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8화 갔더니? (3)
반박할 만한 거리가 있는가?
‘없지…….’
그렇다면 반박할 이유가 있는가?
‘그것도 없지.’
손 교수는 수혁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서 있다가, 이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전임 원장의 아들이라거나, 이미 본인이 잘나가는 센터의 부센터장이라서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뿐인 인간이었다면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았을 터였다.
손 교수는 약간 반골 기질이 있는 사람이라 그랬다.
“감사합니다. 모르고 들어갔으면…… 낭패를 봤을 겁니다.”
하지만 수혁의 말은 타당했을뿐더러 도움도 될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뛰어난 집도의라 해도, 그것이 백강혁 수준이 되지 않는다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제대로 대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서 그랬다.
특히 방심에 가까운 태도로 수술에 임했다가는 사고까지 칠 염려도 있었다.
실제로 두경부외과의 대가가 고작해야 플랩을 들다가, 그러니까 절개 후 수술 범위를 넓혀 가다가 안면신경을 마비시켰던 일도 있지 않나.
이전 수술로 인해 해부학적 변이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오……. 이 사람 태도 좋은데?’
[그러게요. 수혁이 또 습관처럼 약간 싸가지 없이 말했는데요.]
‘내가 그랬어?’
[이제 자각하지도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군요.]
수혁은 바루다의 비아냥거림을 뒤로하고 손 교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는 말이 고왔다면 가는 말도 고와야 하지 않겠나.
최소한의 도리는 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수혁이었다.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우연히 왔다가……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아뇨, 아뇨. 제가 나중에 정식으로 또 감사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럼…… 수술 때문에.”
“네네.”
손 교수는 그런 수혁을 향해 내내 공손한 태도를 취하다가, 밖으로 향했다.
그 말에 다들 시계를 돌아봤고 그제야 8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외래야 9시부터니 그리 급할 일은 없겠지만.
태화 의료원의 수술 시작 시각은 7시.
환자 확인해서 들어가고, 마취하고, 소독하고, 드랩하는 데 걸릴 시간을 감안해도 이제 슬슬 서둘러야 할 시간이란 얘기였다.
우르르르.
두경부 외과 교수들이 일단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영상의학과 교수들 또한 카페로 향했다.
본격적으로 판독이 필요한 영상이 넘어오려면 시간이 아직 남아서 그랬다.
덕분에 안에는 수혁과 조태진 둘이 덩그러니 남았다.
“아, 수혁아.”
“네.”
조태진은 새삼 이런 시간이 최근 들어 무척 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짬에 밀리고 일에 치이다 보니 사랑하는 동생을 볼 시간조차도 부족했던 것.
따지고 보면 억울해하거나 할 일은 아니긴 했다.
원래 조태진 그레이드가 제일 바쁜 법이라 그랬다.
슬슬 밑에 주니어 스텝이 들어올 시기이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학회 일이 무지막지하게 몰려올 시기이기도 해서 그랬다.
특히 태화처럼 큰 병원에 있다 보면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일을 던지는 경향이 있어서, 조태진은 실로 살인적인 업무량에 시달리고 있었다.
“카페를 가고 싶은데……. 내가 시간이 없어서……. 연구실에라도 갈래? 아, 시간 괜찮으면.”
“아, 네. 전 괜찮아요.”
그에 비해 수혁은 널널했다.
일단 센터장이 아빠다 보니 센터장 고유의 업무는 거의 넘어오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밑으로는 안대훈이 있어서 녀석이 이 센터를 돌건 안 돌건 간에 레지던트 관리할 것도 없었다.
진료야 바루다랑 함께 보면 쾌속 그 자체니 말할 것도 없었고.
임상 연구나 논문 작성 또한 뚝딱이었다.
다만 학회 잡일은 좀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 또한 은혜 갚기에 진심인 박국진 교수가 도맡아 해결해 주고 있어서 그랬다.
“좋아. 그럼 가자. 마침 환자 중에 과테말라를 왔다 갔다 하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원두를 주셨거든. 기가 막혀. 커피도 맛 차이가 이렇게 심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니까.”
“오……. 좋죠. 근데 무슨 얘기 하시려고요?”
