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4화 원장님 (4)
"그래? 그렇다고 해도..….”
다학제.
질환과 관련된 의사들이 모두 모이는 회의.
암이라고 하면 수술하는 과 의사랑 항암 하는 과 의사 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실은 영상의학과 핵의학과 병리과, 방사선종양학과 등 훨씬 더 많은 과 의사들이 모여야만 했다.
당연히 모이게 하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일단......윈발성 간 신경내분비 종양이라는 건 좋은 사안이에요. 이것도 그리 예후가 좋은 암이라고 보기는 어려워도 간세포암종보다는 낫죠.”
허나 이수혁의 은인이라는 건 생각보다도 더 힘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이현종과 신현태가 이리저리 지랄 아니 난리법석을 피우고 돌아다닌 덕에, 하루가 채 저물기도 전에 관련과 모두가 통합진료센터에 모였다.
원장은 아직 자기 상황을 잘 모르는 상태인 데다가 간 조직 검사까지 했기에 자리에 누워 있었다.
사모는 수술 후 우선 중환자실로 옮겨져 경과 관찰 중이었고, 때문에 회의는 그 누구의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선 지금 입을 열고 있는 건 외과 교수, 그중에서 간담췌 파트의 장준혁이었다.
"그럼 수술은 가능하시겠습니까?”
“절반을 절제하게 될 텐데…… 환자가 간염 바이러스 병력도 없고, 간경화 등의 병변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절제 자체는 생존에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겁니다."
질문을 주도적으로 던지고 있는 이는 조태진이었다.
사실 그는 고형암을 주로 보는 사람은 아니다 보니 사이드로 빠져나와야 하지만, 우선 회의 자체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만큼은 이현종도 신현태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암은 그 둘의 전문 분야가 아니니까.
“절제 범위 자체는 괜찮다는 컨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원발성 간 신경내분비 종양은
절제연에서의 재발이 상대적으로 흔한 암종이지 않습니까? 재발을 방지하려면 보다 공격적인 치료가 필요할 것 같은데......”
조태진의 시선이 고형암, 그중에서도 주로 복강 내 암을 보는 혈액종양내과 교수에게로 향했다.
나이가 이제 55세를 넘긴 의사로서는 완연한 전성기에 다다른 이였다.
“원발성 간 신경내분비 종양에 대한 경험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사실 가이드라인 자체도 없어요.
하지만 지금까지의 논문이나 케이스 리포트 사례를 살펴보면 항암 방사선의 역할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태화의 시스템이 어떠한가.
개인적으로 교수를 싫어할 수는 있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병원이었다.
특히 지금 입을 연 교수만큼의 연륜이 쌓인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태화에서 정상적인 커리어를 쌓아 올라가고 있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개고생을 하기에 그러했다.
그 당사자에게는 고생이겠으나, 실력만큼은 보장할 수 있다는 얘기로 이어졌다.
당연히 이 교수의 말 또한 귀담아 들음직했다.
“때문에 수술장에서 절제연에 암세포가 남을 것이 의심되는 상황만 아니라면...... 지금은 우선
완전 절제를 최우선 목표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으음.”
조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액암의 경우는 보통 수술보다는 항암이 주요 치료가 되는 경우가 많아서 가슴으로는 납득이 어려웠으나, 머리로는 이해했다.
암도 다 같은 암이 아니라, 각각의 병리적 특성에 따라 암의 특징 자체도 다 달라지지 않던가.
'그래...… 음. 맞지?'
조태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보호자 아니, 수혁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NET…… 그중에서 PLNET에 대한 보고는 거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 음. 저 교수님 말에 틀린 게 하나도 없어'
[결국, 수술이 가능한지 아닌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무력하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니.'
[진단을 이렇게 빨리 내린 건 수혁과 저입니다.]
'그래도 치료 지침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언을 할 수가 없네.'
수혁은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많은 내과 의사들이 느끼는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확한 진단을 내린다고 해서 반드시 치료로 이어지던가?
제아무리 현대 의학이 빠르게 발전해 오고 있다 해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왕왕 있었다.
암이 그러했다.
벌써 4세대 항암제가 나오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암은 인류의 가장 큰 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수혁아?"
해서 조태진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조태진은 수혁이 종종 저런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어서 애써 불러 물었다.
그제야 수혁은 회의실 내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곤 입을 열었다.
“네, 그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혹 다른 과 교수님들은......의견이 어떠하신지요?"
다학제이지 않나.
애써 불러 모은 교수들의 의견은 다 들어 봐야 했다.
“네, 영상…… 다 리뷰해 봤는데요."
우선 나선 것은 김진실 교수였다.
복부영상의학회의 신진 교수로 최근 젊은 의학자 상까지 받은 몸이니만큼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훅 하고 쏠렸다.
“우선 절제를 반보다는 더 해야 할 가능성이 큽니다. 보다 정확한 사안은 수술장에서 직접 보셔야겠지만 영상을 보시면.…..
저기 파열된 부위에서 좀 더 바깥쪽으로 조영증강이 되는 부분이 있어서......"
"아.”
김진실 교수의 말에 장준혁 교수가 눈을 부릅뜨고 영상을 살폈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간담췌 파트는 복부영상의학과와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파트 아니던가.
애초에 수술 계획을 영상에 묻는 경우도 있는 만큼, 둘 사이는 무척 긴밀했다.
“그렇네요. 음. 그렇더라도...... 절제 후 생존 자체는 매니지 여부에 따라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네, 저희도 돕도록 하겠습니다."
