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6화 자책 (2)
이현종의 말대로, 이현종도 그런 일을 겪었다는 건 딱히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듣는다고 사그라들 죄책감 같았으면, 수혁은 애초에 느끼지도 않았을 터였다.
감정 체계가 한없이 긍정적으로 돌아가는 사람이지 않나.
더욱이 입을 떼던 이현종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늘 유쾌하던 사람의 내면에 이만큼의 어둠이 있었다니.
‘그래도…… 힘이 되긴 하는데……’
혼자가 아니다.
수혁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이현종 외에도 신현태, 조태진 그리고 안대훈이 그와 비슷한 얼굴을 한 채 각기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냥 있었다.
이현종 말고는 딱히 ‘들어와서 말을 했나?’ 싶을 지경이었다.
‘음…… 이상하게 이게 힘이 되네.’
[저는 이해는 안 가는데, 하여간…… 수혁의 자율신경 톤이 안정화되고 있긴 합니다.]
그럼에도 위안은 되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술을 까지 않았나.
수혁으로서는 굉장히 낯선 일이었다.
바루다가 들어오기 전에도 딱히 뭔가를 함에 있어 확신이 없던 적이 드물었으니.
바루다와 동행하고부터는 드문 정도가 아니라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은인의 아픔은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음.”
“짠 해 줘?”
“아, 네. 아빠.”
수혁이 한결 나아진 얼굴로 술잔을 집어 들자, 이현종이 물어왔다.
얼굴을 보니 여전히 괴로워 보였지만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워 보이진 않았다.
아마도 옆에 있는 이들 덕일 터였다.
그중에서도 신현태가 가장 크지 않았을까.
그 덕에 이현종은 아버지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었고, 이현종 덕에 수혁은 자책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도 해.”
“네, 저도.”
거기에 더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상대적으로 평탄한 인생을 살아온 이들이 잔을 부딪쳐 왔다.
생긴 것만 보면 적어도 안대훈은 온갖 평지풍파를 다 겪었어야 했을 거 같지만.
의외로 그냥 평범한 집안 출신이지 않나.
때문인지, 다들 이해하네 어쩌네 하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응, 그래. 삼촌, 형. 대훈아. 고마워.”
그렇다고 위로하고픈 마음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수혁은 잔을 맞대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신현태, 조태진, 안대훈은 오늘 오길 정말 잘했단 생각과 함께 기분 좋게 술을 들이켰다.
그렇다고 평소처럼 화기애애한 대화가 마구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래, 뭐…… 장준혁 교수가 다른 건 몰라도 수술은 진짜 잘하거든.”
“어…… 위에 있는 분들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분들도 아마 수술할 일 있으면 장 교수한테 맡길 거야.”
“저도 듣기는 했어요. 진짜 잘하신다고.”
“어. 누가 그러던데. 간 이식에는 김승규지만, 그 외 복강엔 장준혁이라고.”
주로 외과에 관한 얘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대학 병원의 기둥은 내과고 내과만이 진짜 의사라는 생각을 가진 의사들이 모인 자리라는 걸 감안하면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허나 어찌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여전히 어떤 질환에 대해서는 내과적인 처치가 아무것도 못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심지어 방사선 종양학과의 어떤 교수는 ‘대체 내과에선 할 수 있는 게 뭐냐’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아무 말 할 수 없을 만큼, 암은 정말로 무서운 병이었다.
“백강혁 교수님은요?”
“아…… 그분을 가지고 오면 누구라도……”
“김승규 교수님도 백 교수님한테는……”
“아니, 왜 그분 얘기를…… 응? 아니, 잠깐만…… 그분 오실 수 있나.”
허나 더 무서운 존재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백강혁이었다.
평소라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백강혁에게 먼저 전화를 걸진 못했을 터였다.
말이 되나.
전화가 와도 최선을 다해서 피해야 할 텐데.
먼저 걸어?
특히 젊은 시절 멋모르고 갔다가 호되게 당했던 기억이 있는 이현종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르릉.
