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774화 (774/1,303)

774화 발표 (4)

짝짝짝짝짝.

정용기는 물결치는 박수 세례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 그래. 이 정도 해 주면…… 다 퍼 줄 수 있지. 아니, 다 퍼 줘야지.’

솔직히 이현종이 이런저런 거 얘기할 때는 살짝 기분이 나쁘기도 했더랬다.

아무리 이현종이 자신보다 연배도 위고, 또 업적도 위라고는 하지만.

상대적인 것일 뿐, 자신도 꽤 높은 사람 아닌가.

기분이 나쁠랑 말랑 했는데 이걸 보니까 속이 싹 시원해졌다.

“네, 정말 훌륭한 발표 잘 들었습니다. 앞으로 의료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그런 발표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또 그 욕심을 부릴 줄 아는, 즉 그에 맞춰 노력해 온 사람들이 성공하는 세상이다 보니, 학회장 또한 욕심이 엄청 많았다.

그래서 이내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 영어로 해 달라고 할걸.’

얼마 전부터 대세에 맞춰 내과 학회 또한 정식 명칭을 ‘국제 학회’로 바꾸지 않았나.

학회 공식 언어로 영어로 지정해 두었더랬다.

강의도 영어로 해 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교수들이 지랄 말라고 해서 관두긴 했지만.

‘이런 강의는 어? 녹화해서 어? 전 세계에 나갔어야 되는데 어?’

이 명강의를 보고 나니 아쉬움이 차올랐다.

숨을 쉬기 힘들 만큼.

“이번 강의의 토대가 된 논문은 우리 대한 내과 학회지에 수록될 예정입니다. 아무래도 발표 내용보다는 좀 더 구체적이고요, 또 앞으로의 연구 방향도 자세하게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명명백백하게 논문으로 나와 있는 만큼…… 오늘 발표에서 영감 얻으신 여러 교수님들, 논문 쓰실 때 반드시 인용 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논문은 100% 영문과 한글 번역본 두 개 모두 수록될 예정입니다.”

숨이 찼지만 해야 할 말까지 놓치진 않았다.

사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좌장을 맡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나.

학회 홍보하기에 딱 적당한 시간이었다.

“자, 그럼 질문 있으십니까? 질문받도록 하겠습니다.”

정용기는 신나게 학회지 얘기를 하고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섣불리 손을 들고 나서는 이는, 당연하겠지만 없었다.

지금 질문거리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 정신없는 새끼 아니겠나.

제대로 된 의학자라면 노화와 그 결과에 대한 개선이라는, 현대 의학이 당면한 가장 큰 과제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생각해야 했다.

단지 논문을 위한 논문이 아니라, 정말 세상을 변화시키는 논문을 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아, 네. 마이크 가져다드리세요.”

그렇다고 아예 아무도 나서지 않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 손을 들었다.

좌장도 아는 얼굴이었다.

‘노인의학회 회장이지……?’

유관학회장.

정용기도 유관학회장을 해 보긴 했지만.

내과학회장이 되고 보니 저놈의 유관학회가 너무 많은 게 탈이었다.

비록 의료계에서는 제일 큰 학회가 내과라지만.

그래 봐야 회원 수가 몇만 되지도 않지 않나.

그중 교수들만 계산하면 몇천 선에서 컷이었다.

근데 그놈의 학회는 왜 이렇게 많은지.

인력도 분산되고, 발표도 분산되고, 논문도 분산되어서 점점 전체적인 영향력은 흩어져만 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네, 훌륭한 발표 정말 잘 들었습니다. 저는 전남대학교 병원 이순찬입니다. 몇 가지 질문이 있는데, 시간이 괜찮을까요? 좌장님?”

생각 같아서는 유관학회 저거 다 없애 버리고 싶었다.

세상에 왜 멀쩡히 있는 분과 말고 자꾸 다른 학회를 만드느냔 말이다.

하지만 노인의학회는 약간 성격이 다르긴 했다.

실제로 필요하달까.

