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5화 응급 질환 (1)
위플 수술은 보통 12시간 내외가 소요되는 초대형 수술이다.
장준혁이 아무리 빨리 끝냈다 하더라도, 다 끝내고 나오자 어느새 오후 4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식사 안 하세요?”
보통 병원 식당은 딱 식사 시간에만 운영하기 마련이었다.
내과를 비롯한 외래 및 병동을 보는 과들이 바쁘긴 하지만, 그래도 끼니는 대강 맞춰 먹지 않으려나 하는 운영진의 착각 때문이었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끼니 거르는 레지던트나 교수들이 꽤 있음에도 그랬다.
허나 그러한 운영진들도 수술방에 대해서만큼은 예외를 두었는데, 그 덕에 이쪽은 미리 말만 해 두면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아…… 아뇨. 늦은 김에 이따 맛있는 거 먹으려고요.”
“아…… 늦은 김에……?”
장준혁은 오늘 기분이 아주 좋았다.
수혁 덕에 전에 없이 대단한 수술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자주 하던 수술을 최고로 잘 해냈기 때문이었다.
지정의로서 환자의 예후를 생각한다면 이보다 좋은 일도 없을 터였다.
장준혁도 평소였다면 그런 생각을 하며 즐거워했을 텐데, 오늘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도 못했다.
‘미쳤다…… 이제 나는 백강혁이다…….’
착각에 빠져도 단단히 빠져 있어서 그랬다.
진짜 백강혁이 본다면 처맞는 것으로도 모자라 거의 뒤지기 직전까지 가겠지만.
하여간 장준혁은 오늘 해낸 수술에 더없이 만족하고 있었다.
‘이거…… 이게 다 호오와 음 덕분이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장준혁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다.
해서 수혁을 선망 어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도 다 해 줄 기세였다.
그런 주제에 막상 해 주려는 건 다 식어 버린 수술방 밥이었지만, 이것도 못 먹는 날이 많은 장준혁으로서는 이상한 점을 생각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인간…… 진심인가?’
[배은망덕한 놈이로군요.]
‘여전히 내가 뭘 도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고마워하는 건 맞잖아?’
[맞습니다.]
‘근데 이걸 대접하겠다고?’
반면, 먹는 데 있어 진심인 수혁과 바루다는 화가 났다.
하필 점심이 오뎅국이었는데, 다 불어 터져서 국물도 없이 그냥 오뎅만 보였다.
“허…….”
헛웃음이 나왔고, 그제야 장준혁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내가 무슨 결례라도……?’
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다 같은 처지의 외과 사람들이 서 있었다.
펠로우, 레지던트 그리고 인턴.
펠로우랑 레지던트는 이미 외과 사람이 된 지 오래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다 불어 터진 자장면도 맛있게 먹는 재주를 보유하게 된 이들 아닌가.
허나 인턴은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영상의학과 지망이기도 해서, 삶의 질에 대한 깊은 이해도가 있었다.
“저…….”
두려움은 없었다.
이미 픽스턴(예비 전공의로 가는 중간 단계)이었으니까.
해서 감히 장준혁의 눈빛에 맞서 대꾸할 수 있었다.
“어어. 말해 봐.”
“교수님은…… 나가서 드시고 싶은 거 같은데요.”
“아? 나가서? 밥을?”
“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었지만, 외과는 원래 그랬다.
외과만 그런 게 아니라, 대학 병원에 있는 외과 계열 사람들에게 외식은 굉장히 특별한 일이었다.
며칠 또는 몇 주 전부터 약속해야 하는 그런 것.
‘아…… 그러고 보니…… 이현종 교수님도 미식가셨지.’
원래 같았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했을 테지만.
장준혁은 흐음, 오 전법에 매료된 나머지 내과 아니, 이수혁 패거리에 대해 알아본 바 있었다.
그 결과, 그 주변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잘 알게 되었다.
‘그래, 저 눈…… 저거 진심이시네. 앞으로 또…… 또 부탁드리려면…….’
먹는 데 예민한 사람에게 불어 버린 오뎅국을 대접이랍시고 하는 건 실례가 아니겠나.
장준혁도 교수가 되기 위해 눈칫밥 먹던 시절이 있는 데다가, 수혁도 딱히 속내를 숨기는 편이 아니다 보니 장준혁은 어렵지 않게 수혁의 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그럼 나가실까요?”