허나 아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
‘내가 진짜…… 얘를 사랑하는구나.’
양아들이라는 생각조차 잊은 지 오래긴 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수혁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마음을 먹은 지도 오래였고.
지금은 그저 행복한 수혁과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백강혁입니다.”
허나 백강혁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숨이 덜컥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어…… 협심증 아냐?”
“어어.”
옆에 있던 신현태가 경동맥에 손을 대었을 정도로 급격한 의식 변화를 일으켰다.
하지만 심장은 정상적으로 뛰고 있었다.
그냥 놀랐을 뿐이었다.
본능적인 반응이라고 해야 할까.
“뭐야. 어떤 놈이야. 이현종? 이 새끼 이름이 낯익은데.”
이현종으로부터 말이 없자, 백강혁은 늘 그렇듯 욕설을 내뱉었다.
일흔도 넘은 걸로 알고 있는데 여전히 성미가 괄괄하다니.
‘이상하게 욕을 먹으니까 안정이 되네.’
덕분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겠지만, 하여간 정신을 차린 이현종은 어렵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태화 의료원 이현종입니다.”
“아, 그래. 태화. 전에 왔었나?”
“네네. 전에…… 몽골에. 스리랑카도 갔었고요.”
“아…… 그래. 똘똘하던 놈. 근데 웬일이야. 이제 제2의 인생 살아 보려고? 안 그래도 나 이제 다시 전쟁터로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자, 그럼. 잘됐네.”
“아니, 아니.”
이현종은 눈앞에 백강혁이 있는 것도 아닌데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사실 뵈는 것도 없기는 했다.
전쟁터라니?
스리랑카랑 몽골만 해도 강혁과 함께라면 지옥이 되는데, 전쟁터를 간다고?
‘아니…… 이 양반은 왜 그 나이에 전쟁터를 가?’
왜 가긴.
사람 살리러 가겠지.
그거야 그런데…… 하여간에 이현종 자신까지 거기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요. 이수혁 교수 알죠?”
“아…… 알지. 그 친구가 와? 그럼 난 더 좋고.”
“아니……”
근데 또 수혁이가 더 좋다니까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물론 수혁이가 천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 천재지.
하지만 나도 천재잖아.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현종은 그런 생각을 할 자격이 있었다.
“그럼 네가 와?”
“아니,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그 이수혁 교수 은인이 있는데…… 아버지 같은 분이에요.”
“네가 아빠라며. 솔직히 아니지? 암만 봐도 안 닮았던데.”
“그…….”
탈룰라 아닙니까, 교수님?
친아빠는 아니지만 양아빠거든요?
“네, 그…… 보육원에 있었어요.”
“아, 보육원에 있었어? 더 얘기해 봐.”
다행히 강혁은 세상의 약자에 대해 묘한 책임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부채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하여간, 수혁이 고아였다는 말에 백강혁도 곧 조용히 듣기 시작했다.
“간에 원발성 신경내분비 종양이 발생했는데 그게 14cm가 넘는다는 거지?”
“네, 교수님. 혹시 이거…… 교수님이 수술해 주실 수 있을까요?”
“거참.”
수술 청탁.
강혁이 일부러 전화를 퉁명스럽게 받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래야 사람들이 전화 자체를 안 하니까.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청탁도 주니까.
허나 이런 경우라면 좀 얘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 태화 아닌가?”
“네.”
“다른 병원이라면 내가 들어갈 수도 있어. 누가 해도 내가 잘할 테니까. 태화라고 해서 예외는 아닌데…… 내과라 잘 모르겠지만. 거기 장준혁이라고 있는데, 모르나?”
“아…… 압니다.”
이현종은 진중한 백강혁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아니, 이 양반은 외국에서만 나도는 사람이 병원 사정은 어찌 아는 거야?’
덜컥 놀라기도 했다.
마침 수술해 주기로 했던 사람 이름이 백강혁의 입에서 나와서 그랬다.
“걔 꽤 잘하던데.”
“어떻게…… 어떻게 아세요?”
