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1화 이런 논문을요? (3)
학회장 정용기는 전화를 끊었다.
“하아…….”
아, 이게 바로 한숨이 절로 나온다는 거구나.
55살 넘게 먹고서야 우리말의 신묘함을 체득하는 느낌이었다.
정말로 한숨이 그냥 저절로 나왔다.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그랬다.
아니, 의식을 해야 제대로 된 숨을 쉴 수 있었다.
“후아…….”
옆에 선 동종헌 교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쪽도 50살 남짓 먹은 몸인데, 그럼에도 이렇게 당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적어도 환자 외의 문제로는 진짜 그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썩어도 준치라고.
먼저 움직인 것은 학회장 정용기였다.
그는 몇 번 한숨을 반복하긴 했지만.
하여간 몸을 일으켰다.
“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뇨? 아, 우리 회의가 있구나, 참.”
학회라는 게 그냥 두어 명 모여서 쿵짝댄다고 굴러가던가.
아무리 찬밥 신세가 된 지 오래인 내과 학회라고 해도, 여전히 명분은 최고인 학회였다.
일단 회비 규모로만 따지면 국내 의학회 중 최대였다.
당연히 회원 규모도 그랬고.
그런 주제에 영상의학회니 뭐니 하는 학회에 국제적 위상이 밀리고 있어서 더더욱 질타를 받고 있던 몸이었다.
“회의 때, 이 안건은 무조건 얘기해야 해.”
정용기는 그걸 이제야 알았냐는 얼굴로 쯔쯔 하고 혀를 찼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동종헌 교수의 얼굴이 시커메졌다.
집행부라고 해서 다 같은 편은 아닌 까닭이었다.
오래된 모임이니만큼 안에서 파벌이 있었다.
사람 수가 워낙 많은 내과 학회다 보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다 같은 스승님 밑에서 배웠고 한데 살다 보면 자연스레 틀어지는지, 하여간 지금은 원수나 다름없는 사이가 된 원로들도 많았다.
“아……. 지금 누구 발표를 밀어야 하죠?”
“일단 칠성의 안 교수님이랑…… 아선 박 교수님. 사실 태화에서도 밀어야 하는데…… 거기는 알아서 하겠지. 불만 있으면 어쩔 거야? 이현종 교수님 이름 팔면 되지.”
“그것도 그렇네요. 그럼 아선의 박 교수님도 비슷한 상황 아닐까요?”
“왜?”
“심장이잖아요.”
“아. 그렇네. 이현종 교수님 말이라고 하면…… 대강 듣는 척은 하겠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현종이 깡패란 점이었다.
이 불세출의 기인은 파벌과 관계없이 홀로 우뚝 선 거산이었다.
다 좋게좋게 지낸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냥 다 사이가 안 좋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 어떤 파벌에서도 이현종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특히 심장내과다?
그럼 100%였다.
인간관계를 뒤엎을 업적을 남긴 사람은 으레 그러한 법이었다.
“그럼 칠성인데…… 우리 집행부에…….”
“교육 이사 쪽이 칠성이죠.”
“아, 그렇네. 원래도 나랑 좀 그런데.”
“그렇죠. 미친놈이에요. 지방대라고 무시를 하고…….”
지방대라는 말에 정용기와 동종헌 교수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둘 다 한국대 출신이었고, 단지 교수만 지방에서 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사실 이 둘도 처음 지방대로 발령이 나서 갈 때는 조금 그렇긴 했더랬다.
단지 서울이라는 인프라를 포기해야 해서만은 아니었다.
뭔가 좀 애들이 딸릴 거 같다는 생각이 있었다.
근데 가 보니까 그게 아니었다.
“요새 의대에 지방, 서울이 어디 있다고. 막말로 칠성도 그거 맨날 경시대회로 뽑아 놔 가지고 정작 유급률이나 국시 합격률은 떨어지잖아? 물리랑 의대랑 무슨 상관인데?”
지방대 의대라고 성적이 떨어지는 애들이 오는 게 아니란 얘기였다.
아니, 떨어지기야 떨어지는데 그렇게 차이가 나질 않았다.