생각보다 노인은 그저 늙은 성인이라고만 접근하기엔 무리가 있어서 그랬다.

“아, 네. 하시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용기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혁 교수가 언짢아하면 안 되는데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그건 기우였다.

‘와라.’

[덤벼랏!]

수혁은 이러한 문답을 즐기는 사람이니까.

“자, 그럼……. 일단 노인에 대해 관심 주신 것에 대해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사실 제가 저 식이 행태에 대한 논문을 쓴 사람인데요.”

“아, 그러셨군요. 이순찬 교수님. 네네.”

“질문이라고 했지만 사실 상의라고 보셔도 무방할 거 같습니다. 아무튼, 그…… 저희도 저거 엄청 개선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근데 식이에 대한 개선이 정말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음.”

날카로운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꽤 의미 있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너,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건데.

뭐 이런 류의 질문이지 않나.

확실히 문제 제기는 쉬워도, 문제 해결은 늘 어려운 법이라 수혁조차도 바로 답하긴 어려웠다.

[역으로 질문하시죠. 시간 벌면 머리 굴려 보겠습니다.]

‘오케이.’

다행이라면, 수혁은 둘이라는 점이었다.

“그렇군요. 혹시 노인의학회에서는 어떤 것을 해 왔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수혁 본체는 교활한 면도 있었다.

상대를 괴롭게 하는 질문을 아주 잘 던진다고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진중해 보여서 그러는 너는 뭐 했냐 인마라는 뉘앙스보다는, ‘진짜로 궁금합니다 선생님’과 같은 느낌이 일었다.

“아……. 네.”

이순찬은 진지한 얼굴로 답하기 시작했다.

“우선 캠페인을 진행했었습니다. 근데 이게 참. 아무도 안 보고…… 별로 도움이 안 되었습니다. 또 각 교수님들이나 선생님들 진료 시에 설명할 수 있도록 전단지도 만들었는데…… 아시잖습니까. 외래 바쁜 거. 그런 게 잘 추가가 안 되어서.”

“네, 그 두 가지입니까?”

“네.”

“혹시 정부 차원에서 캠페인을 주도하도록…… 하실 생각은 없으셨나요?”

“아, 당연히 얘기는 했었죠. 근데…….”

이순찬은 당시 일을 떠올렸다.

보건복지부의 서기관과의 일이었다.

-교수님, 저희 예산은 제한되어 있어요. 이건 별로 중요한 거 같지 않은데요.

원래 교수들과 서기관 그러니까 4급 공무원과의 관계는 철저히 갑을 관계인 법이었다.

나이 많고 경력 많은 교수는 을이고, 공무원은 갑이었다.

돈을 쓰는 사람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단순한 보복부 측 사람이 아니라, 심평원과 연관된 사람이면 돈만 아니라 칼도 휘두를 수 있었다.

“단칼에 거절당했습니다.”

싫다고 하는데 더 붙잡고 얘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근거로 든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단지 근력 저하?”

“아……. 식이의 문제 때문에 근육 감소가 더 가속화된다. 이런 논리로 접근했습니다.”

“거기에 치매를 붙이면 어떻게 될까요? 현재 의료 정책에서 치매는 주요 질환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아…….”

“식이 개선을 통해 치매 예방을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캠페인을 하게 되면 정부도 그렇고 환자도 관심을 가질 겁니다.”

“아.”

이순찬 교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확실히 치매를 연관시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의사뿐 아니라 환자들도 치매는 무서워하니까.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병이다 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아, 이거…… 이건.”

그것만으로도 충격을 받아 헤매기 시작한 이순찬 교수를 보며, 수혁은 방금 바루다가 말한 것을 떠올렸다.

‘제품?’

[네. 노인 단백질 섭취를 용이하게 하는 제품 개발입니다.]

‘제품 개발이라…… 어떤?’

[한때 수혁이 운동하면서 먹었던 보충제 기억나십니까.]

‘나는 그거 먹으면서 살만 쪘는데.’

[사실상 운동을 거의 안 했으니까요. 하여간 그 성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먹기 힘들었습니까?]

