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9화 전문의 시험 (3)
‘불안하다.’
말은 한 시간이라고 했지만 우창윤은 가슴 속이 서늘해졌다.
분명 모든 계획은 완벽했다.
수혁을 출제위원으로 꽂아 넣음으로써, 태화 의료원 시험 준비를 사보타지하지 않았나.
물론 이번 시험은 진짜 쉽게 낼 생각이었긴 하지만 모든 일에 기세가 있는 법.
작년에 압도적인 합격률을 기록해 버린 태화가 이번에도 근소하게나마 일등을 하게 되면…….
‘그건 안 될 일이야. 잘 막았다, 창윤아.’
생각보다 수험생이나 본과 4학년, 그리고 인턴은 예민한 생물이었다.
그렇지 않나?
대학교 순위를 제일 열심히 보는 게 수험생이고, 병원 순위를 제일 열심히 보는 게 본과 4학교, 과 순위를 제일 열심히 보는 게 인턴이라는 말에 누가 감히 토를 달 수 있을까.
허나 그만큼 근시안적인 것도 사실이었다.
단 몇 년 동안의 결과만으로 평가를 휙휙 바꿔 버리는 애들이 본과 4학년이고, 또 인턴들이었다.
‘게다가…… 보복부 서기관이 나와 있잖아.’
세상에.
서기관이다, 서기관.
4급 공무원.
실무진 중에서는 거의 뭐 최고위급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살다 보면 3급도 마주할 때가 있긴 한데, 그 사람들은 오히려 무섭지가 않았다.
일단 이쪽이 바짝 쫄아서 가기도 하지만, 그 위치까지 간 사람들은 어지간해서는 싫은 소리도 하지 않았다.
‘이수혁 교수…… 자네도 알잖아? 국가 연구비 타서 쓰고 있지 않아? 아닌가? 아니야……? 잉?’
그에 반해 서기관은 거의 무슨 저승사자급이었다.
제아무리 학계에서 대단한 평을 받고 있는 교수라 해도 서기관한테는 잘 보이는 게 좋았다.
괜히 척지고 그랬다가 박살 나는 수가 있었다.
하여간 우창윤은 이런 걱정을 하며 은근슬쩍 수혁에게로 다가갔다.
엿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손으로 끼적이는 시대는 예전에 지나갔으니까.
“저기.”
원래는 그냥 보기만 하려고 했다.
허나 화면을 보자마자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미친놈이 지금 무슨 문제를 내고 있는 거지?
아니, 이게 문제가 맞기는 한가?
“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죠?”
해서, 우창윤은 지극히 이상해 보일 만한 질문을 던졌다.
그 바람에 나머지, 그러니까 동종헌 교수와 4급 서기관은 저도 모르게 우창윤 뒤로 가서 섰다.
사실 말을 하기 전부터 슬금슬금 움직이고 있었다.
모니터를 봤을 때 우창윤이 지었던 표정.
그건 진짜였으니까.
망할.
“문제 내고 있죠.”
그에 반해 수혁은 그저 웃고 있었다.
뒤를 보면서.
무서운 건 여전히 손은 쉬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무슨 엑소시스트도 아닐 텐데, 고개는 뒤로 꺾은 채 문제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천재는 천재야.’
찰나의 순간에 적힌 글이 벌써 여러 문장이었다.
오타도 없었다.
미친놈이.
“아니, 아니지.”
우창윤은 속으로 또 감탄을 이어 나가다가 정신을 차리고 어깨를 잡았다.
그러곤 말했다.
원래 하고자 했던 말은 아니었다.
서기관이 보는 앞에서 쌍욕을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아니, 서기관이 없다손 치더라도 쌍욕은 무리였다.
이수혁, 이 인간도 만만한 인간은 아니게 되었으니까.
“지금…… 지문이…… 20줄이 넘어가는데……?”
“네. 그렇죠?”
“이렇게 길면 읽기 어렵지 않을까……요?”
사석이었다면 최소 반말은 해 봤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도 없어서 억지로 존대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음.”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우창윤과는 달리, 최우식 서기관은 문제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 사이, 수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한글로 썼는데요?”
대가리를 후리고 싶었다.
