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8화 효도 (2)
원장이 스스로 분에 넘치는 호강에 빠졌단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사모는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아니, 난관이라기보다는 이것도 호강이라고 보는 게 맞을 터였다.
원장에 센터장에 어디선가 나타난 조태진부터, 곁에 왈랑왈랑 교수들만 벌써 넷이 붙어 있었다.
"이비인후과 쪽일 거 같다는 거지?"
“네. 근데 어쩌면...... 신경외과 쪽일 수도 있어요."
“응. 둘 다 대기시켜 놨어."
“대기요? 응급으로 할 건 아닌데……?”
"진료 보라면 봐야지. 네가 그 두 과 진료 본 게 벌써 몇 케이스야?"
“아……. 하긴, 많이 보기는 했죠. 지금 어디 계시는데요?"
이현종은 수혁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대기하라고만 했지, 확인은 안 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일행 중에는 세심한 편에 속하는 신현태가 있었다.
"코엑스에 있으라고 했어. 거기면 뭐, 오는 데 15분이면 오니까."
“아……. 두 분 다요?"
“응. 둘이 친해. 원래 이엔티랑 신경외과 조인트 오피도 많잖아."
"그......."
일행 중에서 세심한 편이라는 거지, 객관적으로 세심한 건 결코 아니었다.
'둘이 친하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좀……'
애초에 이엔티 입장에서는 신경외과에서 요청하는 거에 응하는 것뿐 아닙니까………
덤탱이 쓰는 기분이나 안 들면 다행일 거 같은데요?
"하여간. 너 뭐 의심 가는 질환이 있으니까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지?"
이번에 입을 연 것은 이현종이었다.
정신없는 와중이었지만 환자를 보는 것이기에, 수혁은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있었다.
“아, 네, 후각 쪽일 거예요. 이상 후각일 것 같은데……….
수술 후 예후 같은 걸 보려면 일단 지금 후각이 어떤지부터 알아야 할 것 같아요."
“그럼 후각 검사를 해야겠네?”
“네. 그렇죠. 뭐 지금 당장 할 필요는……… 뭐 하세요?”
"전화. 일단 이엔티부터 불러야지. 어…… 김효열 교수? 지금 와야겠는데?”
수혁의 말에 이현종은 급히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상대는 퍽 당황한 목소리였다.
"네? 지금요? 저 지금 물멍 카페 방금 들어왔는데."
“물멍 카페? 그게 뭔데.”
"그…… 물 보면서 멍하니 있는 카페요."
“시간 낭비하고 있다는 거 아니야?"
“아니…… 이게 요새 얼마나 인기인데...... 시간 낭비라뇨. 힐링 타임이에요."
“네가 힐러인데 힐링을 네가 하고 있으면 어떡해. 빨랑 와 와서 후각 검사 좀 해줘."
수혁과 신현태, 조태진 그리고 안대훈은 저도 모르게 대화에 집중하게 되었다.
확실히 이현종하고는 말을 오래 섞으면 안 된다는 격언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힐링하고 있다는데 힐러 드립이 나올 줄이야.
사모도 자기가 환자로 와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 그거 할 줄 모르는데요……?”
"뭐? 너 이비인후과 교수 아니야?"
“네, 맞죠."
“그중에서도 코 아니야?"
“비과 맞죠.”
“근데 후각 검사를 못 해?”
"그건 검사실에서 하는 거예요…...”
“어휴……. 되다 만 놈 같으니. 이러니까 이비인후과가 인마, 인기가 바닥이지.”
“3년제 되신 과 교수님이 그런 말을 해도 됩니까?”
“지네 과 검사도 할 줄 모르는 찐따 교수 말이라 그런가, 안 들리는데.”
그러다 할 말이 없어지면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 인간이었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아니, 교수님…….”
"하여간 와서 검사 좀 해. 우리 수혁이 은인이시라고, 대충해서 되겠어?"
“얘기는 저도 듣기는 했는데…….”
“너도 인마, 은혜 입은 적 많지 않아?"
“저는 그렇죠. 근데 검사실 친구도 그럴까요?"
