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834화 (834/1,303)

834화 수혁의 주말 (3)

"아, 저기다. 응?”

[왜요?]

'아니…… 대문에 이런 게 있었나‥……?'

기억만 가지고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오기 전에 당연히 연락도 드렸고, 주소를 미리 받고 내비에 찍어서 오는 길이었다.

오다 보니 확실히 주변 길이나 늘어선 풍경들도 눈에 익었고,

아무래도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외진 곳이다 보니 세월이 지나도 크게 변하질 못했구나 싶었더랬다.

[확실히 수혁 기억 속에 있던 것보다는 훨씬 좋아 보이긴 하네요. 그냥 그 시절이 어려워서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아니, 아니야. 아닌데. 저건……… 어떻게 봐도 최근에 지은 거잖아.'

헌데 딱 대문부터 달랐다.

현대적으로 지어진 철문이 길 앞을 떡하니 막고 있었다.

철문에는 희망 보육원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문구가 상큼한 색감과 필체로 쓰여 있었다.

'우리 원장님이나 사모님이 센스가 있는 사람은 아니거든.'

[수혁의 옷 입는 센스로 미루어 보면 그럴 거 같긴 합니다.]

그러니까 저건 누군가 와서 그려 줬다는 얘기였다.

물론 이따금 대학생 형, 누나들이 와서 봉사도 하고 가고 하기는 했던 거 같은데.

그들이 와서 해 준 걸까?

하여간 문 옆에 달린 기기로 인터폰을 하니 그리웠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누구세요?

“아, 저 수혁이요."

- 이야. 차 좋은 거 샀구나. 바로 열어 줄게.

그러곤 웅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딱 열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 이거 돈 좀 썼겠다.

[어우…………. 놀이터 뭐예요? 좋아 보이는데?]

'어………. 나 때는 이런 거 없었는데.'

[뭐………… 10년 만에 오는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딱 11년 만이지. 근데 그사이에 이렇게 많이 변할 게 있나………?'

원장님이 딱히 언론을 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소에 여기저기 얼굴 들이밀고 다니면서 넉살 좋게 돈을 끌어다 올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어떻게든 부족한 예산이나마 쥐어짜서 굴리는 류의 사람이었다.

“와…… 수혁이 형이다!"

하여간에 차를 주차하고 내려서니 낯익은 얼굴들이 뛰어왔다. 많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 보육원에 있는 애들 숫자가 연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지 않았나.

게다가 중간중간 입양되어 떠나는 애들도 있고, 가출해 버리는 애들도 있어서 끝까지 남는 애들은 더더욱 적었다.

“어, 야. 오랜만이다."

그나마 나이 차가 적게 나는 애들이야 친하게 지냈지만, 이렇게 10살 넘게 차이 나는 애들은 솔직히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와……. 데이터를 다 뒤졌는데 이름도 모르겠네. 옛날부터 딱히 인간미 있는 인간은 아니었군요?]

'미친놈이. 난 10살 때부터 공부만 했다고. 나중에 어떻게든 잘살아 보려고.'

[혼자만 잘살려고.]

'아니야, 인마. 나랑 같이 공부한 애들 그래도 다 대학 갔어. 지금 대기업 다니고 있고 그럴걸.'

이름을 모른다고 한창 예민할 시기의 청소년 애가 와서 인사하는데 너 누구니 할 수는 없지 않나.

해서, 수혁은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어, 안녕. 오랜만이다."

"저 기억해요?"

“그럼 물론이지."

“이름 뭔데요?"

물론 위기는 꽤 빨리 찾아왔다.

‘시벌………’

[애가 총명하네요. 눈이 또랑또랑해.]

해서 이제 끝났구나 싶었다.

사실은 모른단다 하고 말하려는데, 원장님이 나섰다.

10년 전에도 기실 젊다는 말은 못 할 나이였던 그는, 이제 중늙은이가 다 되어 있었다.

하긴 60이 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젊은 시절부터 워낙 고생을 해서 그런가 더 늙어 보였다.

"박지민. 너 인마 형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그래, 지민아. 설마 형이 너 이름도 모르겠니.”

“어………… 아시네? 죄송합니다.”

하여간 수혁은 능청스럽게 원장의 말을 받아 지민이라는 애에게 인사한 후, 원장을 바라보았다.

