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2화 원장님 (2)
“원장님, 일단 갈까요?"
수혁은 일부러 목소리 톤을 높이고, 에스코트에 나섰다.
“네, 원장님, 같이 가시죠."
사람 좋기로 유명한 조태진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조태진이 아무래도 더 능숙할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수혁이 케이스를 몰아받고 있다곤 해도, 조태진의 경험을 따라갈 수는 없어서 그랬다.
이 격차는 아마도 좁혀지지 않을 터였다.
애초에 태화 의료원이라는 병원 자체가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다 보니, 조태진 또한 매일매일 쌓고
있는 케이스 수가 많아서 그랬다.
"아, 네."
덕분에 원장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단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사모 정을 하고 있다 보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온 김에 한번 검사하라니까 따라다니는 거지, 마음 같아서는 그저 사모 곁에 있고 싶었다.
-수술하는 데 오래 걸려서, 어차피 그거 하는 동안에는 밖에 계셔야 해요. 그리고 언제 와서 검진하시겠어요?
수혁의 말이 아니었다면 필시 그랬을 터였다.
허나 수혁이나 다른 교수들의 말은 꽤 설득력이 있었고 해서 원장은 일단 돌고 있었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사실상 VVIP들조차 못 받는 대우를 받고 있는 셈이었다.
일단 전담 간호사도 있는 데다가, 거기에 교수까지 둘이나 낑겨 있지 않나.
"어디로 가요?"
“아, 네. 일단 혈액 검사실로 갑니다."
"어제 뽑지 않았나……?"
“아, 금식이 선행되지 않아서요. 오늘 또 뽑습니다. 어제는 나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항목에 대해서만 했습니다."
물론 교수들이 딱히 도움이 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직급이 사실 뭐가 중요하겠나. 이걸 몇 번 해 봤느냐.
이게 사실 제일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럼 이거 하고 어디로 가요?"
“그……저희가 무전으로 실시간 체크해서 비로 갈 수 있는 곳으로 갑니다.”
“아……와. 우리 병원 좋네요?"
간호사는 살짝 어이가 없었다.
교수가 되어 가지고 우리 병원 좋다고 하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란 말인가.
허나 수혁은 아직 나이가 어렸고, 딱히 검진을 해 보지 않은 인간이었다.
간호사는 너른 마음으로 이를 이해하고 웃으며 답해 주었다.
“좋죠. 대학 병원 검진 중에서는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잉, 그럼 여기보다 더 좋은 데도 있어요?"
"검진의 퀄리티까지 계산하면 압도적 1등인데, 간혹 로컬 센터들이 친절도나 편의도에 있어서는 더 우수한 경우도 있습니다. 일단 가격이 저희는 좀 비싸니까요."
"얼만데요?"
간호사는 수혁의 순수 어택에 당황했다가 속삭였다.
“지금 이 정도 검진이면 300도 넘죠."
“와……미친……”
시늉만 했을 뿐, 목소리를 딱히 낮추지는 않아서 원장은 고스란히 정확한 금액을 들을 수 있었다.
수혁도 놀랐지만 원장만큼은 아니었다.
세상에 300?
이 돈이면.…..
'우리 애들 치킨을 몇 번 먹일 수 있는 돈이냐, 이게.'
바로 두고 온 애들이 떠올랐다.
너무 의존하지 않을 수 있도록 거리를 두고 있긴 했지만.
생각보다 본인이 그 거리를 지키기는 어렵다는 걸 니이가 돌수록 절감하고 있었다.
“자, 그럼 일단 피 검사부터 하시고요."
“네.”
눈물이 막 나려는 찰나,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아야."
“우시네. 피검사 안 해 보셨나 보다."
타이밍 좋게 눈물이 찔끔 나와서 창피를 면할 수 있었다.
아니, 나이 60 넘어서 피 뽑고 우는 게 더 창피한 건가.
하여간 그렇게 피를 뽑고 있을 때쯤, 수혁과 조태진이 전담 간호사에게 말했다.
“사실 어제 피 검사에서 간 종양이 아주 강력하게 의심되는 소견이 보였거든요."