“무슨 얘기는…… 그냥 근황이 궁금해서 그렇지. 나 요새 통…….”
“아, 그렇네. 대체 뭔 일이 있으셔서 계속 빠지세요?”
수혁도 얘기를 나누다 보니 최근 조태진을 거의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참이었다.
그러고 보니 뭔 일이 있어도 수혁이 있다고 하면 만사 제쳐 두고 올 사람인데 그랬다.
“아……. 학회 일 때문에 그렇지. 아……. 죽겠다. 죽겠어.”
“학회…… 일 많죠.”
“일단 앉아, 앉아.”
지금 보니 확실히 사람이 좀 지쳐 보였다.
젊은 시절 운동을 해 놔서 그런가, 늘 활력이 넘치는 느낌이었는데, 오늘은 그렇지가 않았다.
다크서클도 죽 내려앉아 있었고.
어떻게 보면 좀 아픈가 싶을 지경이었다.
“이거 봐라. 냄새 죽이지?”
“아, 네. 와……. 이건 뭐지?”
물론 조태진은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수혁이 앞에서 힘든 티를 내봤자 뭐 하겠는가.
어차피 학회 일이야 자기가 해야 할 일인데.
뭐가 되었건 조태진도 학회 내에서의 보직 욕심은 좀 있는 편이다 보니 알아서 가져온 일도 있었다.
수혁 아니라 누구 앞에서라도 지나치게 엄살 부리는 것은 좀 모양 빠지는 일이란 얘기였다.
“하아……. 살겠네. 이건 이상하게 속도 좀 덜 불편한 것 같은 느낌이야. 과테말라가 커피 산지로 유명하다고 하더니 진짜 그렇겠더라고.”
“네, 그렇네요. 오.”
수혁도 그런 조태진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애쓰는데요? 최대한 안 힘든 척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런갑다 해 주는 게 인지상정이겠지.’
[그렇습니까?]
‘어. 형이…… 안 그래 보여도 좀 마초라.’
[마초?]
‘그런 게 있어. 내 기억 더듬어 봐.’
[의학적인 겁니까?]
‘아니.’
[그럼 뭐.]
바루다야 그러거나 말거나 별 상관하지 않았지만.
수혁은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지 않나.
게다가 조태진은 이 세상에서 몇 안 되는, 수혁이 망설임 없이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호칭이야 형이라 부르고 있지만, 수혁은 그저 친구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배려를 해 주어야 할 일이었다.
‘근데 많이 힘들어 보이냐?’
[네. 턱밑까지 찼는데요? 수혁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시비 걸면 펑 터질 겁니다.]
‘조태진 교수님…… 화 거의 안 내는 사람인데?’
[지금은 화낼 것처럼 보여요.]
물론 배려라는 게 그저 모른 척해 주는 데에만 있지는 않지 않겠나.
수혁은 진지하게 어떻게 하면 도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바루다야 여전히 알 바 아니라 여기고 있었으나, 수혁은 그의 숙주였다.
그것도 하나뿐인.
게다가 조태진은 의사이지 않나.
의사를 돕는 방안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았다.
잡일, 연구 아니면 진료 아니겠나.
그중 잡일은 학회 일일 테니 넘어가야 했다.
‘뭔가 도울 일이…….’
[스캔하겠습니다.]
‘굿.’
[마침 카페인이 들어가고 있어서, 대화를 방해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연구를 도와?
이것도 선 넘는 일이었다.
간단한 논문이라면 뚝딱이라고 해도 좋을 시간에 써 버릴 수 있겠지만.
조태진에게 도움이 될 만한 논문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조태진은 대가가 되어 가고 있는 사람이지 않나.
아직 국제적인 명성까지는 없는 몸이었으나 국내 학회에서는 50세 미만 교수 중에서는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연구는 만만히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병동은 괜찮아요?”
“병동? 아유……. 우리야 뭐 늘 그렇지.”
“하긴, 혈종이 만만치가 않죠.”
하지만 진료라면 어떨까.
아무리 조태진이라고 해도 순수 진단 능력이라면 이제 수혁에게 한 수 접어 줘야 할 터였다.
