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5화 전원된 환자 (4)
‘와…….’
레지던트는 6시에 일어났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로 1시까지 공부해서 5시간도 채 못 잔 셈.
그러나 생각보다는 훨씬 버틸 만했다.
어제 했던 공부.
그러니까 딱 2시간가량 수혁과 함께했던 시간이 어마어마한 효율을 보여서 그랬다.
‘자고 일어나면 정리될 거라고 하더니…… 이게 진짜 되네.’
너무 많이 쑤셔 박는단 느낌이었다.
중간중간 ‘나는 교수님처럼 천재가 아니라구요!’ 하고 외치고 싶었다.
사실 평생 나는 혹시 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살아온 사람이었음에도 그랬다.
착각할 만도 했던 삶이었다.
진심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던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거의 1등을 놓치지 않았으니까.
의대에 들어가서도, 그 의대가 지방에 소재하고 있는 대학이긴 했어도 거의 1등이었다.
하나 수혁을 눈앞에 두고 있으려니 천재의 정의 자체가 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수혁 교수는 7시에 돌아올 거라 했다.
이현종이라면 시간 약속 따위, 환자와 직접 한 게 아니라면 살포시 무시하는 사람이니 조금 늦게 가도 되겠지만.
이수혁은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
레지던트는 어제의 여운을 애써 뒤로하고 몸을 억지로 일으켜 병동으로 향했다.
머리라도 감을까 했으나, 그냥 가기로 했다.
커피만 마셔도 어느 정도 개운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대체 왜 이걸 알아야 하나 싶기는 한데…… 그래도 안질환에 대해서는 자신 있어. 특히 내과 질환하고 연관이 있는 증상이라면…….’
고작해야 2시간가량의 공부가 이만한 효율을 보이다니.
정말이지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수혁이 바루다와 함께하기 시작한 이래 매일매일 더 효율적인 방향으로 교정해 온 교습법을 썼다는 걸 모르는 입장에서는 진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괜히 안대훈 선배가…… 종교적인 마인드를 갖게 된 건 아니었구만…….’
레지던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병동에 닿았다.
환자 담당 간호사, 그러나 어젯밤에는 없었던 간호사가 그를 맞이해 주었다.
“1시까지 공부하고 주무셨다면서요?”
“아, 네. 어떻게 아셨어요?”
“이수혁 교수님이 1시쯤 다시 여기 들르셨거든요.”
“아.”
“별말 없으셨고…… PET CT만 문제없게 챙겨 달라고 하셨어요.”
“아, 맞아. 그거 어떻게 됐어요?”
PET CT는 각 조직에서 글루코스, 즉 당을 얼마나 흡수하는지 보는 검사였다.
머리나 심장처럼 원래도 당을, 그러니까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조직이 아닌 다른 엉뚱한 조직에서 소모량이 증가했다면 암을 의심할 수 있었다.
원발 병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힌트를 주긴 하지만 대개는 전이를 보기 위한 검사로 쓰였다.
당연히 응급 검사는 안 되었다.
전이를 당장 확인해야 하는 상황은 의학적으로 거의 없었으니까.
때문에 레지던트의 얼굴에는 살짝 수심이 깃들어 있었다.
7시에 수혁이 왔을 때 달라진 것이 없으면 뭔가 할 말이 궁색해질 테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6시 환자가 약간 밀려서 5시 50분에 찍기로 했어요. 환자는 벌써 내려갔어요.”
“휴……. 판독은 안 나오겠구나.”
“아……. 선생님은 센터 처음이에요?”
“네? 아, 네. 올해 생겨서…… 2년 차도 거의 다 처음일걸요.”
“그렇구나. 어쩐지. 센터는 판독 안 기다려요. 이수혁 교수님이 판독하면 그걸로 끝.”
“어……?”
PET CT가 진짜 기깔나는 기기이긴 했다.
잘 모르는 사람도 어설픈 수준으로의 판독은 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병원 내에서 의사소통이 될 정도의 판독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문가가 해야만 했다.
핵의학과 전문의가 필요하다, 뭐 이런 말이었다.
