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0화 이력서가 소용이 있을까? (1)
이현종의 말에 수혁과 안대훈 모두 센터로 이동했다.
사실 안대훈은 지금 혈종에 배정되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혈종 교수 조태진도 그랬다.
오히려 이런 말만 했다.
“그래, 잘 다녀와. 없어서 걱정 말고. 네가 배정해 준 애들…… 확실히 잘하더라. 이제 진짜 한시름 놨어…….”
수혁이라고 하면 물불 안 가리는 사람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해서 셋은 별 방해 없이 센터 내 회의실에 앉아 이메일을 까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지원서는 많았다.
아니, 너무 많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그냥 태핑인가……?”
수혁은 스크롤을 굴려야 할 정도로 메일이 많아서 좀 당황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정작 태화 의료원 사람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겠다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통합진료센터의 미래에 대한 고민 따위도 없었다.
누가 봐도 대놓고 밀어주는 중이지 않나.
다만 누군가 용기 내어 ‘나 할까?’라고 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이 문제였다.
-네가……?
이런 반응은 차라리 양반이었다.
-감히 닝겐 따위가…… 신의 권좌에 도전하는가! 신성 모독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말까지 들을 때조차 있었다.
이미 이수혁, 이현종 그리고 통합진료센터는 태화인들에게 있어 너무 높은 벽이 되어 버린 탓이었다.
거기에 낑겨 들어간 안대훈에 대한 견제가 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하는 자리가 아니었기에, 수혁도 이현종 그저 굴러가는 스크롤만 바라보았다.
[이 중에서 당시 시험 문제에 통과했던 사람은 모두 6명입니다.]
‘근데 내가 모든 병원을 다 돈 건 아니잖아.’
[네, 전국 의과 대학 병원을 다 도는 건 무리였죠. 애초에 시간이…….]
‘그러니까 말이지.’
딱히 직접 가서 꼬신 것도 아닌데 이렇게나 보내 주다니.
수혁은 눈을 멍하니 뜨고 이력서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학회 첫째 날 첫 번째 세션에서 보여 주었던 모습의 위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그랬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다른 여러 감상은 필요 없었다.
이 감상 하나가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레지던트들의 심정을 온전히 표현한다고 보면 되었다.
그야말로 환상 속 동물처럼만 보였던 완벽한 의사가 거기 서 있었다.
논리도 말투도 심지어 케이스에 대한 접근법까지도 모두 흠잡을 데가 없었다.
“이거 어쩌지.”
그 때문에 이력서가 거의 무슨 스팸 메일처럼 날아들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날아들고 있었다.
“확인하지 않은 새 메일이 8통 더 있다는데요.”
“미친. 아니……. 왜 이래? 전국에 내과 전공의가 몇이나 된다고?”
“많기는 하죠.”
“응, 많기는 하지. 근데…… 그래도 이건 좀 선 넘었는데.”
대략 세어 보니 100여 통가량 되었다.
잘 보니 레지던트 3년 차뿐만 아니라 일부 군의관 3년 차, 공보의 3년 차들도 끼어 있었다.
“어……?”
잘 보니 그중에 익숙한 이름이 하나 있었다.
“김인수? 얘 혈종 한다더니?”
수혁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이현종이 메일을 클릭해 들어갔다.
김인수라는 이름이 흔한 건 아니지만 혹시 모른단 생각에서였다.
이력서에는 태화 의료원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조태진과 함께 냈던 논문도 쓰여 있었다.
‘이놈도 진짜 보통내기가 아니네…….’
이현종은 티칭 마인드가 훌륭한 것과는 별개로 제자들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하는 사람이지 않나.
하지만 김인수처럼 의국장을 했던 애는 기억 못 하는 게 더 이상한 법이었다.
하여간 그가 기억하는 김인수는 성실한 친구였다.
그 저변에 깔린 마음은 오로지 교수를 향한 열망이었고.
‘수혁이 밑으로 들어온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그래도 쓴다고?’
