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9화 슈퍼스타 이수혁 (1)
“그럼, 이만, 강의가 있어서요. 자세한 건 메모지에 있기도 하고, 여기 혈액종양내과 교수님들하고 논의하면 될 거 같습니다.”
수혁은 천장만 비추고 있는 휴대폰에 이런 말을 남기고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하필 바닥에 폰이 떨어져 있어서 지팡이 짚을 때마다 귀가 따갑게 소리가 울렸다.
“어떤 놈이지?"
“이렇게 어리버리 타는 거 보면 씨턴 (평가에서 C를 받은 인턴)인데,"
“이랬는데 막 교수님 아님?"
“그럴 리가 있냐.”
불만이 폭주하던 가운데, 우창윤이 폰을 발견했다.
'아……. 이거 떨어졌네, 어차피 뭐 다 끝났지.'
그러곤 그냥 집어 들어서 꺼 버렸다.
“방금 저분… 우창윤 교수님 아님?"
“시벌………. 나 욕하는 거 들렸나?"
"여기 지하 4층이고 거기 1층임."
“뒤에 들렸으려나?"
그제야 레지던트들은 어리버리 인턴이 아니라 교수가 찍고 있었다는 걸 깨닫곤 웅성대기 시작했다.
특히 서슴지 않고 욕을 내뱉었던 이들은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행사 진행 요원들과 일부 강사들, 그러니까 교수들이 서 있었다.
다행히 그들도 영상 보느라 여념이 없었어서 욕하는 데 적어도 속으로라도 동참했던 이들이었다.
이 중에서 우창윤에게 욕하지 않은 자 돌을 던지라고 하면 아무도 나설 수 없지 않을까.
또각 또각-
그때 뒤에서 구두 소리는 아닌, 그러나 무언가 땅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종류의 소리였지만, 동시에 방금 들어 본 소리기도 했다.
“이수혁 교수님….…?"
“그러고 보니까 11시네."
"와……. 시간도 칼이네.”
“그건 당연한 거 …….”
“내 감동을 파괴하지 마라.”
수혁의 지팡이 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과연 수혁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뒤따르고 있는 이는 안대훈과 우하윤. 그리고 우창윤도 있었다.
"와…..."
아까도 교수들이 하나 가득 들어오긴 했다. 강의를 하려면 안에 들어와야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방금 화면을 통해서 봐서 그런가.
어쩐지 엄청 높은 사람 같달까.
"오늘 새벽 기차 타고 올라오길 잘했네.
“그러니까.……. 지렸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부터 수군거리게 되었다.
의사들을 모아 놓은 강의실치고는 오늘 꽤 여러 번 시끄러워진 셈이었다.
'그래, 찬양해라.'
[후하하하!]
어지간한 교수라면 좀 부담스러워할 만도 했을 테지만,
수혁은 어지간한 사람이 아닌 데다가, 그가 알고 지내는 교수란 사람들도 이현종, 신현태, 조태진 아닌가.
신현태로선 참 억울해하겠지만 그가 평범하다는 것도 그 셋 중에서나 그렇다는 얘기지, 이제 밖에서 보면 그 또한 이상해진 지 오래였다.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딱 맞는 상황이랄까.
'흐하하하하. 강의 들으면 더 놀랄 거다. 이놈들.'
[아까 그건 에피타이저도 안 되죠.]
'근데 살 수 있을까?'
[그나마 진단 며칠 당겨 준 셈이니 살 가능성을 확 끌어올려 준 건 맞죠. )
'그건 그래.'
때문에 수혁도 점점 더 이상해져 가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현종과 안대훈 때문에 본인이 평범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하여간 그렇게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 수혁은 뻔뻔한 얼굴로 단상 위에 올라섰다.
“다음 강의는 ……… 고혈압의 진단과 치료에 대해 태화 의료원 이수혁 교수님께서 맡아 주시겠습니다."
"와아아아!”
“잘생겼다!”
"우윳빛깔 이수혁!”
소개와 동시에 교수 소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요란한 함성이 있었다.
