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8화 응급 질환 (4)
“아니, 뭐 하러 여기까지 오셨어요.”
시간이 늦어져서 장준혁은 식당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부끄러운 이유를 대거나 거짓말을 칠 일은 없었다.
그저 사실대로 고했을 뿐이었다.
응급실로 온 환자를 살리고 있노라고.
아마 다른 곳으로 갔다면 죽었거나, 적어도 진단이 늦어져 후유장애를 남겼을 것이 분명하다고.
-아…… 역시 교수님…….
그 말을 들은 외딴집 사장은 감동했고, 병원에 왔다.
“이거 그냥 버너에만 구워도 먹을 만하거든요. 앉아 계시죠.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아니…… 이러면 이거 너무…….”
장준혁은 사장의 눈치를 보았다.
동시에 수혁의 눈치도 보았다.
아까 분명 대강 때우자고 하지 않았나.
환자 보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으니, 시간 아끼자고.
뭐 대충 그런 뉘앙스로 말을 했더랬다.
“너무 감사합니다, 사장님. 태화 의료원 통합 진료센터 부센터장 이수혁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도울 일 있으면 돕도록 하겠습니다.”
‘이 새끼……?’
장준혁은 수혁이 이렇게 정중한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 보았다.
심지어 은인이라는 사람의 수술을 부탁할 때도 이러진 않았다.
다리가 불편해서 그런가, 허리 숙이는 게 불편한가 보다 하고 있었다.
사실 같은 교수들끼리 허리 숙이고 하는 게 영 이상하기도 했다.
어차피 살다 보면 서로서로 신세 질 일이 있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눈이 살짝 돌아간 느낌마저 들었다.
아니, 돌아가고 있었다.
이리저리.
정확히 말하면 사장의 얼굴과 사장이 가져온 고기 사이를 배회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사장 얼굴보다는 아무래도 고기 쪽에 더 머무르는 시간이 길었다.
‘아니, 뭐…… 고기 상태가 좋아 보이긴 해.’
아마 자기 은인이 온다고 부랴부랴 좋은 고기를 챙겨 둔 모양이었다.
새우살이라고 하던가, 저걸?
소 한 마리에 얼마 안 나온다고 하던데.
그게 그냥 주르륵 들어 있었다.
그 외에도 특수부위가 한 가득이었다.
“아, 네네. 교수님. 하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티비에 많이 나오시던데요? 실제로 보니까 인물이 더 훤칠하시네요.”
“아유, 감사합니다. 일단 저희 센터로 가시죠. 거기가 먹기 편합니다.”
“네네. 근데 이게 냄새가 날 텐데…… 밖에서 먹는 게 좋지 않을까요?”
“밖…….”
태화 의료원은 대형 병원이지 않나.
심지어 중간층에 간단히 산책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도 있을 지경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옥상에도 공간이 있었다.
주로 교수들의 공간이었다.
애초에 태화에서 복지 차원에서 만들어 둔 곳이기도 했고.
[지금 시간에는 아는 사람이 출몰하지 않을 겁니다.]
‘오케이, 그럼 됐어.’
수혁은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다.
조태진, 신현태, 이현종 등은 마주치면 하릴없이 고기를 나누어 줘야 하지 않겠나.
고깃집 사장님이 직접 오신 만큼 양이 부족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를 일입니다. 절대로 방심하지 마세요.]
바루다는 진중했다.
아까 고기를 보고 나서부터는 내내 이 모드였다.
‘네가 너무 힘주니까 나 살짝 어지러운데.’
[감내하시죠.]
‘하.’
에너지마저 소모하고 있는 바루다를 뒤로한 채, 수혁은 위를 가리켰다.
장준혁도 비슷한 생각이어서 일행은 곧 옥상으로 올라갔다.
나름 잘 조성된 정원이다 보니 돌아다니기 좋았다.
물론 뭐 처먹으라고 만든 공간은 아니긴 했지만.
구워 먹으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치이익.
그렇게 고기가 구워지고.
“이게 살치살인데. 어지간한 데서 먹어 본 거랑은 아예 맛이 다를 겁니다.”
“오.”
