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5화 점심시간 (1)
-아아, 지금 하면 되나?
-네, 지금 아마 방송 나가고 있을 텐데요?
-아.
2번째 세션이 끝나고, 본래대로라면 런천 미팅을 위해 가장 큰 강의장에 있어야 할 학회장 정용기는 지금 호텔 컨시어지에 와 있었다.
이현종의 부탁을 이행하기 위함이었다.
툭.
이런 걸 언제 해 봤어야 할 텐데.
학회장이라고 해 봐야 따지고 보면 그냥 교수 아닌가.
아니, 교수다 보니 교수 업무 외에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교수님 이제 말씀하시면 된다니까요?
-아아.
-지금 계속…….
덕분에 학회장에 있던 모두는 무의미한 만담을 강제로 들어야만 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마이크 두드리는 소리는 덤이었다.
-학회장 정용기입니다. 각 병원 3년 차 및 군의관, 공보의 3년 차는 금일 병원장 또는 과장과의 모임이 있을 예정입니다. 내과 수련 방향 및 질 향상을 위한 간담회이니만큼 반드시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여간 정용기는 이현종이 적어 둔 대사를 읊었다.
핑계는 이현종이 만든 게 아니라 신현태와 조태진 그리고 안대훈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거라 꽤 그럴싸했다.
-그냥 통합진료센터 가면 된다고 하면 안 돼?
이현종이 했던 핑계 아니, 명분에 비하면 그야말로 천상계에 있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학회장이 만만한 자리가 아니다 보니, 병원 내 보직은 다 내려놓았더랬다.
그러니까 병원장도 내과 과장도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래도 내가 제일 높지 뭐.’
그럼 뭐 하나.
병원장은 몰라도 내과 과장은 어차피 돌아가면서 하는 자리인데.
하얀거탑만 본 사람들은 아, 과장이 뭔가 대단한 자리인가 보다 싶겠지만.
그건 일본이나 그렇고, 대한민국에서는 별거 아닌 자리였다.
물론 과장을 했냐, 못 했냐는 앞으로의 커리어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겠지만.
하여간 정용기쯤 되면 과장 하나 짬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교수님?”
“어어. 우리 병원은 내가 볼게.”
“네? 아니……. 점심에 상임이사회 있는 거 아니에요?”
“미뤘어. 내일로.”
“어…….”
“가 봐. 가서 사람들 만나고 해. 여기는 내가 볼게.”
“아, 네.”
해서 정용기는 과장을 보내고, 방 안에 들어섰다.
3년 차 8명과 군의관 3년 차 5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13명……. 음. 이 중에서 소화기랑 순환기 픽스된 애가 4명. 그럼 9명이 대상인가?’
9명이라.
적은 수는 아니었다.
이 중에 하나라도 이수혁, 이현종의 마음에 차서 거기 가게 되면 보은이 될 텐데.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둘은 딱히 그런 기대를 하고 있진 않았다.
“최소 컷을 안대훈으로 할까요?”
일단 수혁은 정신이 나간 사람이었다.
세상에 안대훈이라니?
수혁 옆에 있어서 그렇지, 안대훈만 해도 1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보석이었다.
교수 짬밥을 꽤나 먹은, 그중에서도 티칭 마인드가 강해서 애들을 잘 살펴 온 이현종은 그러한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다.
‘하긴, 내 아들은 천재니까.’
수혁이 틀렸다, 이 말이었다.
물론 그래도 괜찮았다.
아들이니까.
천재니까.
해서 이현종은 나무라는 대신 껄껄 웃었다.
“안대훈으로 컷 하면 우리 한 명밖에 못 뽑아요, 우리 아들.”
“그래요? 대훈이 정도 되는 사람도 없을까요?”
“사람 앞에 두고 ‘정도 되는 사람도’라는 말은 실례예요, 우리 아들.”
“그런가?”
그런가는 무슨, 얼어 뒤질 놈의 그런가란 생각도 들었지만.
하여간 이현종은 후후 웃고는, 옆에 있던 안대훈을 돌아보았다.