당연히 안대훈이 주도한 움직임이었는데, 전공의 연수강좌다 보니 젊은 교수들만 있어서 안 좋게 보는 사람들보다는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연예인이네, 연예인.…..….”
“천재잖아. 의사들한테는 연예인이지.”
"나도 똑똑하단 소리 많이 들었었는데.”
“그래서, 이수혁보다 똑똑해?""
“그럴 수가 있냐? 저건 반칙이야. 논문 읽어 보면…… 말이 안 돼.”
“임상 추론이 특기인데 논문까지 그 지경이니...... 말 다 한 셈이지."
사실 이쪽이야말로 수혁을 질투해야 맞을 그레이드긴 했다.
시니어 교수들이야 수혁과 겨루기에는 급이 안 맞지 않나? 이현종이라면 모르겠지만.
너무 오랜 세월 이현종에게 처맞아서 그런지, 누구도 감히 눈앞에서는 대놓고 욕하지 못했다.
"부럽다.”
“부럽지 부센터장이라며."
“연봉을 센터장보다 더 받는다던데."
“그건 거들다인지 나발인지 만들어서 그래."
“아, 그거. 우리도 쓰는데 좋긴 해."
“왜 하늘은 나를 낳고 이수혁을 낳았다."
"지랄. 너가 주유냐?"
그리고 이들은 수혁과 너무 차이가 나다 보니 질투보다는 그냥 동경하고 있었다.
약간은 팬미팅 같은 분위기 속에서 수혁은 입을 열었다.
“고혈압, 생각보다 이걸 병으로 인식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FDR을 아십니까?”
언제나처럼 유려한 말투였다.
동시에 수혁은 답을 기대하지 않는 질문을 할 때 특유의 표정을 한 채 좌중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봐도 재수 없는 얼굴인데 여기서 또 전공의들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모릅니다!”
그중 누군가는 신나서 이렇게 외치기도 했다.
“네,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의 위대한 정치가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고립주의를 선호했던 미국의 여론을 참전으로 이끌어 낸 대통령인데 ….….”
['검은 머리 미군 대원수'에서 배운 걸 공부한 것처럼 위장하지 마십시오.]
'난 웹소설을 보면서도 인풋하는 사람이야. 얕보지 말라구.'
[휴…….]
수혁은 모른다는 대답에 맞춰 말을 해 나갔다.
교수다 보니 멀쩡히 논문이나 교과서를 통해 습득한 지식이겠거니 하고 있겠지만, 실은 아니었다.
물론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분이 전쟁 중에 뇌출혈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유는 관리되지 않은 고혈압입니다. 일이 너무 바빠서 검진을 받지 않았냐? 아닙니다.
당시 의사들은 혈압이 높은 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축기 혈압이 무려 200이 넘고 두통까지 호소하는 대통령에게
각하의 검사 결과를 보고 '지극히 정상입니다' 라는 말까지 했죠.”
일단 듣기에 신기하기도 하지 않나.
이수혁의 빠 때문에 괜히 좀 싫어했던 이들조차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에 반해, 지금은 어떻습니까. 점점 기준이 타이트해지고 있죠. 심지어 이제 수축기 혈압 120을 넘기면 관리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주로 미국 심장학회에서 나오는 말인데….…. 사실 고혈압에 대해 더 열심히 관리해야 하는 나라는 우리죠."
수혁은 아직 PPT도 넘기지 않은 채 썰을 풀고 있었다.
확실히 필기까지 해야 할 내용은 아니어서 다른 이들도 그저 보고만 있었다.
허나 집중력을 잃는 이도 없었다.
전반적인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중요한 얘기였고, 또 흥미로워서 그랬다.
“자, 보십시오. 미국의 뇌혈관 질환 유병률을 보면 ....… 뇌경색이 더 많죠? 이쪽은 당뇨나
고지혈증으로 인해 혈관이 막히는 것이 더 문제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아스피린을 선제적으로 먹는 것이 이 때문에 더 유리하단 얘기가 나오죠."
드디어 화면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아는 얘기도 있고 모르는 얘기도 있었다.
허나 알았던 사람도, 몰랐던 사람도 다 집중하고 있었다.
