비난도 연일 이어지고 있었다.
무리는 아니었다.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의미 있는 논문이 나오고 있지 않았다.
비단 내과 학회지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었다.
전반적으로…… 대한민국의 내과 수준이 가라앉고 있었다.
“이사장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정용기 교수는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학술이사 동종헌을 바라보았다.
눈에 총기가 뚝뚝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만 있다면 걱정이 없을 텐데.
안타깝게도 지난 20년간 내과 인기가 박살 나면서, 학구적인 애들이 죄다 다른 과로 가고 있었다.
그나마 똘끼 있고 자부심 넘치는 친구들이 남아 다행이었거늘.
이제는 그것조차 옛말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명감 하나로 인재를 붙들어 두는 건 어찌 보면 정신 나간 소리 아니겠나.
“아니…… 이게 참 답이 없다 싶어서 말이야.”
“아, 또 홈피 보고 계시네. 그거 봐서 뭐 합니까. 기분만 나빠지지.”
“이거 보는 게 내 일이 아닌가. 봐야 뭘 알고 대처를 하지.”
“방금 답 없다고 했잖아요. 진짜 답이 없다니까요? 이렇게 된 이상…….”
“뭐, 말해 봐.”
“전에도 말씀드렸어요.”
“아, 그거…….”
사람 인상이 이렇게 순식간에 바뀔 수도 있는 걸까?
정용기는 눈앞에 있던 재떨이, 어차피 아무도 담배를 안 피우기 때문에 장식품으로 전락한 유리 덩어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걸 들어서 저놈 머리통을 후려치면 어떻게 될까.
무게도 있고, 경도도 적당하고, 정용기 교수 자체가 소화기내과다 보니 반강제적으로 팔근육이 단련되어 있던 몸이었다.
스산함을 느낀 학술이사 동종헌은 재떨이를 슬그머니 치우면서 말을 이었다.
“말이 안 되는 게 아니라니까요. 허준 드라마 나오고 한 3년 동안 한의대 입결이 의대 제쳤던 거 기억나요? 전국 수석이 한의대 가고 그랬잖아요.”
“그렇긴 했지……. 근데 그건 허준이잖아. 내과로 드라마를 어떻게 만드냐고!”
“왜 못 만들어요. 제가 딱 소재도 생각했잖아요.”
“뭐. AI가 머릿속에 박힌 천재 의사 이야기? 시발…….”
“뭔 발이요? 이 양반이 이제 욕을 하네?”
“욕도 나오게 생겼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내과 의사라는 사람이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해? 막말로 대가리에 칩 박고 주절거리는 사람 이야기를 누가 보겠어?”
“거…… 본다니까요? 이거 시청률 나오고 내과 뽕 좀 주입해 주면…… 학회 차원에서 지원할 명분도 있고. 이유도 있습니다.”
저걸 어떻게 해야 하나.
정용기 교수는 재떨이 대신 쓸 만한 것을 찾아 고개를 연신 돌렸다.
눈치 빠른 동종헌 교수가 뒤로 슬쩍 몸을 뺐기 때문에 구타는 무위로 돌아갔다.
분노는 곧 허무가 되어 한숨으로 승화되었다.
“하아아아아아.”
차이가 있다면 아까보다 훨씬 깊고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는 것 정도였다.
사실 동종헌 교수도 그러한 이사장의 마음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던 바였기에 위로에 나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드라마 뽕이 최고인데…….’
의대생이 밖에서 보면 어른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자유가 억압된 상태에서 공부만 하던 애들이라, 실제로 보면 그냥 애들이었다.
고딩이나 별다를 게 없다는 뜻이었다.
그 순진한 애들 꼬드기려면 역시 그럴싸한 이야기가 짱이었다.
실제로 중증외상센터의 영웅, 양재원의 일대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형식 영화가 나온 해 외과 지원율이 130%를 찍지 않았나.
하지만 도저히 지금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뒤질 것 같았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요.”
“좋은 소식? 이 상황에?”
“네. 태화 의료원 소식인데요.”
“아……. 거기는 사파잖아. 통합진료센터라니…… 그게 말이 돼? 이현종 교수님이 말년에 좀 망가지는 거 같아…….”
“뭐…… 숨겨 둔 아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미. 아니, 아니지. 근데 거기서 이번에 내과 학회 초록을 냈어요.”
“어? 그래? 그야…… 어르신 나서서 지랄하셔서 억지로 낸 거 아냐? 눈치 봐야지. 이현종 교수님도 그 밑에서 얼마를 배웠는데.”
그때는 좋았더랬다.
실제 학문적 성과야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긴 했지만.
상대적인 위상은 대단했으니까.
내과야말로 진짜 의사다 라는 자부심이 온 의국원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니, 이게 대충 낸 게 아닌 느낌이에요.”
“그래? 그럼 어디 봐 봐.”
한숨을 쉬고 있으려니 진짜 희망찬 얘기가 들려왔다.
우리 동종헌 학술이사가 가끔 정신 나간 소리를 해서 그렇지 꽤 똑똑한 양반 아닌가.
게다가 태화의 그 가증스러운 센터에는 이현종이 있었다.
