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1화 조태진 돕기(은혜 갚기) (3)
모두가 그렇게 훈훈한 마음에 휩싸인 것은 아니었다.
노티하던 레지던트는 예외였다.
그는 다소 벙쪄 있었다.
‘이런 미친…… 그냥 대장암이 아니었다고?’
수혁의 말이 그의 어딘가를 찌르고 있었다.
의사라는 게 그리 만만한 길이 아니라고 하는 듯했다.
아마 그의 지망이 혈액종양내과라 더욱 그러는 것일 터였다.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이대로 쭉 가면 충분히 교수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방금 너무 수준 높은 설명과 추론 과정을 봐서 그런지, 자신감이 쭉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자, 이제 다음 환자 하죠. 숙지했죠?”
물론 수혁의 입장에서는 그리 높은 수준도 아니었다.
나름 흥미로운 케이스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단이 불가능해 보이는 건 아니지 않나.
아마 조태진이 혼자서 봤다고 해도, 며칠 정도 시행착오를 겪고 나면 충분히 제대로 된 진단을 내릴 수 있었을 터였다.
그 과정에서 환자의 상태가 더 악화될 수도 있고, 조태진이 더 지칠 수야 있었겠지만.
‘다음 케이스 내놔라, 이놈아.’
하여간 수혁은 도적 떼와 같은 심정으로 레지던트를 바라보았다.
레지던트는 그런 수혁의 눈,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 눈을 마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아, 네. 이어서 하겠습니다.”
여전히 무슨 얼굴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서둘러야 한다는 것만은 알겠더랬다.
‘별거 없고…….’
[루틴이고.]
‘합병증이 있긴 했는데 이미 훌륭하게 대처했고.’
[DNR…… 할 수 있는 게 없겠군요.]
해서 부리나케 노티를 이어 나갔다.
과연 혈종답게 루틴 항암 치료를 위해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확 안 좋아져서 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경우에는 수혁이 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이미 늦은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긴 했다.
아직 암과의 싸움에서 현대 의학은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다음은 72세 남자. 아직 원발 병변을 찾지 못한 상태로…….”
“음.”
“네?”
“아니, 계속해요.”
그러다 원발 병변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수혁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위로 치켜세우며, 의도치 않게 목소리를 냈다.
레지던트 때 같았으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아도 싼 상황이었지만.
지금의 수혁은 교수, 그것도 부센터장이었다.
관록에 힘입어 그저 목이 좀 불편했던 것 정도로 넘길 수 있었다.
“환자 좌측 엉치 통증 및 외측으로 뻗치는 방사통을 주소로 본원 정형외과 내원하였습니다. 내원해서 시행한 검사에서 근력은 정상이었습니다. 하지 직거상 검사(SLR, Straight Leg Raising Test)도 음성이었으나, 요추 5번, 척추 1번 피부 분절로 감각 저하 소견이 관찰되었습니다.”
“흐음.”
흥미롭다.
원발 병변은 모르겠는 상태에서 우선 뼈 주변 증상으로 내원했다라.
게다가 피부 분절의 감각 저하라면 그것은 감각 신경의 손상을 의미하지 않나.
‘뭐지?’
[아직은 전혀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더 들어 보자.’
[네, 그러려고 하는데 자꾸 소리를 내니까 레지던트가 멈추질 않습니까.]
‘이게 참기가 어려운데. 너무 흡족해서.’
[그…… 뭐, 이해는 갑니다. 이런 케이스가 흔하지 않죠. 과연 혈종입니다.]
혈종 중에서도 태화이지 않나.
이곳은 정말이지 국내에서 어려운 환자란 환자는 다 모아 놓은 곳이라고 보면 되었다.
물론 칠성이나 아선에도 일정 부분 나눠 가기는 하겠지만, 그것도 벌써 작년, 재작년의 얘기였다.
확실히 통합진료센터가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다시 압도적으로 차이를 벌리고 있었다.
이제는 빅3란 말도 좀 어색해졌을 지경이었다.
원탑은 태화, 그다음에 칠성과 아선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말초 혈액 검사에서는 딱히 이상 소견은 없었습니다. 다만 뼈의 활성도를 확인하기 위해 시행한 C-반응 단백질과 적혈구 침강 속도는 각각 2.71mg/dL, 23mm/h로 약간 상승하여 있었습니다.”
