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803화 (803/1,303)

803화 이제 뽑아야지? (1)

김성진은 5차까지 돌고 나서야 집에 갈 수 있었다.

점심은 뭘 먹었냐고?

3차 끝나고 편의점에 들러 소시지랑 김밥 한 줄 달랑 먹었다.

그리고 4차, 5차까지 달리고 차에 탔다.

‘와……. 뒤지겠다.’

시간이 늦어서 힘든가?

그건 아니었다.

오후 회진 돌기 전에 끝났으니, 사실 평소보다 훨씬 빨리 끝난 셈이었다.

병원에서 나오는 길에 쨍하니 떠 있는 가을 해를 보고 있지 않나.

임상 조교수가 이때 나오려면, 사직서를 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와……. 왜 이렇게 힘들지.’

김성진은 액셀에서 발을 뗀 채, 병원 입구 근처 갓길에 차를 세웠다.

이 기분을 뭐라 해야 할까.

그래, 탈력감.

탈력감이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머리를 너무 굴려서 그런가? 그런 거 같은데?’

감염 내과 임상 조교수도 충분히 만만치 않은 직함이었다.

애초에 의사라는 게 머리 쓰는 직업이지 않나.

게다가 칠성 병원도 4차 병원으로 분류되는 곳이다 보니 그야말로 어려운 환자들이 매일 몰려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제일 힘들다고 해도 비난할 사람은 없을 곳이란 얘기였다.

그러나 통합진료센터에 비하자니 이건 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긴……. 오늘 시발…….’

1차로 신경외과 찍고, 비뇨기과에 갔다가, 산부인과, 소아과 마지막에 감염내과.

5개 과를 하루에 돌 만한 일이 앞으로 있을까?

통합진료센터에 가지 않는 한에는 절대 없을 거 같았다.

사람들이 ‘절대’라는 말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오늘은 써도 됐다.

‘그래서 나는 어땠지.’

김성진은 여전히 갓길에 차를 세운 채, 자기 자신을 점검했다.

힘들단 생각으로 하루를 끝내기엔 그가 지금껏 살아온 인생이 너무 험악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반드시 하루를 돌이켜봐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삶이지 않았나.

특히 안국태 밑에서의 몇 년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나는 괜찮은지 자문자답을 해 봐야 했다.

‘힘들긴 한데…….’

힘든 건 그냥 사실이었다.

이렇게 집에도 못 가고 길목에 차 세운 것도 오랜만이지 않나?

남들 같으면, 그런 일이 한 번이라도 있었으면 병원 관둬야 되는 거 아니겠냐고 하겠지만.

안국태 밑에 있으려면 이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는 인계 사항도 있었다.

‘안국태는 개새끼야. 그렇지만 이수혁 교수님은……?’

동시에 음악 크게 틀어 놓고 욕이라도 한 사발 지껄이라는 조언도 들었다.

그만큼 안국태는 나쁜 놈이었다.

힘들게 하니까.

그렇다면 이수혁과 이현종은 어떤가?

힘들게 만든 것은 같았다.

하지만 달랐다.

‘교수님이지. 내가 오늘 하루 동안 성장했다는 생각이 드는 게 착각일까? 아닌 거 같아.’

하루 만에 강해졌다고 생각이 들면 뿌듯해할 때가 아니라 병원을 가 봐야 할 시점이라는 말도 있지만.

김성진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오늘 분명 성장했다.

알을 한 껍질이라도 깨고 나왔다.

그래서 힘든 거다.

[신동수 선생님, 오늘 어떠셨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단톡방이 울렸다.

신동수?

그게 누구야.

하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게 나였다.

[아, 좀 힘드네요.]

가명을 쓰고 있긴 해도 솔직하게 답하기로 했다.

[그래요? 하긴 힘들긴 하죠. 저도 그랬어요. 머리가 좀 한꺼번에 돌아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네, 그렇더라고요. 오늘 저는 5명이나 봐서.]

[와……. 진짜요? 5차를 뛰었어요?]

[네.]

[잘 보셨나 보다.]

[아뇨, 뭐. 그건 전혀 모르겠습니다.]

겸양을 떠는 건 아니었다.

진짜로 모르겠다.

잘한 것도 있는 것 같기는 했다.

하여간 얼추 정답에 가깝게 말한 케이스가 네 개나 되니까.

하지만 정답을 딱 맞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임상 조교수씩이나 되서.