물론 각 진단에 따른 항암 치료 레지맨이라면, 또 그에 따른 합병증 관리라면 맨날 그것만 들이파는 조태진이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단서를 종합하고 분석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수혁과 감히 맞수가 될 만한 사람은 이현종뿐이라 할 수 있었다.
이현종마저도 여러 분야에서 수혁에게 일인자 자리를 넘겨주고 있는 실정이다 보니 이쪽에서는 절대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터였다.
“어……. 아유. 그리고 이게…… 너한테 할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말씀해 보세요.”
“레지던트들……. 수준이 말이야. 4년제에서 3년제 되고 나서 진짜 좀 그래.”
“아…….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죠. 지금은 4년 차가 없으니까.”
“어, 그나마 걔 누구더라. 머리 없는 애.”
“대훈이요?”
“어어 그래. 걔가 치프로 돌면 진짜 편해. 걔는 잘하거든. 옛날 4년 차가 뭐냐, 거의 펠로우 같아. 든든해. 근데 나머지는…… 이게 주치의인지 치프인지 잘 모르겠다니까. 내가 잘 못 가르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진짜 그 1년이 큰 건가. 세세한 거 하나하나 내가 다 봐야 되니까 회진만 돌고 나면…….”
조태진의 말을 듣던 바루다가 옳거니 하고 나섰다.
[단순히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레지던트들 때문에 화가 났군요.]
‘아랫사람 때문에 화날 사람이 아닌데…… 난 딱히 불만 없는데, 요새 그렇게 애들이 못 하나?’
[저야 알 수 없죠. 일단 더 들어 보시죠.]
‘오케이.’
바루다의 조언에 수혁은 좀 더 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수혁과 조태진 사이이지 않나.
둘은 워낙에 돈독한 사이다 보니 애초에 흉금을 터놓고 얘기하는 편이었다.
단지 요새 만날 시간이 없었달 뿐, 마음의 거리는 조금도 멀어지지 않았다.
“애들이 그렇게 사고를 쳐요?”
“아휴……. 센터는 진짜 청정 지역이지. 거기 애들은 대훈이가 관리하잖아.”
“네? 대훈이가요?”
“몰랐어? 이상한 애들은 애초에 다 돌려. 다른 분과로 쭉 돌리더라고. 아직 센터는 필수 과정이 아니잖아. 안 돌아도 전공의 과정 수료하는 데 문제가 없어. 처음엔 나도 그게 불만이었는데 요새 돌아가는 꼴을 보면…… 차라리 그게 낫다니까.”
내과는 분과가 하도 많은 데다가 분과별로 난이도도 상이한 편이었다.
가령 혈액종양내과 병동과 알레르기내과 병동의 난이도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입원 환자 수부터 수십 배 차이가 났다.
그렇다 보니 자율에 맡기면 누구는 편한 곳만 돌고, 누구는 힘든 곳만 돌게 되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균등하게 돌아야 실력 있는 내과 의사가 될 것 아니겠나.
해서 몇몇 주요 분과는 최고 몇 달 이상 돌 것을 명시해 둔 바 있었다.
전문의 자격증의 무게는 보건복지부도 그렇지만 학회 차원에서도 지켜야만 하기에 그랬다.
“하여간……. 요새 애들 장난 아니야. 주 88시간이라서 일 끝나면 집에 가는데……. 아니, 환자가 안 좋으면 얘기를 해 주고 가야 될 거 아냐. 그냥 가. 대훈이가 있으면 그런 일이 없는데…….”
“허어……. 대훈이가…….”
“걔 잘 잡아라. 잘해 줘. 진짜 보배야. 아니면 하윤이라도. 걔가 아직 2년 차라서 그렇지, 걔도 보통 아니더라. 둘 중 하나만 있어도 훨씬 나아.”
“일단 대훈이 부를까요?”
“어? 걔를 왜.”
“혈종도 좀 관리해 달라고 해야죠.”
“아……. 그게…… 하긴. 걔가 너 말이라면 진짜 껌뻑 죽지.”
“그리고 애들 사고 칠 만한 케이스 있으면 말해 줘요. 제가 좀 볼게요.”
“아유……. 부담되잖아.”
“제 눈을 보세요. 부담되는 거 같아요?”
“아니…… 신나 보이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