대체 이런 애가 왜 왔지 하는 애들도 있었다.
가르치다가 황송해져서 고맙단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니들이 있어서 한국 의료의 미래가 밝다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그중 일부는 전통적인 의사의 길에서 벗어나 전혀 엉뚱한 일들을 벌이는 애들도 있었다.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는 애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정용기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 지금 약간 포인트가 빗나가셨습니다.”
“어, 그렇지. 그래. 지금은…… 아휴, 이거 개지랄할 게 뻔한데.”
“어차피 지랄할 놈이 지랄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오.”
정용기는 동종헌의 씽크빅에 어깨를 두드려 준 후, 회의실로 향했다.
동종헌은 그 뒷모습이 어쩐지 전장으로 향하는 장수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뒤따랐다.
그렇게 회의를 빙자한 싸움판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수혁은 이현종과 있었다.
“그러니까 수혁아. 이거 발표가 중요해.”
“알죠. 잘해야죠.”
“심드렁하게 말하는 거 같은데?”
“벌써 열 번 넘게 말하셔서 그래요. 제 발표 못 믿으세요?”
“믿지! 잘하지! 근데 그냥 잘하는 게 아니라…… 뭔가 좀. 어? 알잖아. 박살을 내주란 말이야. 그래야 임팩트가 팍 하고 살지.”
“알았어요, 알았어. 준비해서 제일 먼저 아빠한테 보여 드릴게.”
“그래! 그거다.”
이현종은 수혁의 어깨를 쾅쾅 두드렸다.
아무래도 또 한 번 언더독이 될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젊을 때의 혈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불씨는 수혁에게만 미치지 않았다.
이미 상황 파악 딱 하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던 신현태도 붙잡혔다.
“너 인마 어디 가.”
“어……? 어? 왜요.”
“왜요? 갑자기 존대를 하네. 불순한 생각 하고 있었네, 이놈.”
“아니, 나는.”
“너도 논문 뱉어야지.”
“응? 갑자기? 논문을? 침도 아니고 뭔 논문이 이렇게 나와.”
신현태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현종을 바라보았다.
뭔가 일이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논문이라니?
“인용 점수가 중요하다고. 아무리 대작이라고 해도 안 보면 무슨 소용이야.”
“형. 형이 늘 그랬잖아. 좋은 논문은 다들 알아본다고.”
“그거야 플랫폼이 좋을 때 얘기고! 까놓고 말해서 내과 학회는 진짜 변방의 쌉쓰레기 학회지라고!”
“아니…… 애들도 있는데 쌉쓰레기라니……. 어어, 여기 보는 거 아니야! 레지던트들 집에 가! 퇴근 안 하고 뭐 해!”
“누가 본다고 이 학회를. 어? 프로모션 하나 없이 회원도 안 보는 학회지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
“뭘 어째…….”
신현태는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이현종과는 달리 신현태는 사실 원장이 꽤나 잘 맞았다.
논문에서 거의 해방이라고 해도 좋을 위치라 그랬다.
미친놈도 아니고, 누가 원장한테 논문 쓰라고 하겠나.
그럴 시간에 원장 일을 제대로 하는 게 맞았다.
‘아……. 나 논문 싫다고…… 경영이 좋아.’
나이 60 가까이 되어서 겨우 적성을 찾은 느낌이랄까?
근데 논문이라고?
딱 너무 싫다는 말이 나오려는 찰나 이현종이 까불기 스킬을 시전했다.
“우리 수혁이 논문 인용해서 쓰라고. 너 인마 이렇게 좋은 논문이 사장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아.”
수혁이.
신현태는 수혁을 돌아보았다.
대체 언제부터일까.
이놈이 삶에 들어와 자리하게 된 것이.
이미 까마득해진 기억 속에 남은 건 애정뿐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 애정이 생긴 것인지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그럼 써야지.”
“그래. 너만 쓰면 땡이 아니야. 네가 쓰는 논문은 사람들이 많이 안 보잖아.”
해서 결연한 의지를 불태웠더니 이 인간이 초를 쳤다.
“안 봐? 와, 씨. 나 안 써. 수혁아 봤지? 이 사람이. 네 아빠라는 사람이 이렇다.”