"너는 교수가 되어 가지고 검사실 친구한테 그 정도 마음의 빚도 못 지워 놨어?"
게다가 일단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어떻게든 그 방향으로 끌고 가는 데 도사였다.
김효열 교수도 처음에는 반감이 한가득이었다.
기껏 물멍 카페 왔는데 바로 오라고 해?
하지만 듣다 보니 내가 개새끼였다.
'정말 나는 뭐 하는 새끼일까.'
왜 검사도 직접 하지 못하는 걸까?
심지어 검사실 직원한테 은혜도 못 베풀었고.
"그……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어떻게든 해. 인마, 여기 어떻게 할 거야. 수혁이 은인이시라고. 일생에 다시 없는 은인이신데."
“아……. 그, 알겠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라고."
해서 죄송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덕분에 후련해진 이현종은 껄껄 웃었다.
“됐다."
되기는 뭐가 됐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악역이 하나 있으니 나머지는 편했다.
일요일에 후각 검사라니.
당장 내일 하려고 해도 예약이 쭉 있어서 무리일 텐데,
수혁은 아버지에게 신뢰의 눈빛으로 보답한 후, 사모를 돌아보았다.
"오늘 바쁘시겠어요."
"어...... 나는 뭐. 시키는 대로 할게."
사모는 얼어 있었다.
당연했다.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까지 나오니, 어쩌면 나한테 큰 병이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을 거다.
"네 그럼 쭉 찍죠."
"응, 그래. 일단 라인부터 잡을까?"
"네, 사모님. 이쪽으로요."
"어.…. 어어."
그래 봐야 여기 온 이상 소용은 없었다.
사모는 간호사 손에 이끌려 침대에 걸터앉았다.
간호사는 교수진이 엄선한 시니어답게 능숙한 손길로 사모의 팔을 걷고는 단박에 바늘을 꽂았다.
마른 데다가 긴장한 탓에 혈관이 숨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은 없었다.
“자, 그럼 CT부터 찍지.”
“네.”
그렇게 라인 달린 사모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교수 넷, 레지던트 한 명이 나섰다.
“대훈아. 너는 이제 슬슬 공부하러 가야 되지 않니?”
조합이 좀 이상하지 않나.
보통 이럴 경우엔 레지던트 잘못이라고 보면 되었다.
특히 안대훈은 3년 차고, 다른 3년 차들은 전문의 시험을 위해서 나간 지 오래였다.
"네? 아, 뭐...... 전문의 시험이야 쉽죠."
하지만, 거기다 대고 안대훈은 실로 시건방진 답을 해 댔다.
물론 수혁에겐 전혀 건방지단 생각이 들진 않았다.
“게다가 이번에 역대급으로 쉬울 거라던데요? 작년에 난이도 미쳐 가지고...... 저희 보건복지부 경고받았다면서요."
"아, 맞네."
일단 안대훈의 실력이 어마어마하지 않나.
이 녀석이 전문의 시험에서 떨어진다면, 그 시험이 잘못된 거라고 봐도 무방했다.
안대훈은 수혁의 머릿속에서만은 이미 전문의였다.
아니, 전문의 중에서도 꽤 실력 있는 의사는 되었다.
안대훈이 치열하게 보내온 지난 3년은 켜켜이 쌓여 그를 대단한 의사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번에 시험 누가 내려가지?"
“아…… 아직 연락이 돌진 않은 거 같습니다. 또 우창윤 교수님이라는 게 함정이긴 한데……
아마 대충 족보 태우지 않을까요? 이번에 95% 이상 안 나오면 보복부에서 난리 날 거 같은데."
"하긴."
다른 과도 아니고 내과이지 않나.
대학병원의 근간이 되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대한민국 의료의 기둥이라고 봐도 되었다.
군의료에서도 그렇고, 민간에서도 그렇고.
내과 의사들이 주기적으로 심각한 환자들을 치료해 주지 않으면 큰일이 날 수밖에 없었다.
"사모님. 이제 찍고 오시면 돼요. 제가 검사 싹 하고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어, 어어."
수혁은 그렇게 안대훈과의 대화를 마치곤 사모님을 CT실로 들이밀었다.