“그건 크게 의미가 있을 거 같지는 않은데.”
“네. 그…… 정형외과에서도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코멘트 없었습니다.”
“다른 검사는 뭐 했지?”
“MRI 시행했습니다.”
“MRI. 음. 좋은 검사지. 띄워 볼까요?”
“아, 네.”
일반적인 회진보다 벌써 좀 지연되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수혁이 와서 도리어 일이 늦어지고 있다는 얘기.
하지만 조태진은 말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까 보지 않았나.
확실히 이 동생은 천재였다.
‘이 환자는 진짜 골이 좀 아프거든…….’
뭔 암인지 알아야 치료를 할 것 아닌가.
분명 병변은 있는데, 원발 병변을 모르다 보니 종류를 특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더랬다.
물론 모든 검사가 다 된 것도 아니고, 좀 기다리다 보면 뭐라도 나오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골 아픈 것은 골 아픈 것이었다.
회진 돌려고 오다가 이 환자 있는 병실 문만 봐도 가슴이 좀 답답해질 지경이었다.
‘이것도 해결해 주면…… 그걸로 큰 도움이다, 수혁아.’
조태진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 사람은 신자라니까.’
그런 조태진을 보며 안대훈이 좀 오해를 하긴 했지만.
다행히 곧 영상이 떠서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게 되었다.
“여기 보시면 좌측 천골과 장골을 포함하는 종괴가 있습니다.”
“어, 거기 아닌 거 같은데.”
“아.”
“좀 더 굴려 봐. 그래, 거기. 거기가 종괴지. 음. 확실히 종괴처럼 보이네. 안쪽으로 괴사된 부위가 있고…… 1번, 2번 천골 신경공을 침범한 소견도 있어. 이래서 피부 분절에 감각이 좀 떨어졌었구나.”
게다가 레지던트가 실수를 좀 하는 바람에 아예 이목이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나무랄 만한 일은 아니긴 했다.
아직 2년 차이기도 하고.
안대훈이 똘똘하다고 선정한 아이도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영상의학과도 아닌데 영상을 딱딱 알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나.
“나이가 아까 몇 살이라고 했지?”
“72세입니다.”
“고령이네.”
“네.”
“고령에서…… 경계가 불분명한, 동시에 뼈를 녹이고 있는 병변을 보면 역시 전이암을 의심해야지. 아마 조태진 교수님도 그랬던 거 같은데…… 척추 전이가 흔한 암은 뭐가 있지?”
하지만 수혁은 살짝 실망했다.
누가 들으면 중대장도 아닌데 왜 자꾸 실망해요? 라고 묻고 싶겠지만.
설령 실제로 들었다 해도 묻고 싶어질 뿐, 실제로 물을 수는 없을 터였다.
수혁은 교수니까.
‘살짝 가르치고 넘어가야겠네.’
[좋은 일입니다. 최고의 의사는 최고의 교육자이기도 해야 하는 법이죠.]
하여간 질문이 떨어졌다.
“어…….”
예상했던 타이밍은 당연히 아니었다.
레지던트는 눈에 띄게 당황했고, 옆에 있던 안대훈은 엉덩이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나는 아니까 내게 물어 달라, 뭐 이런 뜻이었다.
수혁은 좀 기다리다가 이내 안대훈을 바라보았다.
“네가 말해 봐.”
“네. 남자인 것을 고려하면 역시 전립선암, 폐암, 신장암 또는 다발성 골수종 등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흉부 CT와 복부 CT, 그리고 PET CT를 찍어야 합니다.”
“좋아. 근데 이 환자는 원인 불명이라고 했으니까…… 이 검사에서 뭐가 나온 게 없는 모양인데. 어떻지?”
안대훈의 답은 정답을 넘어 거의 완벽한 수준이었다.
일부러 고령인 것만 언급했는데 거기에 남자인 것을 고려해 전립선암도 낑겨 넣었으니까.
확실히 안대훈은 잘 크고 있다는 증거였다.
수혁은 다소 안심한 얼굴로 다시 레지던트를 향해 물었다.
이건 환자에 대한 질문이었고, 주치의로서 당연히 알아야 하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이 환자는 조태진이 워낙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케이스이다 보니 싫어도 숙지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아, 네. 아까 그 골 병변 말고는 나온 게 없습니다.”
“PET에서도?”
“네.”