“지금 말고요. 회진 돌고요.”
“아, 회진. 저도 돌아야 하긴 하는데. 돌고 바로 보실까요? 제가 어디라도 물어봐서 최고의 맛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좋군요.”
장준혁의 눈을 보면서 수혁과 바루다는 안심했다.
외과 사람들이 잘 못 나가는 건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렇다 보니 나가서 먹는 한 끼를 소중히 하지 않던가.
이 인간들이 가는 곳이라면 아마도 퍽 먹을 만할 터였다.
‘그래…… 사장님한테 부탁 한번 하지.’
실제로, 장준혁도 자신 있었다.
환자들의 특성 덕분이었다.
그들을 살리는 데 있어 내과도 분명 엄청나게 중요한 일을 하긴 하지만, 환자들은 수술에 대해 더 감사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수혁이나 이현종처럼 어마어마한 공헌을 해도 티가 안 나는 경우라면 대개 그렇다고 보면 되었다.
장준혁은 외과 교수들 중에서도 자기 어필에 능한 편이다 보니 더더욱 팬들이 많았다.
“그럼 어디서 뵐까요? 역시 로비?”
“아, 아뇨.”
수혁은 오전에 있던 충수돌기염으로 오인된 뎅기열 환자를 떠올렸다.
수술도 보고 있다 보면 나름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진단이 최고야.’
[언제나 짜릿하죠.]
‘새롭고.’
[후하하하하.]
오늘 하루를 약간 날린 기분이 든달까.
이대로 밥 먹으러 가면 너무 아쉬웠다.
“응급실 앞에서 보죠.”
“응급실……? 거기 앞은 혼잡한데요……? 환자도 많고요.”
“그게 포인트죠. 잠깐 보고 가려고요.”
“아, 오시기로 한 환자가 있어요?”
“아뇨. 그것도 포인트죠.”
랜덤 살리기.
물론 안가도 어려운 케이스가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연락해 오긴 할 터였다.
이미 시스템도 잡혀 있는 데다가 수혁에 대한 신뢰가 충분히 쌓여서 그랬다.
‘불충분해.’
[네. 어렵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케이스가 있습니다.]
‘그래…… 이건 단순한 느낌이 아니야.’
[우리가 느끼는 질환의 유병률과 실제 발표되고 있는 유병률 간의 괴리를 생각해 보면…… 그럴 겁니다. 확실히, 우리는 여전히 놓치는 질환이 많습니다.]
수혁과 바루다는 방금 대화에 있어서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뭔…… 미친 소리지…….’
당연히 둘만의 근거였다.
다른 이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장준혁도 그랬다.
허나 티를 내진 않았다.
‘그래도 이해하는 척해야지.’
수술 실력이 단박에 팍 늘지 않았나.
평생 있는지도 몰랐던 벽을 깨부수고 성장한 마당에, 연기하는 게 어려워서야 되겠나.
“그, 그렇죠. 하하. 그럼 거기서 뵙죠.”
“네. 그러죠. 천천히 오세요. 저는 응급실 돌고 있을 테니까요.”
“아…… 음. 네. 그래도 최대한 빨리 오겠습니다.”
“네.”
하여간 장준혁은 일행을 이끌고 병동으로 향했다.
수혁도 그와 찢어져 병동으로 향했다.
특별히 할 일은 없었다.
이현종 얼굴이나 보려고 했더니 그것도 여의찮았다.
“어디 가셨어?”
“아…… 센터장님 지금 심장 내과에서 콜이 와서요.”
“아직도? 제자분들은 뭐 하시고?”
“어려운 케이스인가 보더라고요. 시발거리면서 가시긴 했습니다.”
“으음.”
이현종이 누군가.
드디어 수혁에게 슬금슬금 밀리기 시작하긴 했지만, 여전히 심장 분야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였다.
제자들을 키우고 있음에도 그랬다.
지금도 실력이 늘고 있다는 걸 공공연히 말하고 있고, 제자들의 말도 다르지 않은 것을 보면 한동안은 그럴 터였다.
“그래, 할 수 없지. 그럼 슥 볼까? 특별한 일 없었지?”
“네. 아……. 경찰에서 연락이 오긴 했습니다.”
“경찰?”
“그 전에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 아이 때문에요.”