뉴스에서 나오는 술자리 폭행 사고만 보면 정말 왜 저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해가 가도 너무 갔다.
아, 이럴 때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패는 거구나.
“한글…… 그래, 한글이죠. 근데 이게…… 이거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닌데. 이거 하나에 시간을 너무 많이 뺏기면…….”
허나 우창윤은 평소 문명인임을 자처하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더해 얼마 남지 않은 머리를 사수하기 위해 화도 잘 내지 않았다.
머리에 열이 오르면 머리가 빠진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서 그랬다.
의사 주제에 근거도 빈약하고 출처도 모르겠는 이야기에 매달리는 게 좀 그랬지만.
뭐 어쩌겠나.
피부과 의사라는 새끼들은 그냥 약이나 먹고 안 되면 심으라는 말만 하는데.
이게 다 탈모인의 마음을 공감하지 못 해서라고 생각했다.
피부과에 탈모인 할당제를 주장할 용의도 있었다.
“뺏기면 안 될 거 같은데…… 그렇잖아요. 문제 하나에 이게.”
“아. 이거 문제 하나가 아니에요. 5문제예요.”
“응? 5문제? 그럼 이거…… 연쇄 문제라고요? 아니, 그럼.”
한 지문에 여러 개의 문제가 나온다.
이런 류의 문제는 어렵지 않나?
당연한 거 아닌가?
“으으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옆에 있던 서기관이 신음 소리 비슷한 것을 냈다.
주화입마가 오나? 싶었다.
우창윤 본인이 그랬거든.
해서 돌아보니, 의외로 얼굴은 멀쩡해 보였다.
아니, 턱밑을 쓰다듬고 있는 것이 뭔가 좀 흥미로워 보이기도 했다.
‘아, 이 양반 의사지.’
전문의를 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의사는 의사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임상 의사 전망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데다가, 예전과는 성공에 대한 관점도 많이 바뀌면서 의사들도 진료실 밖으로 나가고 있었으니.
“지문은…… 흥미롭네요.”
과연 어떻게 보려나.
이 새끼 이거…….
어떻게 볼까! 하고 있는데 미소가 흘러나왔다.
‘오?’
마음에 들었나?
“당연하죠.”
그 말에 문제를 낸, 그러니까 이 지문을 쓴 수혁이 뭔 그딴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말했다.
‘넌…… 넌 사회화부터 해야 되는 사람인데…….’
우창윤은 한 대 쥐어박고 싶단 생각을 했다.
이게 다 이현종, 신현태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눈치 보는 법을 익혀야 할 레지던트 1년 차 때부터 싸고도니까 이렇게 되지.
“원래 있던 케이스를…… 보다 교과서적으로 수정한 거예요. 지금 전문의 시험 보는 애들 수준에 맞춰서요.”
“아…… 그래서 좀 힌트스러운 것들이 있는 건가요?”
“네, 그렇죠.”
“근데 그래도 당장 문제에 대한 답이 떠오르지는 않는데요?”
자세히 보니 이게 벌써 두 번째 지문이었다.
옆 모니터에는 아까 쓴 것으로 보이는 지문과 그에 딸린 5개의 문제가 달려 있었다.
서기관은 그쪽을 보고 있었다.
돌아보니 당뇨에 대한 얘기였다.
“그건 공무원분이시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아, 저도 의사입니다. 공보의 하면서 행시 봤습니다.”
“행시 보길 잘하셨네요.”
“네?”
문제를 찬찬히 살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우창윤은 하하하! 하고 웃으며 화제를 돌려야만 했다.
‘미친놈이!’
저것도 모르는 의사라면 행시 보고 공무원 하는 게 낫다고 돌려 까는 거 아닌가?
여러 바퀴 돌렸으면 말도 안 할 텐데 한 바퀴도 안 돌린 거라, 이대로면 바로 화를 낼 거 같았다.
“우리 이수혁 교수도 공무원이 꿈이라! 하하!”
“아, 그래요?”
“네? 의사는 진료를…… 읍.”
동종헌도 눈치 빠르기는 매한가지라 수혁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곤 귓가에 속삭임을 때려 박았다.
‘제발 그냥 문제 얘기만 해요.’