“걔도 얼마 전에 몽골에 왔었어. 잘하더라고. 꼬시려고 했는데 안 된다고 해서 한 대 때려 줬지.”
“아…….”
그래서 장준혁 교수가 한동안 쩔룩거렸구나.
몽골 가서 말 타다가 떨어졌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역시 무서운 인간이었다.
이현종이 그렇게 입을 헤 하고 벌리고 있는 사이, 백강혁이 말을 이었다.
“하여간 그 친구한테 맡겨 봐. 내가 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가겠지만…… 지금은 그게 안 돼. 전쟁 났어. 미친놈들이 21세기에 전쟁을 일으키네.”
“그…… 네, 알겠습니다. 근데.”
“근데 뭐.”
“총 쏘러 가시는 건 아니죠?”
의사니까 군의관으로 가는 게 당연하겠지만.
이 인간은 어쩐지…….
총을 쏘는 게 더 어울렸다.
무성한 소문 중엔 실제로 PMC에 있었다는 말도 있고.
일단 한번 보면 총 쏠 것 같은 인상이기도 하고.
스리랑카에 있던 이들의 말을 들어 보면, 진짜로 총을 쐈다는 얘기도 있었다.
“쏘게 되면 쏴야지. 근데 대부분은 야전 병원에 있을 거야.”
“아…… 네. 쏘게 되면 쏘는 거군요.”
“그렇지. 상대편에서 쏘는데 맞고 있을 수는 없잖아.”
“네네, 그렇죠.”
그래, 이것 봐.
쏠 거잖아.
하여간 잘된 일이었다.
장준혁이 훌륭한 의사라는 건 알고 있지만, 백강혁에게 인정받았을 정도였다니.
그렇다면 어찌 되었건 그보다 잘 해낼 사람은 없다는 얘기가 되었다.
돌아보니 듣고 있던 수혁도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백강혁 교수님이면 그때 그 몽골에서 본…… 이상하게 나 무서워하는 사람이지?’
[네, 그렇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실력은 최고입니다.]
‘그렇지. 실력은…… 상상 초월이었어.’
몽골에 다녀온 이후로, 한동안 태화 의료원 외과 계열 교수들이 죄다 한심하게 보였을 지경이었다.
왜 저렇게 하지.
백강혁은 다르게 하던데.
왜 저걸 못하지.
백강혁은 하던데.
이런 생각들이 자꾸만 떠올라서 아예 수술방에 안 들어갔었다.
“하여간 나 바쁘니까 이제 끊어.”
“네, 교수님. 그……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인생 지겹다 싶으면 건너오고. 내가 다시 신나게 해 줄게.”
“아니, 저는 여기서도 아직은 신나서요.”
“진짜 신나는 게 뭔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닐까?”
“아뇨…… 말씀만으로 참 감사합니다.”
이현종은 수혁의 안심한 얼굴을 확인하고는 곧 전화를 끊었다.
솔직히 말하면, 전화 통화를 통해서 뭘 얻어 낸 것이라곤 없긴 했다.
하지만 뭐랄까…….
위안을 얻은 느낌이었다.
세계 최고의 외과 의사가 잘한다고 한 의사가 수술을 하게 될 테니까.
이만하면 진짜 할 만큼 한 셈 아니겠나.
“잘된 거겠죠?”
“잘될 거야.”
“네. 아빠.”
“일단 대강 정리하고 자자. 내일…… 그러고 보니까 너 시험 문제 내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이현종의 말을 듣고 나서야, 수혁은 학회의 요청 사항을 떠올릴 수 있었다.
논문 좀 내주고 했더니, 이젠 문제까지 내달라고 하지 않나.
물론 이번에는 대개 족보를 타게 만들면 된다는 말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하기로 한 이상 대충 할 수는 없잖아?’
[반드시 알아야 하는, 어렵지 않지만 좋은 문제들을 내면 되겠죠.]
‘그러니까.’
수혁으로선 별로 족보를 탈 생각은 없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이 최고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