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9화 압도 (4)
신은 죽었다.
신중섭은 니체의 격언을 떠올렸다.
무슨 철학적 사유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 이 상황이 신이 있다면, 그리고 그 신이 선의를 가지고 있다면 절대로 벌어져서는 안 될 것 같은 그런 종류의 것이라 그랬다.
“신중섭 선생님?”
표정에 그의 절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일반인조차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수혁이야 바루다를 탑재하고 있으니 알아보기가 더 쉬웠다.
물론 알아본다고 해서 꼭 배려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나.
게다가 수혁은 이미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버렸다.
‘이렇게 배워야 오래가는 법이지.’
[네. 수혁도 이제 많이 늘었어요. 완연한 교수입니다.]
‘어허. 좋은 교수라고 해야지.’
[하하. 이거야 원. 제가 ‘좋은’을 빼먹었나요?]
깡통이랑 죽이 딱 맞아 가지고 스스로를 좋은 교수라 자부하고만 있었다.
지금 신중섭이 짓고 있는 표정이 안국태에게 침몰당하던 레지던트들과 흡사하다는 사실 따위는 눈치챌 생각도 없었다.
“그…… 음. 흡수 장애…… 흡수 장애가 적당할 거 같습니다.”
물론 안국태와 수혁의 차이는 분명했다.
안국태류 질문의 목적은 그저 상대를 괴롭히는 데 있지 않던가.
그에 반해 수혁의 질문은 상대를 괴롭게 하는 동시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조차 그랬다.
신중섭은 드디어 스스로의 힘으로, 뒤늦게나마 흡수 장애로의 추론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좋습니다. 흡수 장애. 그렇다면 장 질환이겠죠.”
“네, 맞습니다.”
“장 질환을 감별하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검사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
신중섭은 본능적으로 입원해서 뭐 했는지를 떠올렸다.
이 환자에 대해서는 피검사, 소변 검사를 재탕했다.
‘아니, 아냐. 이런 게 아냐.’
혈액 검사로 이미 장 질환까지 왔다.
그중에서도 흡수 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수준의 장 질환.
여기서 또 혈액 검사를 얘기한다?
멍청한.
아니, 무성의한 답변이라는 소리만 들을 게 뻔했다.
‘우리는…… CT에 복부 초음파를 했어.’
복부 초음파는 왜 했지?
신중섭은 돌연 교수님을 찾았다.
이수혁이 아니라 본인의 담당 교수를 찾았다.
보이지 않았다.
치사한 놈이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 버린 탓이었다.
‘아니…… 진짜 왜 했어.’
처음엔 아니, 케이스 발표 준비를 마칠 때까지도 이 케이스의 흐름이 딱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더랬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은 물론 아니었다.
이런저런 시행착오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검사를 긁다 보니 답이 나왔고, 이제 그에 맞춘 치료를 준비 중에 있었다.
하나 수혁이 잘못 끼워졌던 첫 단추를 다시 끼워 주자 모든 것이 오류투성이였다.
특히 이 복부 초음파는 좀 뜬금이 없었다.
‘이게 아냐. 그럼…….’
신중섭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레지던트들의 머리가 그러했다.
장강명은 강의실 내에서 위잉 소리가 난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강의실의 열기는 기이할 정도로 대단해지고 있었다.
우연일까?
그런 것은 아닐 터였다.
‘재밌네. 나도 이런 게 얼마 만인지…….’
의대를 올 때의 마음가짐은 다들 천차만별일 터였다.
애초에 의사가 어떤 직업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지원하는 사람이 태반이지 않나.
드라마에서 본, 손 한번 휘두르면 사람 살리는 의사.
또는 매일 밤 양주를 끼적거릴 수 있는 의사 등을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내과 의사를 택할 땐 어떨까.
‘다들…… 압도적인 지식과 경험, 그리고 그 둘을 적절히 종합해 내서 환자를 치료하는…… 그래, 지금 눈앞에 있는 이수혁 같은 의사를 떠올리지.’