덕분에 김인수가 지망하는 혈종에서도 김인수를 꽤 이뻐하는 편이었다.
당장 조태진만 해도 김인수 같은 놈은 교수를 해야 된다고 하고 있었고.
물론 그런다고 교수를 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오죽하면 교수 자리는 하늘이 내린단 말이 있겠나.
‘얘는 일단 좀 잘 봐야지. 태화 출신들이…… 그래도 좀 있어야 우리도 면이 서는 것도 있으니. 그나저나 쟨 어떻게 생각하려나.’
이현종은 수혁을 바라보았다.
원래 위에 있던 사람이 밑으로 들어온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기 마련이다.
사람에 따라선 그저 통쾌해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
당장 이비인후과만 해도, 군 면제였던 1년 차가 군대 다녀와 펠로우는 늦게 들어오게 된 선배에게 반말로 ‘이제부터는 내가 위니까 인사 똑바로 하라’라고 해서 싸움이 나지 않았나.
이현종이 알기론 그 후로 벌써 십수 년이 지났음에도 둘은 서먹하게 지내고 있었다.
“좋네요. 김인수 선생님……. 전에 보니까 군에서도 열심히 하고 계시는 거 같더라고요. 3년 차이신데도…… 환자를 일단 진심으로 보신다 생각합니다.”
“오.”
이현종은 수혁에게도 조금이나마 감탄했다.
애가 고아라고 들었는데.
학교도 엄청 어렵게 다녔다고 들었는데.
그럼에도 구김살이 없었다.
‘그래, 이래야 내 아들이지.’
뿌듯해하고 있으려니 안대훈도 입을 열었다.
“김인수 선생님이 그때…… 우하윤 선생 당직일 때 환자 데리고 오셨던 분이죠?”
“어, 그래. 어떻대? 내가 보는 거랑 또 다를 수 있긴 한데.”
“아주 좋았다고 했습니다. 퇴원하고 환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알려 주셨다고…….”
“아, 정말 좋네.”
이렇게 되면 고민할 이유는 없지 않겠나.
애초에 하나 정도는 태화 출신이 더 필요했는데, 아무도 지원하지 않아 곤란해하던 참이기도 했고.
해서 이현종은 결정을 내렸다.
센터장의 권한이었다.
“오케이, 그럼. 군펠 안대훈 선생 제외하고…… 펠로우 자리 2개 중 하나는 김인수로?”
“네, 그럼 될 거 같습니다.”
“좋아. 그럼 하나 남았는데…… 이거 어쩐다.”
100여 명이 넘는 사람 중 단 하나를 뽑아야 했다.
김인수야 살짝 뒷구멍으로 들어온 감이 있지만, 다른 하나는 적어도 안대훈급은 되었으면 하는 게 이현종의 바람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안대훈은 타고난 머리도 머리지만, 정말로 깨어 있는 시간엔 늘 공부를 했기 때문이었다.
내과 의사라는 게 평생 공부해야 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들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렇게 머리 뽑아 가면서 공부하는 사람이 흔하겠나.
“이력서 이거 의미가 없잖아. 얘들이 무슨 교수도 아니고.”
“논문이 확실히 눈에 띄는 사람들은 있는데…….”
“레지던트급에서는 별 의미 없어. 너나 알아서 썼지……. 다른 애들은 아이디어도 교수가 주고, 검수도 교수가 다 하잖아. 교신 저자가 괜히 있나.”
“아.”
수혁은 이현종에 비해 좀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논문 점수로 가르고, 그다음에 뽑을까 하고 있었단 얘기.
하지만 역시 이현종은 교수 짬바가 보통이 아니었다.
본인이 직접 써 준 논문도 적지 않다 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건 별 의미가 없어. 음.”
이게 그냥 순환기내과면 고민할 것도 적을 터였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몰리지도 않았을뿐더러, 뭔가 견딜 수 있는 사람인지만 보면 되니까.
평생 응급을 감내할 수 있는지 없는지, 그것이야말로 순환기내과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니까.