‘아, 네. 근데 이해를…….’
‘그런 얘기는 하지 말고. 이거 끝나면…….’
속삭이는 도중에 동종헌은 고민에 빠졌다.
대체 교수를 어떤 방식으로 꼬셔야 하나 싶어서였는데, 다행히 이현종과 최근에 만났던 적이 있었다.
‘맞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여겼지만.
지금은 급했다.
이 인간이 여기서 넌 내과도 아닌 게 왜 여깄냐, 같은 말을 하면 큰일이었다.
‘이따 장어 먹으러 가요. 빨리 끝내고. 파주, 반구정.’
‘오, 닥치시죠.’
‘네.’
먹혔다.
먹는 거 진짜 좋아한다고 하더니 이 정도면 무슨 파블로프의 개 수준이었다.
‘좋아. 앞으로는 이걸로 컨트롤해 보자.’
동종헌은 자신이 아는 맛집 리스트, 그리고 쉐프 연락처를 가늠하고는 우선 문제와 서기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문제는…… 음. 그러니까 이 지문이 사실상 진료실이네요?”
그사이 머리가 좀 더 좋은 아니, 약삭빠른 편에 속하는 우창윤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문제를 대강 이해한 모양이었다.
“네. 상황은…… 검진에서 당뇨 의증이 나온 30대 남자가 진료실에 온 거죠. 처음 온 거예요.”
“음……. 확실히…… 최근에 진짜 많이 보는 상황이기는 하죠.”
먹방 때문일까?
아니면 설탕 사용량이 늘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식습관의 서구화 때문일까?
학회와 보복부에서 열나게 분석하고 있긴 하지만, 당장은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젊은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환자가 폭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네.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잘 보시면 문제 자체는 평이해요. 처음 보는 당뇨 환자를 어떻게 진단할지, 합병증 판단은 어떻게 할지, 그리고 앞으로 계획은 어찌 잡을지를 물었어요.”
수혁은 어쩐지 불만 어린 얼굴로 말했다.
문제를 쉽게 내는 게 쉽지 않았어서 그랬다.
아니, 문제를 내는 것 자체는 쉬운 일인데 그러면서도 고민거리를 던질 수 있는 문제 만드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었다.
“흐음…… 확실히…… 이건 아주 필요한 내용인데.”
우창윤은 비록 문제를 낸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지문과 문제들을 번갈아 보면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성의가 있다.
그리고 의미도 있다.
‘문제는 이렇게 내야 하는 거지’라고 말해 주는 느낌이었다.
물론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네요. 지금 내신 문제도…… 그래. 두통으로 오는 환자를 보게 되면 당연히 내과 의사로서 이런 수준의 고민은 해야죠.”
“으음……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면서도 문제는 평이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식의 문제를 다른 학회에서도 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종헌도 서기관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아니, 서기관은 지나치게 마음에 들어 했다.
“이 정도 문제라면 설령 시험을 친 후에 일반에 공개가 되어도 되겠단 생각이 듭니다. 아니, 이미 전문의를 딴 사람들도 지식 점검하는 차원에서 한 번쯤 풀게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음!”
우창윤은 이제 수혁 대신 이 새끼가 왜 이러지 싶었다.
공무원들은 기본적으로 보신주의 아닌가.
일 벌이는 걸 싫어하지 않나?
야망이 있는 사람 아니면…….
‘야망이 있구나, 이 새끼.’
그제야, 우창윤은 서기관의 눈이 자신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꿈을 꾸는 자의 얼굴이었다.
동시에,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다른 이를 갈아 넣을 수 있는 이의 얼굴이었다.
“지금 가신 분들…… 사실 며칠 동안 오셔야 하는 사람들이죠?”
“아…… 네. 그렇죠. 진료 때문에 띄엄띄엄 부르긴 하지만 하여간…… 그렇죠.”
“다시 오시라고 하죠. 문제 예시 이 두 개로 보여 주고, 각기 맡은 분야에 맞춰서 문제 다시 내시라고 하죠.”
“어…….”
“왜요? 여기 계신 두 분이 훨씬 높은 거 아닙니까? 위에서 까라면 까야죠.”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