아무리 망가졌네 어쩌네 해 봤자, 그 명성에는 흠집조차 가지 않을 만큼이나 대단한 위인이었다.
그런 인간이 진심으로 논문을 썼다?
그럼 괜찮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아들내미 발표잖아?”
“네, 이수혁 교수. 요새 핫해요. 레지던트 애들한테는 아이돌입니다. 아, 이 양반 주제로 드라마를…….”
“동종헌 교수…….”
“네, 죄송합니다. 아무튼, 주제를 보세요.”
“음……. 예방 가능한 치매 원인. 근감소증에 대한 고찰……? 근감소증이랑 치매랑 연관 지은 게 있어?”
“제 기억으로는 없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근감소증이 오긴 하죠. 실제로 치매 환자들의 주요 사망 원인으로 낙상이 꼽히고 있으니까요.”
“그건 결과잖아. 이건 원인인데?”
이사장은 소화기내과.
사실 치매랑 직접적인 연관은 전혀 없는 분과 출신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 떠들어 대고 있는 동종헌 교수 또한 호흡기내과라 딱히 치매랑은 연관이 없었다.
분과만 따지고 보면 그랬다.
하지만 현대 의학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람 중에 나는 치매에 관심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무시하기엔 너무 중대한 질환이었다.
“거봐요. 확 관심이 가죠?”
“어그로…… 아닐까?”
“어그로요?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요?”
“아버지 학교. 애 키우다 보니까 별일을 다 겪어. 알지? 나 새벽에 애 라이딩하는 거. 아주 갑질이 갑질이…… 어제는 12시에 부대찌개가 먹고 싶다는 거야. 내가 대치동 근처 24시 하는 집 명단을 다 알고 있다니까.”
“오, 그거 저도 좀 주세요. 요새 슬금슬금…… 아니, 아니지. 이따위 얘기할 때가 아니잖아요.”
학회 이사장, 학술이사에서 잠시 평범한 애 아빠로 돌아가려던 둘은 가까스로 브레이크를 잡고 원 대화로 복귀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초록이 초록이 아니어서 그랬다.
이 디테일함.
그리고 정확함.
어쩌면 논문으로 이미 나온 내용인가 싶을 지경이었다.
“하여간…… 음. 이거. 국건영 데이터 이용한 건가?”
“아마도요. 확실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에요. 생각해 보면…… 근육에서 오는 체성 감각도 중요하긴 할 거잖아요. 지금은 어지럼증 보는 사람들이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긴 한데…….”
“이거 만약 맞으면 대박인데.”
패러다임의 전환.
의학 역사에서 이만큼 중요한 순간도 드물었다.
하물며 상대가 치매였다.
최근 각광 받고 있는 노인 의학의 연장선에 있기도 했다.
이쯤 되자 살짝 불안해졌다.
“이거…… 우리가 받아도 되는 건가……? 논문은 우리한테 안 주겠지?”
“그렇죠. 말이 됩니까. 그래도 발표의 질이 확 올라가는 거죠. 이수혁 이 친구…… 이제 이현종 교수님 아들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안 돼요. 전에 어디서 발표하는 거 봤는데, 미쳤어요. 발표력이…….”
“그래? 그래, 하긴. 말이 안 되지. 이거 NEJM급 또는 그 바로 밑 급인데…… 우리가 받는 건…….”
“양심 어디 가셨어요. 우리 학회지 똥망인데. 회원들도 안 봐서 종이로도 발간 안 하잖아요.”
“신물 올라오는 말 하지 말고…… 명색이 소화기내과 교수인데 위암 걸리게 생겼어.”
“아, 그럼 안 되지. 아무튼…….”
이런 황송한 수준의 발표가 온다는 소식에 들뜬 둘의 대화가 일순 멈췄다.
전화가 걸려 와서 그랬다.
비서 쪽이 아니라, 직통이었다.
소위 거물 또는 원로급으로 분류되는 사람이 전화를 걸었다는 얘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어르신한테 불려가서 푸닥거리 한번 당했던 둘이라 긴장이 덜컥 됐다.
“네, 대한내과학회입니다.”
“못 본 사이에 루이 18세가 되셨나?”
“네?”
“짐이 곧 학회다, 뭐 이런 건가. 이름을 말해야지. 정용기 교수 아냐?”
“누구…… 아, 이현종 교수님.”
이따위로 말할 사람은 이현종뿐일 터였다.
원로 중의 원로들도 이러진 않았으니까.
“어, 그렇지. 초록 받았나?”
“네네. 받았죠. 이거 아주 훌륭하던데요?”
“나도 알지. 사실 국제 학회 내도 충분히 중앙 의제로 올라갈 발표야. 내 아들이 하는 발표니까 의심할 필요가 없지.”
“그…… 네.”
안하무인.
이 네 글자로 요약될 만한 태도였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현종은 나이도, 업적도 그래도 될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이런 발표를 던져 준 참이지 않나.
학회장으로서 가서 엎드려 절할 용의도 있었다.
“그런 발표를 꽁으로 받을 생각은 없지?”
“어…… 네?”
진짜 절이라도 하라는 건가?
용의랑 실제 실행은 좀 다른데?
학회장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사이 동종헌 학술이사는 귀신같이 몸을 숨겼다.
욕이 나올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