아니, 조태진이 말했다.
그는 혈액종양내과 의사 특유의 무거운 말투를 고수했다.
“아, 네.”
덕분에 간호사도 자세를 낮추었다.
원래 혈종 교수가 이렇게 말하면 자연히 태도가 변하는 법이었다.
오랜 시간 죽음과 삶을 맞대고 살아온 이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보내온 죽음의 무게가 묻어나기에 그랬다.
"CT랑 MRI가 좀 급한데, 어떻게 안 되나요?"
“아……두 검사는 예약이 들어가 있어서요. 지금 한 한 시간 정도 있다가 시행할 예정입니다.”
“한 시간? 그 사이에 뭐 하는데요?”
후두 내시경이랑 청력 검사랑 시력 검사랑 치과 검진 등등……좀 가벼운 검사들 위주로 돕니다.”
“아…… 그거 좀 미룰 수 있어요? 센터에서 찍으면 되는데, 사실. 수혁아, 가능하지?"
암을 앞에 둔 의사는 누구라도 서두르게 되기 마련이었다.
특히 친구의 지인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통증을 유발했다면……사실 이미 끝났을 수도 있는데…...'
조태진은 수혁을 바라보면서, 원장의 끝을 생각하고 있었다.
워낙 많은 죽음을 보다 보니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하게 되는 생각이었다.
'아직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던데……'
하필 어제 수혁을 미행해 따라간 홈마가 조태진이지 않았나.
안쪽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밖에서 관찰하기만 했지만.
사실 그전에도 여러 번 가서 봉사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이 부부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대강은 알고 있었다.
아니, 꽤 잘 알았다.
‘김다현 회장 말로는 따로 돌린 자산도 없고……정말 그냥 몸 갈아서 운영했던 곳이던데. 흠.'
조태진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수혁을 빤히 보고 있었고,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센터도 대기가 있을 수는 있는데 아무래도 짧죠. 센터 내 환자들 아니면 응급실 환자들만 쓰니까요. 응급실 환자들도 응급실에서 소화 안 될 때만 오고."
“아, 그럼 거기가 좋겠습니다. 간 종양이라면......혹시 그게."
“아마 암일 겁니다. 그것도 꽤 진행한."
"아.”
전담 간호사도 의료인이지 않나.
말기 암, 그중에서도 간암 환자의 최후가 어떠한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간호사는 얼굴을 굳히고 있다가, 원장이 나오는 걸 보고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네, 잘 하셨어요?"
“아, 네. 따끔하네요."
“그럼......이제 CT 찍으러 갈까요?"
“네네.”
그러곤 센터로 향했다.
수혁이 말한 대로 센터 내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쪽은 환자 관리가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센터라서 그랬다.
필요한 검사만 딱딱하고 있으니, 애초에 검사를 오버해서 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나마도 환자가 원하거나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정말로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었다.
위잉.
하여간 원장이 들어가고 난 후, CT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영상이 넘어왔다.
검진 목적이다 보니 처음엔 폐에 대한 고해상도 CT가 넘어왔다.
"여긴 괜찮네."
“네. 전이는 없어요."
"간에서 생기면 생각보다 폐로도 꽤 잘 넘어가는데."
"그러게요."
그렇게 한 텀 끝나고 복부 골반 검사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조영제도 들어갈 거라서, 수혁과 조태진은 영상만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원장도 번갈아 살폈다.
간혹 조영제 알레르기가 있는 환자들이 잘못되는 경우도 있고 해서 그랬다.
10만 명당 1명 정도로 카운트될 정도로 드문 부작용이지만, 발생한 사람에게 통계가 의미 있던가.
의사로서는 어쩔 수 없이 다 열심히 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
"이런 망할."
하여간 기다리고 있다 보니 복부 CT가 넘어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둘은 탄식했다. 간에 보이는 종양의 크기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좌엽에……이거 다 종양이야?"
“네. 무슨......크기가......”
수혁조차 한 번에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일단 제일 크게 보이는 컷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여기, 이 컷. 음...…”
“14cm..….”