“흐음. 어디 봐 봐.”
“네.”
PET CT.
이게 나오고 나서 암을 놓치는 확률이 훅 떨어졌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아주 훌륭한 영상 검사 장치였다.
암의 특성인 급격한 에너지 소모를 고려해 만든 것이니만큼 아예 암을 진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라 더더욱 그랬다.
“여기 보시면…… 확실히 글루코스(당) 섭취량이 확 늘어 있습니다.”
“그렇네. 음. 근데 다른 데는 보이는 게 없구나.”
“네. 그렇습니다.”
“혹시 피 검사는 했나?”
“아, 네. 종양 표지자 검사에서 CA(Carcinoma, 암종) 19-9가 57U/ml로 상승했습니다.”
“CA 19-9라…….”
종양 표지자.
의사들이 암을 최대한 빨리 진단하고 싶은 마음에 만든 것이라고 보면 되었다.
영상 검사는 아무래도 좀 성가시지 않나.
비싸기도 하고.
물론 대한민국은 최빈도 암이라 할 수 있는 위암, 대장 내시경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내시경을 시행하고 있어서 사실 그리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아무 단서도 잡히지 않는 상황에서는 이것도 꽤 의미가 있었다.
“살짝 올라가 있기는 한데…….”
“어, 나도 그게 좀 이상하기는 해. 근데 이런 형태는 확실히…… 암에 가깝지.”
중얼거리고 있으려니 조태진이 끼어들었다.
뭔가 석연찮다는 얼굴을 하고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딱 골 전이만 있는 암이라니.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지 않나.
물론 혈액암의 경우에는 드물게 이런 형태를 띠긴 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드물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제 전과 받으신 거네요?”
“어. 내가 이 환자 때문에 어제만 여기 4번인가 들락거렸어. 검사 검토하고 뭐 그러느라.”
“근데 단서는 없고.”
“그렇지.”
“이 환자는…… 저도 지금 당장은 모르겠네요. 일단 회진을 돌면서 봐야 할 거 같아요. 다른 환자 노티할 거 있어요?”
늘 한 방에 뭐가 딱 나오면 좋겠지만.
이번만큼은 수혁도 별수 없었다.
주어진 단서가 너무 부족하지 않나.
이렇게 되면 해결책은 단 하나뿐이었다.
직접 환자를 보는 것.
조태진도 주치의도 환자를 직접 보기야 했을 테지만, 수혁은 바루다와 함께다 보니 아무래도 얻을 수 있는 정보가 훨씬 많지 않겠나.
마음이 급해진 수혁은 레지던트를 돌아보았다.
“어……. 루틴 환자 하나 있습니다.”
“간밤에 이벤트 없었고?”
“네.”
“그럼 돌면서 얘기하죠.”
“아, 네.”
그러곤 일단 일어나기를 종용했다.
실제로 슬슬 그럴 시간이 되기는 해서 조태진과 주치의 그리고 안대훈에 이어 담당 간호사까지 군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더 늦어지면 환자들이 왜 회진 안 오냐고 할 참인지라 담당 간호사는 아예 안도의 한숨까지 쉬었다.
아픈 사람들이라 가뜩이나 예민한데, 이 병동은 암이다 보니 그 정도가 장난이 아니어서 그랬다.
“네. 좋습니다. 지금 부작용도 거의 없으신 편이고. 이대로면 문제없을 거예요. 우리 힘내서 달려 보죠. 아시죠? 저 혼자 힘내면 소용없는 거.”
“아이고, 네. 교수님. 힘내야죠. 그나마 구토가 안 나와서 다행이에요.”
“네네. 잘 드셔야 해요. 그래야 암을 이길 수 있어요.”
하여간 그렇게 시작된 회진은 생각보다 꽤 훈훈한 편이었다.
조태진이 좀 푸근한 인상인 데다가, 암 환자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보니 가능한 현상이었다.
“다음에는 이번처럼 늦게 오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집에 찾아가요?”
“하하. 죄송합니다.”
“그리고 민간요법 그만하시고요. 그러다 탈 나요.”
“네네.”
때로는 위로하고, 때로는 어르고.
하여간 이상적인 혈종 의사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얼마나 남았지?’
[이런 태도는 좀 보고 배워요.]
‘배웠어.’
[퍽이나…….]
수혁은 그러거나 말거나 아까 그 환자가 있는 병실만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