“혈종의 조태진 교수님이나 다른 교수님들도 다 이수혁 교수님 말이라면 껌뻑 죽으시잖아요. 그냥 영상만 띄워 놔 주시면 돼요.”
“안 내려가 봐도 된다고요?”
“이 시간에요? 가 봐야 교수님은 안 계실걸요.”
“아…….”
“해 봐야 레지던트 판독인데, 당연히 그것보단 이수혁 교수님 판독이 훨씬 정확하죠.”
벙찐 얼굴을 하고 있으려니 간호사가 왜인지 모르게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보아하니 신규도 아니고 시니어급으로 보이는데 교수에 대해 저렇게 말하다니.
이수혁이 적어도 센터 내에서만큼은 대단한 인망을 보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정말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 주시고 계시거나……. 아마 이게 맞을 거 같은데.’
병원이라는 곳은 사람 좋은 것만으로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좋은 모습만 보일 수 있다면야 당연히 가능하겠지만.
거의 매일 사람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환경에서 매일 좋은 모습?
그렇다면 그 사람은 세인트 호칭을 받기에 충분했다.
각 연차당 하나 있을까 말까 한데, 수혁은 그런 인종은 아니었다.
‘하긴……. 어제도 봐라. 이 환자가 갑자기 암 쪽으로 틀어서 치료받게 될지 누가 알았어.’
레지던트는 어제 응급실 진료를 떠올렸다.
의뢰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그저 갑상선 안병증 또는 기껏해야 가성 종양을 의심했었는데.
깜빡이도 없이 갑자기 유턴을 하더니 생각지도 않았던 암이라는 도로에 접어든 참이었다.
더 환장할 것은 검사상 모든 것이 그 암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 PET CT에서도 양성 소견이 나오면 100% 확신할 수 있을 터였다.
“일찍 나왔네?”
그렇게 감탄을 하고 있으려니 뒤에서 수혁이 나타났다.
“어, 교수님……?”
“응. 7시에 오려고 했는데 일찍 눈이 떠져서. 확인해 보니까 검사 들어간 거 같더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너도 그런 거지?”
아침 댓바람부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면서였다.
궁금해서 일어나요?
1시까지 공부하다가 겨우 1시 반쯤 잤는데 6시에?
그나마 센터 특성상 수혁의 처방 확인으로 인해 새벽 콜은 없었다지만.
4시간 반 수면만으로 이미 심신이 지쳐 가고 있었다.
매일 충분히 쉬다가 어쩌다 하루만 이랬다면 또 모를 일이겠으나 태화 의료원은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아, 네. 궁금해서요. 저도 이게 통. 하하. 잠이 안 왔습니다.”
하지만 레지던트는 간신히 정답을 말할 수 있었다.
병동에 나오자마자 시니어 간호사가 무심히 건넨 독한 커피를 원샷한 덕이었다.
빈속에 커피를 때려마시다간 속이 어떻게 될지, 내과 의사로서 염려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원래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의사가 자기 몸 관리 잘 못 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지금도 골골대고 있는 수많은 선배 의사들을 방패 삼아 레지던트는 카페인 뽕을 들이킨 참이었다.
“그래? 좋네. 마인드가. 이름이 뭐지?”
왔다.
이름.
이현종과 이수혁은 생긴 것만 봐서는 도저히 부자지간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현종은 좀 투박하게 생긴 데 반해, 수혁은 이쁘장한 구석이 있어서 그랬다.
완전히 엄마만 닮은 게 아니냐는 의견이 팽배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성격은 판박이 그 자체였다.
‘좋아! 한 등성이 넘었다.’
둘 다 실력 없거나 열심 없는 놈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 놈들이 사고라도 치면 거의 한 번에 아웃될 정도로, 제자라고는 생각도 안 하는 듯했다.
반대로 허들을 넘으면 어떻게든 책임을 져 주려 애를 썼는데, 그 증거 중 하나가 바로 이름이었다.
어찌 된 게 수혁의 허들이 이현종보다 높아서, 수혁에게 직접 이름이 뭐냐는 질문을 들은 사람이 더 드물었다.