“저거 김성진 차입니다. 역시 프락치 맞는 거 같은데요?”

그렇게 김성진이 차 안에 앉아 톡을 나누고 있는 것을 안대훈은 병원에서 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넌 그 사람 차를 어떻게 아냐?”

수혁은 회진을 마치고 햄버거에 윙을 먹고 있었다.

[존나 맛있네요.]

‘어, 자주 먹으면 일찍 죽을 거 같은 맛이긴 한데. 진짜 맛있네.’

이현종이 최근에 발굴한 맛집이었다.

화요일이란 이름의 햄버거집인데, 신논현역 근처에서 아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했다.

덕분에 수혁은 기분이 좋았고, 안대훈이 무슨 말을 해도 웃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행했죠.”

“뭐? 이 미친놈이.”

미행은 빼고.

미행이라니?

네가 무슨 게슈타포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이현종이 껄껄 웃었다.

“그래야 우리 안대훈이지.”

네?

아니…….

[닥치고 먹기나 합시다. 윙이 실시간으로 줄고 있다구?]

‘아니…….’

게슈타포 둘에 식충이 하나.

수혁은 잠시 외로움을 느꼈다.

그사이, 대훈과 이현종은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근데 프락치는 아니야. 내가 확인했어. 쟤는 진심이라고.”

“정보 수집을 어떻게…….”

“안국태는 쟤 면접 본 거 몰라.”

“네? 그걸 어찌…….”

“레지던트 레벨에서는 접근 불가능한 정보들이 있는 법이지.”

의사들의 대화가 맞나 싶었다.

“아……. 그렇군요.”

“그래. 알아보니까, 안국태 놈은 지금 김성진이 저 친구 뒤통수를 칠 생각이야.”

“네?”

“임상 조교수도…… 요새 계약 빡세지면서 4년 이상 하면 임상 루트 타서 거의 못 자르게 되는 건 알고 있지?”

“아, 네. 그거야…… 저희한테는 너무 중요한 이슈니까요.”

그러다 좀 알 만한 얘기로 넘어왔다.

그렇다고 해서 말을 보태거나 하지는 못했다.

바루다가 채근하는 바람에 입 안에 윙을 잔뜩 쑤셔 넣어서 그랬다.

“근데 이번에 재계약하면 김성진이 이제 3년 차가 된단 말이야? 직함 달라질 때 계약 연차가 갱신되는 꼼수를 쓴다고 해도 여기서 1년만 더 하면 4년을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제 거의 못 자른다고 봐야지.”

“네, 근데…… 그게 그렇게 큰일인가요?”

임상 루트는 전임 교수 루트가 아니기 때문에 학교 발령이 아니라 병원 발령이었다.

말이 교수지, 학생을 가르치거나 학교와 연관이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만큼 부담이 덜했다.

오히려 실력 있는 임상 교수들이 있으면 환자를 잘 보니 재정적으로 보탬이 되기도 했다.

“큰일은 아닌데, 안국태가 과장이잖아. 더 올라가고 싶어 하는 놈이고.”

“저는 잘 이해가…….”

“어른들의 세계라 그래. 그것도 나쁜 어른이지. 하여간…… 딜하기 위해서 김성진을 희생양으로 놓은 모양이야. 남들이 볼 때는 그래도 밑에서 수년을 굴렀던 제자를 팽하는 거니까 어지간한 건 다 들어줬겠지. 실제로 차기 기조실장이라는 얘기가 있어. 아마 윗분들 제자를 받아 주겠지.”

“와……. 이런 개 같은.”

안대훈은 자신이 지금 수혁과 이현종 앞이라는 것도 잊고 욕설을 내질렀다.

이현종은 십분 이해한다는 얼굴이었다.

여기서 욕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나.

사람이 사람을 배신할 수는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안국태가 김성진을?

‘내가 프락치라고 의심했던 이유가 있는데…….’

안대훈은 김성진의 뒤를 캐 봤기 때문에 더더욱 배신감을 느꼈다.

그가 본 김성진은 조직에도 사람에도 충성하는 사람이었다.

안국태 대신 군대 가서도 논문을 수도 없이 썼음에도 전임 발령을 안 줬을 때조차, 군말 없이 임상에 남았다.

그러고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병원에서는 연구비도 안 줌에도 불구하고 안국태의 논문을 도왔다.

1저자는커녕 2저자, 3저자에밖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음에도 그랬다.