윙.
CT답게 검사는 빨랐다.
다음은 MRI였는데, 이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렸다.
아무리 머리만 찍는다고 해도 20분에서 30분은 걸리는 검사라 그랬다.
그사이에도 교수들은 쉬지 않았다.
아까 찍은 CT를 두고 종알종알 떠들어 대고 있었다.
"여기 종양 있네.”
"응, 좌측 이마굴에…… 이거 매스지?"
“매스 이팩트(종양 등이 주위 신경을 압박하는 것)라고 봐야죠. MRI에서 명확하게 보일 거
같은데...... 그게 아니고서는 뼈가 이렇게 밀릴 수는 없죠."
"악성은 아니겠지? 악성이면 골 아플 위치인데."
마지막에 근심 어린 얼굴로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조태진이었다.
수혁은 그가 그냥 집에 있다가 온 줄 알고 있어서, 이상하다 싶었던 마당이었다.
그런 사람치고는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랬다.
실상은 홈마 노릇 하느라 시골에 갔다가 잠도 차에서 자고 왔기에 힘들어 죽기 직전이었다.
"음…. 악성 가능성은 병력 상 적긴 해요. 다만 이 근방에서 발생 가능한 양성 종양들 중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악성으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으니……. 조직 검사 하나 하고 안심하기보다는 종양 전체를 떼 봐야 할 거 같아요.”
“아, 그렇지. 그렇긴 하네.”
허나 굳이 '왜 그리 힘들어 보여요?'라고 묻지는 않았다.
대신 의학적인 소견만 말했다.
조태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땅땅땅땅.
그사이에도 기계는 계속 돌아갔고, 모니터에 천천히 영상이 뜨기 시작했다.
"옳지 여기 보이네."
“딱…… 후각 신경 있는 곳에 종양이 있네. 되게 큰데……?”
“네, 제가 듣기로 최소 4년이에요. 그전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니……. 이만하면 사실 작죠."
"와……. 난 이렇게 큰 건 처음 보네. 요새...... 요새도 이럴 수가 있구나."
MRI 소견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들기 시작했다.
다들 온실 속의 화초, 큰 병원 교수들 아니랄까 봐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서는 이렇게 방치된 환자를 보기 어려워서 그랬다.
대한민국 의료 수준이 높아져서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울, 그중에서도 강남 인근에서나 통용되는 말일 뿐이었다.
여전히 세상엔 어려운 이들이 많았다.
“종류가 뭘까? 슈바노마(신경초 종양)? 아닌데. 이건 엄청 드물 텐데.”
“근데 위치상…… 그거 말고 고려할 만한 게 없기는 해요. 증상도 그렇고요. 만약 악성이었다면
저 정도 크기에 진통제로 가라앉는 두통만 일으켰을 리가 없어요."
"하긴, 또 그렇네...... 그럼 후각 신경에 발생한 슈바노마일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영상 보기 전부터?"
"그거 말고는 증상에 들어맞는 질환이 없어서요."
"역시……. 근데 이거 치료는 어떻게 하나?"
치료라.
수혁도 그게 고민이었다.
수술을 하긴 해야 할 텐데, 대체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까.
코 안으로 할 수 있을까?
그럴만한 사이즈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머리를 열어?
'머리를 여는 건...... 그것만으로도 후유장애를 남길 수 있지.'
[네, 아무리 기술이 좋아졌다지만...... 최소 침습 시술이나 수술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죠.]
치료에 대한 고민은 아무래도 좀 단편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쪽은 수혁의 전문 분야가 아니니까.
"휴, 왔습니다."
그때, 김효열 교수가 들어왔다.
보아하니 진짜 서둘러서 온 듯해 보였다.
뒤에는 웃는 낯의 사내가 하나 보였는데, 수혁은 아는 얼굴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교수님. 교수님 은인께서 오늘 검사해야 한다고요? 제가 드디어 은혜를 갚게 되었네요."
전에 봤던 환자였는데, 알고 보니 이비인후과 검사실 직원이었던 모양이었다.
잘된 일이었다.
은혜를 은혜로 갚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진료가 예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