“이건 티본 스테이크인데…… 일단은 재워 두었다가 이따 굽죠. 마지막 하이라이트입니다. 진짜…… 귀한 겁니다. 하하.”
“오…….”
식사가 시작되었다.
사장은 기분이 좋았다.
일단 은인을 대접하는 거야 워낙 기대하던바 그대로기도 했고.
수혁이 하도 잘 먹어서 더더욱 그랬다.
진짜 주는 대로 덥석덥석 다 먹는데, 체형도 크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먹을 수 있는지 불가사의할 지경이었다.
우우웅.
그렇게 한참을 먹고 있었더니 전화가 왔다.
내과 레지던트였다.
통합진료센터에 입원시켰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신경과도 협진 형식으로 함께 보기야 하겠지만, 수혁이 지정의가 된 이상 뇌파 검사를 의뢰할 때 말고는 딱히 그럴 일도 없었다.
“어, 어떻게 됐어?”
수혁은 이제 슬슬 내과 애들한테는 말을 놓기 시작한 마당이었다.
물론 나이를 잘 따져 보면 1년 차 중에서도 수혁보다 많은 사람이 있긴 있지만, 아닌 애들은 칼같이 놓았다.
그게 어쩐지 더 가까운 사이로 여겨진다는 조언이 있어서였다.
다른 교수가 한 말이면 무시했을 텐데 안대훈을 비롯한 레지던트의 조언이라 들어 주고 있었다.
“의식 수준이…… 지금 약간…….”
“응? 벌써?”
“네.”
“아니, 얼마나 됐다고. 아니지. 음. 아까 진행이 너무 빠르긴 했지. 아마…… 수초(신경섬유 주위를 둘러싼 피막)가 벗겨지거나 한 게 아니라, 그냥 그러려고 하다가 쇼크처럼 온 것일 수도 있어.”
수혁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신기하게 방금까지만 해도 꿀맛이었던 고기에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 정신이 죄다 환자에게로 쏠려 있어서 그랬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수혁은 의사였고, 또 명의병 환자였으니까.
그것도 중증.
“일단 위닝 천천히 해 봐. 대신 잘 봐.”
“네네.”
“어려울 거 같으면 기다리고.”
“아뇨, 괜찮습니다. 안대훈 선생님께 확실히 인계받았습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해. 어차피 나도 병원이니까 연락 주면 바로 갈 수 있어. 뺐는데 다시 못 넣겠으면 멍하니 나만 기다리고 있지 말고 이엔티부터 콜해. 미리 콜하는 것도 방법이지.”
“아, 네. 다행히 아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하곤, 수혁은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준혁이 물어왔다.
따지고 보면 장준혁이랑은 진짜 아무 상관이 없는 환자임에도 그랬다.
수술할 환자도 아니고, 나중에라도 볼 일이 있을 만한 환자도 아니고.
아예 진단 과정에 딱히 관여했던 것도 아니고.
허나 궁금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장준혁도 태화에 있는 만큼 명의병 환자라서 그랬다.
“어떻게 됐대요? 벌써 깼대요?”
“네? 아, 네. 그렇죠. 제대로 진단했으니까요.”
“와…… 미친…… 그럼 진짜 그게 맞을까요? 열대성 스프루?”
“그건 이따가, 환자가 제대로 깨고 나면 가서 물어봐야죠.”
수혁은 준혁의 말에 후후 웃고는 고기를 입에 넣었다.
방금 사장님이 구워 준 티본이었다.
“와…… 이거?”
환자는 금세 잊었다.
진짜 그럴 수 있는 맛이었다.
“맛있죠?”
사장은 흐뭇한 얼굴로 웃으며 물었다.
“네, 네. 와…… 이건……?”
“다들 그러죠. 하하. 이거 어디 뭐, 호텔에 가도 못 먹는 맛이에요.”
“진짜 그렇네요. 와…….”
장준혁은 왜 그렇게 호들갑인가 하다가 입에 넣고는 후욱후욱 숨을 몰아쉬었다.
‘개맛있네.’
그도 잠시 환자를 잊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건 그럴 만한 맛이었으니.
교수도 그럴 지경이었으니, 다른 레지던트나 펠로우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아예 싹 잊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두 명의병 환자들은 식사가 끝나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정말 잘 먹었습니다.”