“이진호입니다.”
“진호. 그래, 2년 차?”
“네. 2년 차입니다.”
“실업계야, 인문계야?”
로컬에 나갈 건지 아니면 대학에 남을 건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전통 있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사실 현 상황과는 조금 안 맞는 부분이 있었다.
옛날에야 로컬에 나가는 족족 돈 걱정은 안 하고 살았다지만 이제는 그렇지도 않아서 그랬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로컬에 나간 의사들 연봉이 여전히 대학 병원 교수들보다야 월등히 높았기에 아직도 쓰이고 있었다.
“인문계입니다. 교수가 꿈입니다.”
“어떤 과?”
“소화기……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화기? 어떤 파트?”
이쯤에서 멈추겠거니 했으나 질문은 멈추질 않았다.
저 망할 탐구심이 질환에만 국한되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 영상 언제 뜨냐. 나 얘 어디 갈지 사실 별로 관심 없는데.’
[아, 그렇죠? 저는 갑자기 수혁이 인간성에 눈을 떴나 했습니다.]
‘인간성에 눈을 떴으면 이제야 이름을 물었겠냐……. 그래도 열심히 하니까 기특하잖아.’
[그렇긴 하죠. 그나저나 시간 때우는 것도 지겹네요.]
‘어……. 질환 볼 때는 시간이 날아가는데…… 이런 거 묻고 있으면 세상이 나노초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기계 같네요. 인간 흉내라도 내시는 건 어떨까요.]
사실 수혁은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다 시간 때우기 용이라는 소리.
하지만 그러한 비밀을 알 길이 없는 레지던트 2년 차 이진호는 진땀을 흘려 대고 있었다.
‘파트……?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 봤는데……. 하 씨, 뭐라고 해.’
한때 소화기내과라고 하면 그저 내시경만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아니, 여전히 소화기내과의 꽃은 내시경이었다.
일단 내과 중 연봉이 탑이었다.
매년 그렇게 많은 내시경 의사들이 쏟아져 나옴에도 불구하고 수가 부족해서 그랬다.
학회에서도 좀 이상하다 싶어서 연구를 해 봤더니, 나이 50쯤 되면 대장 내시경 하던 사람들이 어깨가 나가서 더는 못 한다는 도저히 웃지 못할 결론이 나왔다.
‘역시 요새는 간인가.’
그 충격적인 얘기가 퍼지면서부터 살짝 시장에 변동이 왔다.
아무리 돈을 잘 번다 해도 몸이 망가지면 뭔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이 말이었다.
“간…….”
“어, 영상 떴다. 잠깐만 조용히 해 줄래?”
“아, 네.”
어마어마한 고민 끝에 내뱉은 말은 바로 씹혔다.
수혁은 이제야 비로소 잠에서 깬 보람이 있다는 듯한 얼굴로 검사 결과를 눌렀다.
마음이 어찌나 급한지 몇 초 걸리지도 않는 로딩 시간에 다리마저 떨었다.
‘이 사람은 진짜 찐이구나.’
레지던트는 영상보다도 수혁의 그러한 반응이 더 신기했다.
하여간 한 사람은 모니터를 보고, 다른 한 사람은 수혁을 보는 사이에 영상이 떴다.
파란 사람에 노란빛이 떠도는 영상.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이게 뭔데 새꺄’라고 할 만한 모양새였다.
솔직히 레지던트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오, 저기 전이가 있나? 뭐 이딴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수혁은 더없이 익숙하다는 얼굴로 영상을 뚝딱거리더니만 무심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망할……. 상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안 좋은데……. 진호야. 그 병원에서 뭐 했다고?”
“네? 아, 네. 4주기의 항암요법(VAC/IE)과 원발 병변에 대해 총 4,860cGy(Centigray, 방사선량)의 방사선 치료를 했습니다.”
“일단 태진이 형한테 전화 좀 해야겠다. 골 전이도 있어. 넌 환자 설명드려야 되니까……. 일단 준비 좀 해 줄래? 아휴.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