공부도 공부지만 실습이야말로 의대 생활의 꽃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의대생은 메이저 과들, 특히 그중에서도 내과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마저도 진짜 내과 의사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기 마련이지만.
적어도 그 시기 이후 품게 되는 환상은, 내과 의사들이 품는 환상과 다르지 않았다.
장강명은 아니,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환상 속 내과 의사를 마주하고 있었다.
“내시경…… 내시경입니다.”
“좋아. 내시경에서 어떤 소견을 기대하면서 처방을 내리죠?”
수혁은 점점 교정되어 가고 있는 신중섭의 추론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답변과 함께 날아드는 질문이라니.
원래 같으면 숨이 턱 하고 막혔어야 정상일 터였다.
응당 발표자라면 본인이 지금껏 했던 발표에 기반한 답을 기계적으로 내놔야 정상일 터였다.
‘그래, 어떤 소견을 기대해야 하지?’
한데 이상했다.
신중섭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다.
도리어 희열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무언가 배운다는 기분.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한 발짝 나간다는 기분.
고양감이라고 해야 할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 일었다.
“흡수 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장 질환의 소견을 기대합니다. 즉, 점막이 탈락되어 있거나…… 섬유성 변화가 있어야 할 거 같습니다.”
해서 신중섭은 케이스 발표와는 동떨어진 답을 했다.
사실 증례 토의에서 이런 답변은 틀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강의실 내에 있던 어느 누구도 그따위 소리는 꺼내지 못했다.
좌장인 장강명도 그랬다.
이미 케이스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수혁이 내놓은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남들이 볼 때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이것이야말로 내과 의사들에게 있어서는 클럽이요, 축제였다.
‘그렇지, 그래야지.’
오히려 머릿속으로 신중섭이 말한 소견을 떠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장강명은 내시경의 스페셜리스트인만큼 아주 적나라하게 해당 소견을 그려 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소견이 아니라 질환 중에서는 어떤 것을 기대합니까? 환자의 나이, 성별을 고려하면요.”
“아.”
이제 슬슬 끝이겠지 싶었다.
축제의 끝자락이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때 수혁이 변주를 이끌었다.
감별해야 할 질환을 짚어 주었다.
그야말로 금과옥조와도 같은 시간이었다.
‘이 괴물 새끼.’
강의실에 몰래 잠입해 있던 우창윤은 생각했다.
확실히 이수혁은 걸물이라고.
사실 첫날 첫 시간은 버리는 시간 아니던가.
서울에서 열리는 춘계도 아니고, 지방에서 열리는 추계이니만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아직 도착하지도 못한 병원들이 절반은 되었다.
때문에 놓쳐도 되는 세션으로 채워 놓았다.
이 강의실처럼 레지던트들의 집담회와 같은 세션들로.
‘추계 통틀어서…… 임상적으로는 지금 이 시간이 제일 유익할 거 같은데…….’
지식과 경험은 뒤로하고서라도, 발표력부터가 후달리는 애들 아닌가.
같은 내용을 말해도 들을 것이 없다고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한데 수혁의 질문이.
그 질문 뭉치가 이 시간을 완전히 변모시키고 있었다.
‘전공의 연수 강좌…… 아직 이수혁 교수 짬이 그 정도는 아니긴 한데…….’
학술 이사이지 않나.
원래 병원 보직 맡으면 학회 내의 이런저런 자리는 고사하거나 맡더라도 일이 적은 자리를 자처하게 되기 마련인데, 우창윤은 욕심이 많은 인간이었다.
아직도 자리를 쥐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일은 다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음엔 이수혁 교수한테 맡겨 볼까. 음. 근데 이게 또 고양이한테 생선 맡기는 느낌이 될 거 같기도 하고…….’
지금도 이수혁이라는 강사 적임자를 찾았다.