살짝 기분 나쁠 만한 발언이라고 생각해서였는데 안대훈은 그저 수혁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언제나처럼 귓불까지 벌게진 채였다.
‘그래…….’
왜 내 주변엔 다 또라이 같은 애들뿐일까?
이현종은 감히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한다?”
아무리 봐도 수혁은 제대로 된 의견을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신현태와 조태진을 돌아보면서였다.
“일단…… 볼 수 있는 게 성적이죠, 뭐.”
“성적?”
다행히 신현태는 다분히 상식적인 사람이다 보니, 제대로 된 얘기를 해 왔다.
“네. 전공의 연수 강좌 후에 시험 보잖아요.”
“아, 전공의 수련 평가?”
“네. 그거 1등 한 애들로 커트라인…… 아, 근데 그러면 늦을 텐데. 11월에 보잖아.”
“작년 성적으로 줄 세울까?”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려는 찰나 수혁이 끼어들었다.
손을 들고서였다.
“어, 수혁아.”
“근데 그 시험이 변별력이 있을까요?”
“응?”
“너무 쉽잖아요. 저 하나도 틀려 본 적이 없는데. 대훈이도 기껏해야 하나 틀릴까 말까?”
“아, 그러니까 수혁아. 너네 둘은 비교 대상으로 두면 안 된다니까?”
역시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이현종과 신현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조태진이 나섰다.
“자자. 수혁이는 형이랑 나가서 아이스크림 먹자. 여기 유명한 집 있대.”
“네? 아니, 제가 무슨.”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수혁은 꼬실 수 없는 물건이지만.
바루다는 꼬실 수 있는 물건이어서 다행이었다.
‘아니, 너는…….’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이 새끼 이거.’
[아이스크림…….]
이미 정신이 나가 버린 놈 때문에 수혁은 하릴없이 조태진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그렇게 대화는 재개되었다.
“어디까지 했더라?”
“성적으로 줄 세운다고.”
“아, 근데 그거 대외비 아냐?”
“뭐 상관없죠. 어차피 학회장이 우리 편인데.”
“하긴. 근데 그거…… 수혁이 말에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성적만으로는 알 수 없는 그런 게 있단 말이지.”
“그야 그렇죠. 그리고 아마…… 진짜 우수한 애들은 지들이 빼돌리겠지. 칠성이고 아선이고. 안 그래요? 우리 쪽에 보냈다가 우리 사람 되면 어째.”
“아, 그렇네.”
이현종의 얼굴에 수심이 찼다.
생각해 보니, 라이벌이지 않나.
제일 우수한 놈은 숨겨 둘 거 같았다.
“이럴 게 아니라……. 수혁이 다시 불러.”
“네?”
“수혁이가…… 사람 잘 보잖아. 그 눈알 약간 돌아갈 때. 그때 막 사람 싹 다 기억해 내고, 어? 알잖아.”
“아…… 알지.”
무서운 얘기였다.
신현태는 외면하고 싶은, 그러나 조태진은 너무 좋아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기도 했다.
수혁은 확실히 신기 같은 게 있을 때가 있었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걸 정말로 아는지 모르는지를 귀신같이 알았다.
‘아니, 귀신이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하지 말자…….’
신현태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면접을 보자고?”
“면접까지 갈 것도 없어. 그냥 가서 질문 몇 개 던지고 반응 보자고.”
“아……. 그렇게 딱 짚어서…… 근데 우수한 애가 누군지 알면 뭐 하나?”
신현태의 말에 안대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기이한 열기를 품고서였다.
“어, 왜. 왜 그러나…….”
“포교…… 아니, 꼬시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저 잘합니다.”
“어…….”
그런가?
‘아니지. 잘하긴 하지.’
안대훈이 어떤 인물인가.
현재 수혁교의 기틀을 닦은 놈이었다.
물론 신현태는 교니 뭐니 하는 것들은 싫어했지만.
덕분에 수혁의 위치가 공고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심지어 다른 병원에도 어느 정도 세력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그럼 네가…… 나랑 같이하자.”