대부분의 내과에서 요구하는 덕목과도 일맥상통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통합진료센터는 그 이상이 필요했다.
‘우수해야 해. 수혁이처럼 타고나든지…… 아니면 안대훈처럼 후천적이든지……. 김인수야 저 둘 사이에 있으면 떠밀려서라도 노력하겠지. 정 봐서 안 될 거 같으면 그때 가서 혈종이랑 얘기해도 되고. 하지만…… 외부 병원 애들은 그게 안 되잖아.’
괜히 안 되는 애를 뽑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교수가 못 되면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될 테니.
첫 번째 단추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현종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저…….”
그때, 안대훈이 손을 들었다.
“어, 말해 봐.”
평소보다는 아무래도 기대감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아까 꽤 그럴싸한 의견을 남겨 주지 않았나.
제품 개발이 어려울 것도 짚어 주었고.
그러니 이상한 데랑 하지 말고 그냥 태화에 완전히 맡기라는 조언까지.
“그래, 대훈아. 말해 봐.”
수혁도 같은 생각이라 대훈을 바라보았다.
대훈은 그 눈빛에 울컥한 채 말을 이었다.
제품 얘기할 때와는 달리 광기에 서려 있었다.
다만 이현종과 이수혁은 눈치채지 못했다.
둘 다 광기에 휩싸일 때가 있어서 그랬다.
“일단 휴가 겹치지 않게 하루씩 내라고 하죠.”
“휴가를……?”
“100명이니까 100일이 걸릴 텐데. 마침 펠로우 확정까지 거의 3달은 남지 않았습니까?”
“어……. 나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
하지만 이 정도의 광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보니, 수혁은 금세 정신을 차렸다.
이 새끼가 좀 이상한 상태라는 걸 눈치챘다.
이현종을 돌아봤더니, 이현종 또한 비슷한 얼굴이었다.
심지어 수혁보다는 좀 더 예의가 없어서 손가락을 머리에 대고 빙빙 돌리기까지 했다.
“생각해 보세요.”
안대훈은 그런 반응 따위에 일일이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아니, 불행인가.
하여간 안대훈은 굴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이제 눈에 핏발까지 서 있어서 꽤 무서웠다.
“일단 휴가 하루씩 내고 와서 면접 보라고 하면…… 아마 떨어져 나가는 놈들이 있을 겁니다. 괘씸한 놈들이죠. 그런 알량한 각오로 통합진료센터에서 수련받을 수 있을까요?”
“오, 옳거니!”
그러나 하는 말은 그럴싸했다.
적어도 이현종, 이수혁이 듣기에는 그랬다.
“그럼 좀 정리가 되겠죠. 그다음은 면접 시간입니다.”
“시간? 그거 뭔 15분 이상 볼 거 있나. 피차 바쁜데.”
“아니죠! 15분 봐서 사람이 사람을 파악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수혁 교주…… 아니, 교수님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만전을 기해야죠.”
“어…… 그럼?”
“하루 종일 봅시다.”
“응?”
다시 안 그럴싸해졌다.
하루 종일 면접을 본다니?
둘의 고개가 모로 돌아갈 때쯤, 그러니까 이 새끼 너 나가라는 말이 나오기 직전에 안대훈이 말했다.
“같이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환자를 보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별 소용 없을 말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 둘은 어떨까.
이미 전적이 화려했다.
김성진이라는 칠성 사람도 벌써 잡혀서 같이 돌지 않았나.
“오?”
그럴싸하단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같이 환자를 보게 하면 제대로 볼 수 있지 않겠나.
보다 정확하게 이놈이 어떤 의사인지 파악이 가능하단 얘기였다.
“그래, 이러면 확실히…… 진료 과정을.”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환자를 보게 되는지. 그것도 중요합니다.”
“응? 그건 순전히 운빨이잖아.”
“운. 그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교수 자리는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리는 자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안대훈은 진중한 얼굴로 개소리를 내뱉었다.
근데 이게 또 그럴싸해서, 나머지 둘도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마찬가지로 개소리를 내뱉으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