살짝 불안한 강사이기는 했다.
전공의 연수 강좌 가서 통합진료센터나 통합진료학회 홍보할 것이 뻔했으니까.
본인 학회가 아닌, 다른 자리에서도 사리사욕을 채울 수 있는 놈들이 바로 저들 부자였으니까.
“음……. 일단 크론과 궤양성 대장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결핵도 있을 수 있습니다.”
“좋아, 좋아요. 그 셋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겠죠. 환자의 히스토리상 하루 이틀 된 것이 아니라 적어도 수개월 이상 지속되었으니까요.”
“네.”
“허나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면…….”
우창윤 교수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속으로 망상을 돌리는 사이 대화는 지속되었다.
신중섭은 이제 자신이 발표 중이라는 사실도 얼마간 잊었다.
그저 배움의 시간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수혁도 더 이상 문책하는 투를 사용하지 않았다.
지식과 경험을 풀어 주기 시작한 이상, 상대는 발표자가 아니라 학생일 뿐이었다.
“환자의 증상. 소화기 증상은 설사뿐입니다. 더 자세한 문진을 했다면 또 모릅니다. 가령 어떤 음식을 먹을 때 호전이 되는지, 또는 악화가 되는지. 이런 질문이 장 질환에 의한 흡수 장애를 고려했다면 아주 커다란 도움이 되겠죠.”
“아……. 맞습니다. 아, 그렇네요.”
해서 빼먹은 점을 우선 짚어 주었다.
물론 이 케이스의 흐름에서는 절대 불가능했을 질문이기는 했다.
애초에 뭘 의심해서 검사를 낸 게 아니라 검사를 내다 보니 결과가 나왔고, 그 결과를 무지성을 따라가다 얻어걸리는 식으로 진단을 했기에 그랬다.
결과론적으로 보면야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좀 늦기는 했어도 진단은 했으니까.
하지만 이 태도가 지속될 경우, 신중섭은 결코 좋은 내과 의사가 되지 못할 터였다.
“추론이 이렇게 중요한 겁니다. 환자를 보면 늘…… 어떤 질환일지부터 치열하게 의심을 해 봐야 합니다. 그래야 결과를 봤을 때 더 빨리 진단에 다가설 수 있어요. 다시 케이스로 돌아와서…… 내시경 소견이 어땠다고 했죠?”
“깨끗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니, 아니죠. 육안으로 볼 때 깨끗했다고 해야 합니다. 정말로 환자의 장에 아무 이상도 없다고 생각합니까?”
“아, 아닙니다. 교수님.”
“그래요. 그럼 말을 바로 해야죠.”
“아…….”
“하여간 육안으로 볼 때 깨끗합니다. 그럼 뭘 의심해야 합니까?”
처음 케이스를 볼 때는 별생각이 없던 내시경 소견이었다.
그냥 그런갑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크론, 궤양성 대장염 또는 결핵성 장 질환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견이 전혀 그쪽이 아니었다.
‘셋 다 아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흡수 장애가 배제된 것은 아니야. 그렇다면…… 장이 깨끗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흡수 장애가…… 또는 영양분이 소실되는…… 그럼…….’
신중섭은 잠시 고뇌했다.
이제야말로 정답에 닿을 때가 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해서 신중섭은 처음부터 알고 있던, 실제로는 얻어걸린 답을 말했다.
“그…… 장 림프관 확장증……입니다.”
“사실 이번 질문은 함정이었습니다.”
“네?”
“예상과 전혀 다른 소견이 나왔죠. 그렇다는 건 염증성 장 질환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접근을 달리해야 해요. CT를 찍는 것이 좋습니다. 그 뒷단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봐야겠죠.”
“어…….”
신중섭은 CT에서 별 소견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무척 당황했다.
레지던트들도 그랬다.
‘잘하네, 진짜.’
흥미진진한 것은 교수들뿐이었다.
장강명, 우창윤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