그렇다고 포교 운운하는 놈만 떨렁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랬다간 어떤 참사가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니까.
“어, 왔다.”
좀 기다리자 수혁이 돌아왔다.
아이스크림을 할짝거리면서였다.
나갈 땐 떨떠름하더니만 맛있는 모양이었다.
‘괜찮네?’
[그렇다니까요. 아이스크림은 언제나 좋지.]
‘어……. 근데 이러다 살찌면 어떡하지.’
[걱정 마십쇼. 제가 다 계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수혁의 체중은 최근 1년간 전혀 변화가 없어요. 다 제 덕분인 줄로만 알고 계십쇼.]
‘그래. 그럼 마음 놓고 먹어야지.’
뭔가 더 열심히 먹기 시작한다 싶을 때, 이현종이 수혁에게 팔짱을 끼고는 밖으로 나갔다.
신현태, 안대훈도 뒤를 따랐다.
조태진은 영문도 모르면서 그냥 따라갔다.
“어디 가는 거예요?”
수혁도 뭐가 뭔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라 끌려가면서 물었다.
“네가 일단 방마다 가서 누가 우수한 애인지 알아봐.”
“네? 제가 어떻게.”
“나도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는데, 알아보잖아. 너.”
“그…… 뭐, 그렇긴 하죠.”
이현종의 말에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까 진짜 알기는 알아서 그랬다.
[제 덕분입니다, 수혁.]
‘너 덕분이라기엔 살짝 신기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조태진, 안대훈만 그렇습니다.]
‘그 둘이 영향력이 크잖아.’
[그래서 제 능력 사용 안 하실 겁니까?]
‘아니, 사용해야지…….’
바루다 덕이었다.
안대훈이나 조태진의 생각과는 달리 그저 상대를 보다 잘 관찰하고 파악하는 것뿐이긴 했지만.
하여간 결과는 비슷하지 않던가.
수혁조차도 거의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여.”
제일 먼저 간 곳은 아선이었다.
이현종은 문을 벌컥 열고는 반갑다는 얼굴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우창윤은 정반대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네에…….”
왜 왔지.
대충 여기서 한두 명 보내 주려고 했는데.
‘왜 온 걸까…….’
우창윤은 대충 얘기가 된 두 명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썩 우수한 친구는 아니었다.
교수는 하고 싶은데, 내부 티오로는 절대로 못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아니, 뭐. 다른 병원 사람들은 어떻게 수련받고 있나 그런 거 보려고 왔지.”
이현종은 일단 능글맞게 웃고는, 수혁에게 사인을 보냈다.
둘이 부자 사이다 보니 척 하면 척이지 않나.
“수련 방향과 질 향상을 위한 모임이지 않습니까?”
개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일단 내질렀다.
명분은 그랬어서, 우창윤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우창윤은 어쩐지 수혁을 대하는 것이 어려워진 마당이었다.
‘천재…….’
급이 다른 천재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평가하려면 일정한 척도가 필요하죠. 그래서 제가 퀴즈를 몇 가지 내려고 합니다.”
“아…….”
심지어 퀴즈였다.
수혁이 내는 퀴즈.
이건 교수인 우창윤도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수혁은 어찌 되었건 간에 말로 조지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간이었으니까.
당장 오늘 오전만 해도 엄청난 활약을 보이지 않았나.
그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마당이었기에 나머지 레지던트나 군의관, 공보의들도 숨을 죽였다.
“자, 갑니다.”
“두구두구두구.”
대훈은 뒤에서 머리를 두드려 북소리를 냈다.
참 보고 있으면 기가 막힐 장면이었지만, 다행히 수혁의 포스가 있어 안대훈을 정면으로 본 사람은 없었다.
“간단한 케이스 문제입니다. 여자 79세 환자가 내원해 우상 복부 불편감을 호소합니다. 어떤 질문을 해야 합니까?”
수혁의 말에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놀랍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안대훈이었다.
그는 79세 할머니가 되어 우상 복부를 아파하기 시작했다.
간이 오스키 시험의 서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