‘그런 충신을 이렇게 깐다고? 기조실장, 그게 뭐라고.’

높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래 봐야 임기제이지 않나.

그거 했던 사람 얼굴이나 기억하나?

심지어 같은 과 아니면 지금 기조실장도 모를 터였다.

“내가 이걸 어떻게 알았냐면, 후배 병원에 김성진이 들어가면 어떻겠냐고 안국태가 물어봤더라고. 저기 목포에 있는 병원인데……. 김성진은 고향도 서울이거든. 후배는 감염내과 필요도 없는 상황이고.”

“아니……. 그럼.”

“시늉만 하는 거야. 진짜 집어넣으면 신세 지는 거잖아. 언젠가 되갚아 줘야 된다고. 근데 이렇게 되면 어찌 되는지 알아?”

“아뇨, 모릅니다.”

“오히려 빚을 지우게 돼. 교수들 좋다는 게 이런 거야. 얼토당토않은 거 얘기해 놓고도 안 들어주면 나중에 언제고 써먹을 수 있는 카드를 만들 수 있다니까?”

“허……. 그럼 김성진 선생님은요?”

안대훈의 김성진에 대한 적개심은 이미 사르르 녹아 버린 지 오래였다.

이제는 그저 동정심만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팽이지 뭐. 각자도생. 이 바닥에 그렇게 되는 애들이 한둘이니?”

“하긴……. 그건 그렇긴 한데…….”

환자 입장에서는 보이지 않을 터였다.

동네 병원 의사라고 하면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일 테니까.

하지만 의사가 보면, 이 사람은 기질도 그렇고 커리어도 그렇고 그냥 교수를 했어야 하는 사람인데 원장이 된 사람이 종종 있었다.

그게 다 뭐 자기가 원해서 나왔겠나.

“하여간 김성진은 프락치 아니야. 불쌍한 놈이지.”

“그렇네요. 와……. 칠성은 진짜…….”

“조직 문화가 잘못 자리 잡았어. 하긴 원장이라는 새끼가 오성흠이니 뭐 말 다 했지.”

“그것도 그렇군요. 저희는 이현종, 신현태인데……. 거기는 오성흠이니.”

“하하. 그렇지. 네가 역시 뭘 좀 안다니까!”

이현종은 안대훈의 참으로 시기적절했던 아부에 꺄륵 웃더니, 이내 진중한 얼굴이 되어 수혁을 바라보았다.

“아들 어제 굶었어?”

일단 걱정이 됐다.

애가 말 한마디 없이, 말 그대로 처먹고 있지 않나.

이런 건 진짜 처음 봤다.

“아, 아뇨. 진짜 맛있네요?”

“어……. 그런 거면 다행이고. 하여간 이제 우리 슬슬 뽑긴 해야 하는데 말이야.”

“벌써요? 아직 몇 명 남았는데요?”

“그렇긴 한데. 표로 점수라도 정리를 해 놔야지. 기준이야 있긴 하지만…… 그래도 까먹으면 어떡해.”

“하긴……. 음. 그렇긴 하네요.”

“그래서 말인데, 일단 안대훈 선생. 자네는 누가 마음에 들던가?”

“아, 저요? 저는…….”

안대훈은 속으로 김성진을 제일 먼저 떠올렸다.

원래 같았으면 아웃이었다.

프락치니까.

하지만 듣고 보니 프락치는커녕 불쌍한 중생이지 않나.

‘충성……. 그 충성을 여기서 바친다면?’

역으로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일단 김성진 선생님이요.”

“불쌍해서?”

“아뇨, 뭐. 아주 없는 건 아닌데, 그래도 객관적으로 커리어가 제일 좋지 않나요? 사실 안국태 아니었으면 전임 받았어도 한참 전에 받았을 정도니까…….”

“뭐, 그건 그래. 나도 오늘 걔는 마음에 들었어. 그리고 또?”

벌써 여러 명이 왔다 간 마당이었다.

그러나 안대훈의 마음에 남은 것은 김인수 제외하면 둘이었다.

‘장종우…… 이태원.’

둘은 꽤 괜찮았다.

동료로서도, 의사로서도.

“꼭 하나만 말해야 하나요?”

“아니, 맘에 든 사람 있으면 다 말해. 지금 뽑자는 것도 아닌데.”

“그럼 장종우, 이태원이요.”

“장종우를 먼저 말했네.”

“네?”

“아냐, 아냐. 아무튼,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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