의사인 데다가 바루다까지 탑재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시진부터 되었다.

'우선 이렇게 봐서는 뭐…… 건강해 보이네'

[네, 황달이나 빈혈 또는 부기 등은 없어 보입니다. 다만 다른 질환이 있을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하긴 어렵습니다.

생각보다 더 늙어 보이긴 하네요.]

‘그렇네. 그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표정은 굉장히 밝은데요? 맨날 돈 걱정이 많았다고 했잖아요?]

‘아니…… 그랬는데. 지금 보니까…… 적어도 돈 걱정은 없어 보이네.'

수혁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낡은 건물은 단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다시 말하면, 그가 지내던 건물은 다 없어진 지 오래였고, 죄다 신축 건물들뿐이었다.

"많이 변했지? 일단 들어가자, 들어가서…… 시간이 애매하니까 커피나 마시자."

“이제 커피 마셔도 뭐라고 안 하실 거죠?"

“서른 살짜리 어른한테 커피 마신다고 뭐라고 하면 미친놈이지. 들어가자."

“네. 와...... 근데…….”

“이게 다 네 덕이야. 네 덕분에 이렇게 된 거야."

“네?”

해서 두리번거리고 있으니까 원장님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예전엔 묵직한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없이 가벼워져 있었다.

'내가 등 운동을 해서 그런가?'

[2주에 한 번 깨작대는 걸로 근육 생기려면 스테로이드 맞아야 될걸요.]

'그럼 역시 원장님이 늙은 거군'

[그렇죠.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근육이 줄어드니까요.]

‘우리 제품 나오면 좀 팍팍 보내 드려야겠네.'

[또 그럴 정도로 늙은 건 아니긴 합니다. 그냥 운동을 해야죠, 이 나이에는.]

하여간에 안에 들어가는데, 건물이 겉만 삐까번쩍한 게 아니라 안도 꽤 좋아 보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

돈을 아끼지 않았다는 느낌이랄까.

아니, 그에 더해 뭔가 전문가의 냄새가 났다.

대형 건설사가 나섰나 싶을 정도로 마감도 튼실했고.

"하하. 너...... 이런 거 잘 알아보는구나?”

게다가 자재도 좋아 보였다.

저도 모르게 손을 대고 있으려니, 원장님이 껄껄 웃었다.

“네? 아, 네. 뭐…… 본의 아니게 이런저런 데를 다니니까요. 꼭 호텔이나 고급 주상복합 같네요. 이게 대체."

“이거 다 네 덕이라니까. 일단 앉아. 내가 커피 내려다 줄게.”

“아, 네. 근데 사모님은.…….?"

“아, 음. 지금 좀 몸이 안 좋대. 아아, 그렇다고 그렇게 큰 병은 아니고, 그냥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지금 시내 병원 갔어. 금방 올 거야, 자식이, 누가 대학병원에 있는 의사 아니랄까 봐 바로 심각해지는 거 봐라."

원장은 또다시 웃더니 커피를 쫄쫄 내렸다.

옛날에는 그냥 믹스커피나 타 오더니, 이젠 제법 전문가 기기 같은 걸로 내리고 있었다.

'아니…………. 어디 뭐 로또라도 됐나.'

[다 수혁 덕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게 말이 되냐?'

[말이 안 되긴 하죠. 수혁이 뭐라고.]

'또 그렇게 말하니까 기분이 나쁜데, 내가 인마 그래도, 어?'

[뭐. 커피나 받아요. 손 대시겠네.]

커피를 받아 드니 향이 확 오는데, 뭔가 이상했다.

'나 왜 이 원두 먹어 본 거 같지……?'

[그래요? 어? 그렇네? 이상하네?]

스벅 같은 데서 사셨나 해서 둘러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상한 종이에 싸여 있었다.

근데 또 이상한 게, 저걸 봤던 것 같았다.

'저거……?'

[신현태 방에 있던 겁니다. 그래요. 이 향. 이 맛. 신현태가 전에 지하 1층 카페에 맡겨 둔 그 원두예요.]

같은 원두라?

하필 원장님이 삼촌이랑 같은 원두를 마신다?

이게 우연일까?

보육원장과 태화 의료원 원장은 다 같은 원장이니까?!