"가로는 9.3cm.”
“이거 코로날 뷰(단면 촬영) 되나?"
일단 가로세로 크기는 나왔다.
9.3에 14cm.
이것만 해도 거대 종양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만한 크기였다.
뭐가 큰 건가 싶다면, 지금 당장 자신의 배에 손을 대고 가늠해 보면 느낌이 올 터였다.
이런 게 배 안에, 그것도 간이라는 단일 장기에 있다고 생각해 보라.
"네? 아뇨. 지금 당장은……다 찍고 리모델링해야 합니다."
"음, 그럼 그냥 제가 계산할게요. 이게 0.625 컷이니까…… 세 보면......"
"그게 돼?"
“저는 돼요.”
수혁은 스크롤을 굴려서 수직 높이를 셌다.
불가능할 만한 일은 아니어도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릴 만한 작업이었지만, 수혁은 진짜로 금세 했다.
“7.8cm. 와......이게 부피로 따지면 거의 뭐...... 사과만 한 게 들어가 있는 건데요?"
“사과도 아니고 배야. 배. 근데...... 이걸 어떻게 지금까지 모르셨지?"
"일단 종양이 파열됐어요. 피가..... 복강 내에 고이고 있는데, 이거."
결과는 참혹하다 해도 좋았다. 커도 너무 컸다.
심지어 얌전히 간 실질(실제적인 기능을 하는 곳)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큰 게 어찌 간 실질에만 있겠나.
당연하게도 이곳저곳을 침범했는데, 그곳이 하필 다 중요한 곳이었다.
“간문맥에......왼쪽 간동맥까지 들어갔어요. 아…… 이거……”
"아......"
간문맥.
간으로 들어가는 정맥인데, 그냥 인체에서 제일 중요한 혈관 중 하나라고 보면 되었다.
간동맥?
이름만 봐도 중요해 보이지 않나?
이런 것들이 싹 다 먹혀 있었다.
'음......'
[근데 좀 이상하네요?]
일반적인 간암, 즉 간세포암이 단일 종양으로 저렇게까지 커지는 경우가 흔하던가?
'간의 다른 부위로의 전이가 없어. 융합의 흔적도 없는 거 같고……'
[게다가 지금 넘어오는 영상을 보면…… 아까 것도 그렇고요. 전이가 없습니다. 혈관을 넘었다면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는데요.]
'그러게. 으음......'
[다른 질환일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간세포암이 아니더라도, 저건 악성일 거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네, 그렇습니다.]
다른 질환일 가능성이 있었다. 악성이겠지만.
그래도 간세포암보다는 나을 터였다.
아마도 그렇지 않겠나?
간세포암은 그야말로, 예후가 극악한 암 중 하나이니까.
“MRI도 소견이 크게 다르지 않아."
"PET CT도 찍어야겠는데…..."
"응. 이럴 거 같아서 내가 어제 전화해 뒀어. 취소되거나 하는 거 있으면 바로 연락 올 거야.”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김진실 교수님께 의뢰해 놔서……조직 검사도 가능할 거야."
"아!”
[아!]
수혁은 조태진의 말을 듣고 나서야 본인의 시야가 좁아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해서 꽤 놀랐는데, 그래 봐야 바루다 정도는 아니었다.
수혁이야 인간이니까 지인의 병에 영향을 받는다고 쳐도 자신은 왜?
이상한 일 아닌가?
“지금 오래.”
“아, 네."
하지만 검사가 쭉 진행 중이다 보니 내색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건 조직 검사였다.
김진실 교수로서도 시간을 억지로 쥐어짜서 해 주는 검사.
때문에 일단 달려야 했다.
'난......검진 안내하러 온 건데......'
다들 뛰다 보니 간호사도 덩달아 같이 뛰었는데, 조직 검사실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검진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저, 이건 무슨 검사죠?"
원장의 말에 뭐라 둘러대야 할까.
조태진과 수혁은 모르쇠를 치며 간호사만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시발놈들이……'
검진이 원래 바늘로 배도 푹 찌르고 하죠.
이런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아.”
저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