소화기 내과 간담도 파트 교수도 거들고 나섰다.
관리를 저쪽에서 도맡아 해 준다면, 수술 후 관리는 물론이거니와 추후 관리 또한 별문제 없을 터였다.
“전이 여부는 어떻죠? 제가 봤을 때 없었는데."
외과 교수의 말에 김진실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핵의학과 쪽을 바라보았다.
“네, 현재 시행한 CT나 MRI에서는 전이 소견이 관찰되지 않았습니다. 림프 노드에도 전이가 없는,
원발성 종양만 관찰되었습니다. 다만 PET CT 소견에 대해서도 들어야 할 거 같습니다.”
공이 넘어왔음을 직감한 핵의학과 교수는 레지던트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화면에 곧 PET CT가 떴다.
사실 PET CT는 기기가 워낙 좋아서, 다른 과 의사들이나 인턴들도 판독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 수 있지만,
명확하지 않은 장기에 대한 판독은 무조건 전문의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하여간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충분히 공부하고 또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기에, 그렇게 광오한 사람은 없었다.
“네. 전이는 전혀 없습니다. 원발성 병변만 있고……잘 보시면 혈관을 먹기는 했지만 세포가 타고 가지 못하고 그냥 막힌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더 자세한 것은 수술장에서 직접 관찰하고 판단해야 하지만...... 우선 영상 상으로는 전이가 전혀 없습니다.”
영상의학과, 핵의학과 모두 전이가 없다고 말한 상황이었다.
동시에 둘 다 수술장에서 자세한 관찰이 필요하다고 말을 했더랬다.
자연히 장준혁 교수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이수혁 교수의 은인인데 수술까지 어렵다 이거지.'
한숨이 절로 나와야 마땅한 상황이었지만, 장준혁 교수는 도리어 웃었다.
"제가 최선을 다해 보죠. 저게 저렇게 큰 데다가 터질 위험까지 있어 보이니...... 정규 일자로 수술 잡는 대신 토요일로 한번 잡아 보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런 반응에 수혁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뒤에 있던 이현종, 신현태 그리고 조태진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보면서 장준혁은 좀 어이가 없었다.
'아니 댁들은 별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들었는데……?'
어이가 없었지만, 하여간 고개는 마주 숙였다.
누군가를 걱정하는 마음은 늘 갸록하지 않던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장준혁은 그렇게 말했고, 다학제에 모였던 의사 대부분은 그 길로 원장에게로 갔다.
'올게 왔구나.'
원장은 그 무리를 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아무리 병원 경험이 없다고 해도 바보 천치는 아닐진대, 어찌 이 흉흉한 분위기를 깨닫지 못하겠는가.
'나, 죽는 거니......수혁아.'
애들은 어쩌나.
사모는 어쩌고.
우리 모두 시한부 인생이라지만 이제 갓 60 넘은 나이에 죽음이라니.
적어도 80은 살 거라 여겼던 원장은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원장님."
수혁은 그런 원장의 손을 잡아 주었다.
'나쁜 소식 전하기는 대체 언제쯤 쉬워질까?'
[그게 쉬워지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지 않을까요?]
'그것도 그렇네.'
[쉬워지기를 바라는 것부터가 좀……]
바루다의 시비를 간단히 무시하고는 말을 이었다.
“아까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간에 종양이 하나 있어요."
"으음. 배가 좀 아팠는데…… 그게 그걸까?"
“네. 몇 달 되셨다고 했죠?"
"응."
"그......."
그때 왔어야지 뭐 했냐는 말이 턱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가 다시 내려갔다.
환자를 비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다.
지금은 그저 치료하는 데만 신경 쓰게 하는 게 최선이었다.
“아닐 수도 있어요. 복은 흔한 증상이라. 내시경 소견 보니까 표재성 위염도 있긴 하더라고요.
원래 애 많으면 스트레스 쌓이지 않겠어요?"
"그건 그렇지."
농담도 던져 봤는데 웃음이 터지진 않았다.
'겁이 많으시네.'
[누구라도 이러지 않겠어요? 지금 모여든 사람 수를 세어 보세요.
병원에는 의사 얼굴 많이 보면 볼수록 죽을 확률이 올라간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수혁은 이제 다른 손으로 원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간을 찔렀다가 빼 놔서, 원장은 그저 누워만 있었다.
"하여간, 검사를 해 보니까 암이에요."
"아."
“암은 암인데 우리가 보통 보는 간암은 아니에요. 전이도 없고…… 딱 하나만 있어요."
수혁은 다른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암을 꺼내놓은 다음부터는 말을 빨리했다.
“수술이 가능합니다. 수술하면 완치 가능성이 크대요. 여기 이분이 수술해 주시기로 했어요."
장준혁은 손가락이 돌아오자마자 바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외과 장준혁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꼭 이수혁 교수님 은인이라서가 아니라, 제 이름을 걸고서라도 완치시켜 드리겠습니다.”
이 양반도 말이 빨랐다.
“수술은 이번 주 토요일에 하려고 합니다. 다행히 암 외에 다른 전신 문제는 없어서 퇴원하셨다가
금요일에 오셔도 됩니다. 마취과랑은 얘기가 되어서…… 혹 만나실 분이 계시면 만나시죠.”
“애들 말고는…… 원에 갔다 와야겠네요. 그럼."
“네. 그렇게 하시죠. 사모님 수술은…… 들으셨겠지만. 아주 잘 되었습니다. 전혀 문제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네, 감사합니다.”
원장은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시간은 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