“아유, 너무 잘 드셔서 제가 다 기분이 좋네요.”
둘은 사장을 로비로 모셔다주었고, 집으로 가는 대신 센터로 향했다.
나머지는 집에 가고 싶었지만 교수가 가는데 어쩌겠나.
따라가야지.
얼마간 궁금했던 마음도 없는 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시벌시벌 욕도 많이 나왔을 터였다.
이제 정말로 시간이 늦어서 그랬다.
“아, 깨어 계시네.”
그 말은 곧 환자도 회복될 시간이 꽤 있었다는 얘기가 되었다.
정말로, 환자는 아까 갑자기 호흡 딸리고 처져서 삽관했던 것이 거짓말이라 느껴질 정도로 눈을 번쩍 뜨고 있었다.
있는 곳이 중환자실이 아니었다면 환자가 바뀐 것 아닐까 싶을 지경이었다.
그만큼 드라마틱한 변화를 마주하고 있었다.
내과 의사였다면 놀라움이 조금은 덜했을 텐데.
여기 있는 이들은 수혁을 제외한 모두가 외과였다.
“내과도 저렇게 되는 경우가 있네요?”
“그러니까. 근데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해야 되니? 이수혁 교수님도 계시는데.”
“저도 모르게 그만…… 좀 놀라서요. 내과는 맨날 기다리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나도 그랬는데…….”
편견이라고 해야 할까?
어쩐지 외과는 딱 칼 대면 좋아질 것 같은 느낌이 있지 않나.
실제로 평균 입원 기간을 따지면 외과 계열이 훨씬 짧기도 했다.
뭐가 되었건, 수술 후에 회복되기만 하면 집에 가니까.
그에 비해 내과는 지지부진하지 않나.
공공연히 도는 말 중 하나가 ‘내과가 뭘 할 수 있나’ 뭐 이런 류의 말이었다.
허나 지금 이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드르륵.
수혁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 장준혁을 포함한 외과 의사들이 따랐다.
그야말로 우르르 몰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조폭처럼.
“아, 교수님!”
그 선두에 선 수혁을 향해 레지던트가 인사했다.
그의 얼굴에도 역시나 놀라움이 잔뜩 떠 있었다.
‘스프루? 시바…… 이게 대체…… 이건 진짜 케이스 리포트감이다.’
태화 의료원의 내과 레지던트들도 막상 전문의 시험을 위해 논문을 쓰려고 하면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었다.
일하는 것도 바쁘고, 공부하는 것도 바빠 뒤지겠는데, 언제 또 논문을 고민하고 있겠나.
솔직히 말하면 전형적인 탁상공론의 흔적이라고 봐야 했다.
논문 그거, 그냥 전문의 돼서 쓰면 되지.
뭘…….
‘나도 해결됐다.’
하지만 통합진료센터가 출범하고 난 후로는 얘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적어도 케이스 리포트는 쓸 수 있게 되었으니까.
“환자분.”
“어…… 제가…….”
“온몸에 힘아 빠지는 증세로 여기 오셨다가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수혁은 푸근하게 웃으면서 다가갔다.
명의답게 목소리도 살짝 깔았다.
재수 없어 보일 수도 있었지만, 환자에게는 더없이 효과적이었다.
“아…… 기억이…….”
“그보다……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수혁은 잠시 뒤에 서 있던 장준혁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환자를 바라보았다.
환자는 여전히 넋이 좀 나가 있었지만, 어떻게든 질문에 답하겠다는 의지는 느껴졌다.
잘된 일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중요하니까.
“혹 카리브해 연안에 계셨던 적이 있으실까요?”
“어…….”
수혁의 말에 환자는 뭔 개소리냐는 얼굴 대신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좋은 일이었다.
“천천히 답해 주시죠.”
“베네수엘라에 있었습니다. 거기도…… 카리브해 연안에 있는 국가긴 한데…….”
“아, 어떤 일로요?”
“무역 중계업 때문에요. 근데 나라가 망해 버려서…… 일이 어렵게 됐죠. 귀국한 지 몇 년 됐는데, 아직 그때 벌어 둔 돈 까먹으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베네수엘라.
열대성 스프루가 호발하는 국가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