그럴 리가 없었다.

삼촌도 그거 어렵게 구했다고 하지 않았나.

“원장님. 이거...... 이 원두가…….”

"응? 아아. 아, 그렇네. 이거 그 친구가 보내 준 건데."

"그 친구요?"

"응. 그 친구 찾아왔을 때...... 내가 정말 놀랐었거든. 비 오는 날이었는데 말이지."

"비? 그 친구?"

뭔 소리야, 이게?

'안대훈……………?'

[뭔 소리예요?]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이 떠올랐어.'

[사실 저도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수혁과 바루다가 설마 하면서 주섬주섬 놀랄 채비를 하고 있던 그때, 원장님이 말했다.

“안대훈이라고. 그 친구가 찾아왔어. 여기 네 은인이 계신다고 들었다면서."

“그다음에는 이현종인가? 그 원장님. 다음에는 신현태, 조태진 교수님."

“잉…….”

"그리고 김다현 회장님도 오시고."

"네?"

채비는 별 소용이 없었다.

안대훈뿐 아니라 그냥 자기가 아는 사람들이 다 왔다지 않나.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또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자신이 이 보육원 출신이라는 건 비밀이 아니었으니.

아니, 아예 학교에 들어갈 때 원장님이 추천서도 써 주셨으니, 학교 사람이 성의 있게 알아보려고

했으면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터였다.

'근데 안대훈이 제일 먼저 왔다고……'

[정말이지 충심이 대단하군요.]

'광기에 가까운 충심이네 시발.'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그런 사람 있으면 좋지 뭘.]

수혁이 계속 놀라고 있는 동안 원장이 말을 이었다.

"각기 후원해 주신 금액이 적지가 않아. 아, 안대훈 그 친구는 돈보다는 봉사하러 오는 편이고."

"봉사요?"

“어. 저기 사진 보여?"

“어…………. 와…….…”

손가락 끝을 바라보니 정말 안대훈 사진이 있었다.

아이들에 둘러싸인 채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안대훈.

병원에서 볼 때는 그저 미친놈이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정말 좋은 사람 같았다.

‘좋은 사람 맞지. 그 힘든 레지던트 하면서 여길 와? 그것도 봉사하러?'

[아무도 몰랐던 거 아닙니까?]

'응. 그랬을 거 같은데?'

[잘해 주세요.]

‘그래…………. 내가………… 내가 잘해 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건물이나 이런 건 김다현 회장님이 해 주신 거야. 어차피 그룹 내에 사회공헌팀이 있다면서.

여기 싹 도와주시고…………. 아까 인사했던 지민이 있지?"

“아, 네."

“너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공부를 썩 잘해. 혼자 해서 의대 갈 수 있을 정도로는 나오더라.”

"어...... 원장님. 요새 그 정도면 진짜 잘하는 건데. 저희 때랑은 또 달라요."

“응, 알지. 아는데……… 아무리 그래도 또 태화에 들어갈 정도는 아니거든? 근데 김다현 회장님이 방법 알아봐 주신다고 하셨어. 참 고맙지."

"허......"

이 사람들이.

사람 울리려고 작정을 했다.

말도 안 하고, 이런 일을 벌였어?

“제가 진짜 무심했네요."

"아니, 아니야. 내가 그랬잖아. 그냥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잘 먹고 잘살라고, 그게 내 보람이라고.

근데 너는 티비에도 나오고 하니까 내가 정말 위로를 많이 받았어. 그래도 내가……내 인생에 보람이 있구나 싶더라고."

"거참."

[수혁. 눈물 나오는데요? 이거 처음인 거 같은데.]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눈물이 나왔다.

시야가 흐려진다 싶더니만, 이거 때문인 듯했다.

"어? 수혁이 왔네?”

“야, 수혁아. 사모 왔다.”

"어, 어. 안녕하세요."

"뭐야, 울어? 그렇게 반갑니?"

진득하게 울 시간도 없었다.

병원 갔다던 사람이 돌아와서 그랬다. 아니, 사실 그건 별거 아닌 이유였다.

[수혁, 눈물 멈춰 봐요.]

'그게 말이 되는 말이냐고 생각하냐?'

[이 사람 환자일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아.'

그래, 이제 멈춰야 했다.

원생이 아니라, 의사가 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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