수혁이 만드는 이야기에는 힘이 있어서 그랬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뇌출혈이 훨씬 많습니다. 당뇨와 고지혈증 유병률도 올라오고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마 인종적인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
출혈이 더 위험한 상황입니다. 이 때문에 아스피린은 물론이거니와 홍삼 등도 사실…… 사전 검사 없이 과량을 꾸준히 섭취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죠."
다음 PPT에 이르러서야 고혈압 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왔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는 고혈압 관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실.… 당뇨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건 나중에 당뇨 강의할 때 또 썰 풀면 돼.'
동양인은 대사 질환에 있어서만큼은 서양인에 비해 굉장히 불리한 면이 있었다.
일단 췌장이 작다 보니 당뇨에 취약했다.
고혈압은 위에 열거한 문제가 있었고, 하여간에 수혁은 쓸데없는 걸 싹 빼고 말을 이었다.
"당연히 이를 우리 내과 의사들이 제일 잘 알고 있어야겠죠. 그럼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고혈압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까?”
"음."
원래 같으면 죄다 손을 들어야 정상이었다.
세상에, 내과 의사한테 고혈압이요? 이건 못 참아야 되지 않겠나.
하지만 질문자가 수혁이다 보니 다들 망설였다.
괜히 안다고 했다가, '오 그래? 군침 싹 도네 하고 질문 폭격이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뭐 어느 정도는 알고 계실 겁니다. 다만 이런 자리에서 손들고 잘 안다고 자부하실 정도는 아닌 거겠죠. 자,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고혈압에서 놓칠 수 있는 것들을 .....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앞으로 절대 잊지 않으시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수혁도 딱히 손들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거 같아서 바로 말을 이었다.
그리곤 드디어 케이스를 띄웠다.
"오......"
수혁의 케이스 강의는 이미 유명하다 못해 어마어마한 명성을 얻은 지 오래 아닌가. 뒤에 있던 교수들까지 기대하는 눈이었다.
심지어 이미 강의를 끝낸 사람들도 있었다. 학회라면야 강연자도 당연히 바로 집에 가지 않고 계속 듣겠지만,
이건 연수강좌이기에 강의 끝나면 바로바로 가는 게 국룰이었다.
심지어 여느 세미나라면 다 만들어 둘 법한 VIP 대기실도 없었다. 해서 교수들은 죄 서서 강의를 보고 있었다.
“자, 50세 남자 환자가 등으로 뻗어 내려 가는 방사통을 주소로 응급실에 내원했습니다. 제가 지금 고혈압을 얘기하고 있죠? 그럼 뭐겠습니까?"
평소랑은 좀 다른 느낌의 강의였다.
궁금증을 유발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고혈압에 대해서는 다 알아가라 뭐 이런 느낌이라 그랬다.
“대동맥 박리!”
“네, 그렇습니다.”
해서 대놓고 힌트를 주었다. 아니, 힌트를 준 정도가 아니라 그냥 답을 주었다.
'아직 웃기엔 한참 이르다, 애송아.'
수혁은 답을 해냈단 생각에 싱글벙글 하고 있는, 아마 3년 차인 듯한 애를 보며 후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실제 케이스입니다. 내원 당시 환자는 고혈압으로 진단된 지 이미 8년째였습니다."
"아….”
“약을 안 먹었나 싶을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분명 관리되는 고혈압에서는 위험성이 떨어진다고 배웠으니까요.
당시 이 환자가 복용 중이었던 약을 보면 칼슘 통로 차단제와 베타 수용체 차단제가 있습니다.
이를 병용하고 있었으니, 어지간한 본태성 고혈압이었다면 관리가 되었을 겁니다.”
본태성 고혈압이었다면,
이 말에 듣던 사람들이 전부 쌔함을 느꼈다.
'이 케이스.….…. 대동맥 박리가 중요한 게 아니구나.'
본태성 고혈압이 아닌 다른 고혈압이 중요한 것 같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수혁은 잘 가르치는 사람인 동시에 좀 못되게 가르치는 사람이었으니까.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듯한데, 그래서 더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