“아, 뭐래?”
“알아서 처리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변호사분들이랑 협조해서 하고 있다고.”
“애는? 애가 문제지.”
“아…… 애요. 애는 지금…… 부모님이 이혼 준비 중인데, 아버지도 사실 완전히 모르지는 않았단 정황증거가 있어서……”
“아, 그러면 안 되는데.”
부모 없이 큰다.
수혁은 운이 좋아서 괜찮은 보육원에서 자랐지만.
대개는 비극이라고 보면 되었다.
‘이건…… 음. 뭐…… 내가 알아보면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보통 수혁은 환자를 봄에 있어서 진단 후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다.
아니, 신경을 쓰지 않는다기보다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을 터였다.
허나 아이, 그중에서도 고아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남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그랬다.
“그래, 그건 내가 또 알아볼게. 다른 일은? 병동에서는 별일 없었어?”
“아, 네. 여기야 뭐…… 오전에 지시하신 대로 다 처리했습니다.”
“좋아. 확인만 하자.”
“네.”
하여간 수혁은 회진을 돌았다.
바루다에게 아이의 일을 데이터화시킨 후였다.
이렇게 하면 절대로 잊는 법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역시 다 좋군.”
“네.”
“그럼…… 당직 빼고 퇴근들 해. 혹시 연락 오면 나한테 다이렉트로 연락해 주고.”
“네, 교수님.”
“아, 저녁 사 먹고 싶으면 이걸로 먹고 내일 줘.”
“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수혁은 이현종의 조언에 따라, 지갑을 화끈하게 여는 편이었다.
어차피 돈 벌어 봐야 쓸 데도 없는데 월급이랑 로열티는 따박따박 들어오고 있지 않나.
해서 카드를 내놓고 응급실로 향했다.
입구야 언제나 그렇듯 혼잡스러웠다.
“음.”
수혁은 바루다와 함께 입구를 지나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엔 여전히 환자들이 몰려 있었다.
그중에는 심각해 보이는 환자도, 그렇지 않아 보이는 환자도 있었다.
하여간 수혁은 천천히 거닐며 눈과 귀에 집중했다.
보이는 것, 그리고 들리는 것들에서 단서를 하나하나 찾아내기 시작했다.
“심전도! 심전도 안 찍었어?”
“C-line 잡을 거 들고 와!”
“아니, 인턴쌤! 그걸 그냥 그렇게 들고 가면…….”
대개는 고함이었다.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대학 병원은 사람이 진짜 죽어 나가는 곳이니까.
“힘이…… 힘이 없다니까요?”
그때, 어떤 환자의 말에 수혁이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바루다가 눈에 비친 환자의 모습을 분석했다.
“이거 봐요. 다리가…… 다리가…….”
힘이 빠지는 증상.
다리가 되었건 상체가 되었건, 뇌병증에 의한 것이라면 한쪽에 국한되어야 할 터인데 저 환자는 그렇지 않았다.
양측이 모두 빠져 있었다.
그렇다면 척추 쪽인가 싶었지만, 외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뭐지?’
[일단 가 보죠.]
그것이 흥미를 끌었다.
수혁은 정신을 놓고 환자에게로 다가갔다.
“허억, 허억.”
그때, 응급실 입구로 들어선 이들이 있었다.
외과 장준혁과 펠로우 둘, 그리고 레지던트 셋과 인턴 하나였다.
모두 뭉뚱그려서 외과 일행이라고 하면 될 거 같았다.
하여간 선두에 선 장준혁은 늦었나 하는 심정으로 수혁을 찾았다.
최대한 빨리 돈다고 돌고 전화를 했더니 벌써 한참 전에 갔다지 않나.
“아, 저기. 교수님. 저기 계십니다.”
“어디? 아, 환자…… 보는 건가?”
“네.”
“아니…….”
“일단 가야 되지 않을까요?”
“방해 안 되려나?”
장준혁의 말에 레지던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안대훈과 꽤 친한 사람이었고, 덕분에 수혁에 대해 잘 알았다.
“아뇨, 오히려 좋아하실 거예요.”
“좋아해? 진료 보는 걸 구경하는데?”
“네. 제가 장담합니다. 최측근한테 들었습니다.”
“음. 그래. 이해는 안 가지만.”
이해 안 가는 지점이 어디 한두 군데던가.
“가자.”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