보충제.

가루를 타 먹는 형태도 있었지만.

애초에 우유처럼 나오는 형태의 제품들도 있었다.

물론 노인을 고려한 제품은 전혀 아니었다.

그저 운동하는 남자 성인을 위한 제품이 대부분이었다.

‘그건 여기서 말하지 말자.’

[네?]

‘이미 충분히 답변이 됐어.’

[잘난 척을 안 한다고요? 노인을 위한 단백질 보충 음료. 이거 좋은데?]

‘어, 좋아. 너무 좋아. 지나치게 좋아.’

그걸 노인 타깃으로 만든다?

그러면서 동시에 저 캠페인이 돌아간다?

‘이건 돈이 된다. 센터를 아예 병원처럼 키울 수 있어.’

[아하. 아. 그렇군요. 오……. 역시 간교합니다.]

‘간교하다는 말은 칭찬으로 잘 안 쓰는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근데 지금은 칭찬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기분이 어떻죠?]

‘썩 좋지는 않아.’

[뭐, 됐습니다.]

‘이 새끼가.’

[아무튼, 그렇군요. 돈이 되겠어요. 그걸 센터에 부으면, 대박 나겠군요.]

바루다도 동의하는 바였다.

돈이 된다.

이건 돈이 된다.

그러면서도 좋은 일이었다.

확실히 노인에게 있어 단백질 섭취를 독려하는 것은, 그 사람의 생에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

센터, 즉 태화의 도움을 받아 개발하게 된다면 어중간한 제품이 나올 리도 없었다.

누가 뭐래도 태화는 세계 굴지의 기업이니 그럴 수밖에.

“자, 그럼……. 시간이 얼추 다 된 거 같습니다. 제 발표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이순찬의 질문에 용기를 얻은 몇몇이 손을 들었지만.

수혁은 이미 발표가 아니라 그다음 스텝을, 그러니까 제품을 고민하고 있었다.

질문을 들어 봐야 건성으로 답할 것 같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시간도 지난 다음이었다.

“이야아, 우리 수혁이!”

“역시 어? 최고야. 넌 인마 뭐 해! 우리 수혁이 환영 안 하고!”

개선장군처럼 자리로 돌아갔다.

신현태와 이현종이 여느 때처럼 부산을 떨었다.

“아, 네네. 이수혁 교수님. 발표 잘 들었습니다.”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그럼 어떻게…….”

“두 손 들고 만세라고 해!”

“그건…….”

“어? 영상?”

“마, 만세……!”

오성흠도 이현종 때문에 두 손을 들었다.

“저기, 아직 세션 안 끝났습니다.”

“희대의 발표가 끝났어!”

“그…….”

“잠깐 시간 줘.”

“네.”

보다 못한 정용기가 한마디 했다가 깨갱 했다.

괜찮았다.

다들 여운에 잠겨 있었으니까.

머릿속으로 여전히 수혁이 던진 의제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분위기 좋아. 우리 센터 미어터지겠다.’

‘그럴까요?’

‘당연하지. 네가 저기 저번 세션에서 또 한 건 했다며. 안대훈이가 그러는데 벌써 많이들 물어본대. 3년 차들이.’

‘대훈이랑 그런 얘기도 하세요?’

‘나는 걔 펠로우 0년 차라고 생각해. 그렇잖아.’

‘아, 하긴 뭐. 걔는 이미 가족이라고 봐야죠.’

신현태는 눈치를 보는 사람이다 보니 입을 다물었지만.

수혁과 이현종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발표자라 맨 앞에 앉아 있음에도 그랬다.

솔직히 아주 거슬리지는 않아도, 주의 깊게 보면 쟤들은 딴짓하는구나 싶을 정도는 되었다.

‘그래 뭐……. 논문이랑 발표만 계속해 주시면, 확성기 들고 와도 된다.’

그러나 정용기는 모른 척하기로 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통합진료센터…… 나도 좀 밀어줘야겠네.’

아예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이 들었다.

발표를 직관하고 나니 그럴 수밖에 없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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