“왜 그래? 사실인데. 넌 원장이잖아. 힘을 쓰라고. 치매니까…… 저기 어디야. 정신과랑 신경과. 걔네가 주로 보잖아. 거기다가도 논문 쓰라고 하라고.”
“아……. 음. 힘을 쓰라고?”
“그래. 요새 보니까 그런 거 되게 즐기는 거 같더만.”
“뭐…….”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신현태는 실제로 꽤 힘 있는 원장 행세를 아주 잘 하고 있었으니까.
위에서도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고 있었다.
차기 원장 얘기 대신 연임 얘기만 돌고 있을 지경이었다.
“알았어. 내가 한번 해 보지. 수혁이 때문이지, 형 때문은 아니야.”
“나도 수혁이 때문에 이러지. 그리고 조태진이. 이 새끼는 어디 갔지?”
“혈종 교수가 시간이 많을 수가 있나. 지금 회진 돌러 갔지.”
“전화해서 걔도 쓰라고 해야겠다.”
“어……? 치매랑 혈종은 사실 별 상관 없는데.”
이현종은 신현태의 다분히 상식적인 말에 소리를 꽥 질렀다.
그 바람에 한창 퇴근을 준비하고 있던 레지던트들이 다 이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소리 지른 게 이현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들 별일 아니라는 듯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적어도 저 사람이 이러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별일도 아닐 게 뻔했다.
“그 꽉 막힌 마음가짐! 그게 네가 대형 논문을 못 쓰는 이유야!”
“와……. 여기서 또?”
“어떻게든 엮어 봐야지. 암이랑 치매랑. 두 메인 주제가 연결돼 봐라. 바로 대박이야.”
“그…….”
신현태는 화가 났지만 금세 할 말이 동이 나고야 말았다.
듣다 보니까 또 이게 그럴싸해서 그랬다.
‘입만 산 새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으면 나이고 나발이고 이쯤에서 한 방 후렸을 텐데.
이 인간은 진짜로 대형 논문을 매년 내고 있는 양반이다 보니 별로 할 말이 없기도 했다.
“아무튼, 얘는 내가 단도리 칠 테니까. 원장님은 원장님대로 힘써 보고. 우리 수혁이는, 믿는다!”
“네, 아빠. 걱정 마세요. 제가 한다면 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래. 아까부터 눈 반짝이는 게 어? 아주 믿음직해. 아주 좋아. 그럼 원장아. 너는 가자. 얘 방해하지 말고. 그러고 보니까 여기 우리 센턴데 왜 죽치고 있는 거야.”
“와……. 이 미친 사람이.”
데리고 올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왜 있냐고 타박해?
아마 신현태가 이현종에게 정상인에게 기대할 수 있는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더라면 지금쯤 환장해서 돌아가셨을 터였다.
하지만 신현태는 이현종에게 익숙한 사람이었고.
따라서 미친 사람 운운하는 것도 잠시, 곧 이현종을 따라나섰다.
시시덕거리면서였다.
“근데 우리 골프 좀 뜸하지 않았어?”
“아, 골프. 골프…… 우리 수혁이도 칠 수 있으면 좋은데.”
“왼쪽 다리 때문에 잘 못 치긴 할 텐데…… 이거 김선웅 교수 조지다 보면 나오지 않을까?”
“야……. 역시 원장. 바로 사람 부릴 생각부터 하는구나.”
“왜, 안 돼?”
“아니, 좋은데? 일단 김선웅한테 가자.”
“콜.”
그 덕에 엄한 사람 하나 골로 가게 생겼다.
별로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원래 병원은 이 둘 아니더라도 다들 골로 가는 곳이니까.
시도 때도 없이 아픈 사람들을 보고 있으려면 이런 게 당연했다.
부우웅.
또 어디선가 골로 가는 사람이 있는 걸까.
당직이라 남아 있던 레지던트의 폰이 울렸다.
수혁은 자연스레 그쪽을 바라보았고, 웃었다.
“받아. 환자 있나 보다.”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레지던트는 딱 그 정반대의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네, 통합진료센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