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869화 (869/1,303)

869화 시험 (3)

성은이 느껴지는 지문.

안대훈은 지문을 읽어 내려가면서 감회에 젖을 수 있었다.

목소리에만 지문이 있다던가.

글에도 지문은 남기 마련이었다.

제아무리 문제처럼 보이기 위해 정제화 과정을 거쳤다고 해도, 안대훈의 날카로운 안목을 피해 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지…… 교수님이라면 이걸 물으시겠지. 그럼 저는…… 이리 답하겠나이다.’

정신없이 읽어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지문 하나가 끝나 버렸다.

단어 하나하나 다 의미가 있는 문제였다.

그 말은 곧,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했다간 틀릴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분명 케이스 자체는 평이하기 짝이 없는 것을 넘어, 로컬에 나가건 군의관이 되건 공보의가 되건 분명 몇 번은 볼 만한 케이스였지만.

질문은 포괄적이면서 동시에 구체적이라 딱히 쉽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좋아…… 교수님이라면…… 이렇게 하셨겠지. 저도 따르겠나이다.'

이를테면, 케이스는 쉬운데 문제는 어렵다고나 할까?

애초에 쉽게 내겠다고 했던 취지에는 전혀 맞지 않는 문제들이 덜렁 나와 있다고 보면 되었다.

하지만 교수들이나 보복부 직원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는데, 다 똑같은 놈들끼리 있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들끼리는 '이거 쉬운 거 아닌가?' 이러고 있지 않았나.

아마 레지던트 3년 차들이 가서 봤다면, 분명 유혈사태가 벌어졌을 터였다.

'이것도 교수님이 내셨구나…… 마지막인가.'

물론 안대훈에게는 딱히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문제가 하나하나 줄어갈 때마다 너무 아쉬웠다.

수혁과 나란히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느낌이 들어서 그랬다.

'진짜 어렵나 보네……’

한편, 감독관으로 나온 학교 선생님은 둘째, 넷째 줄에 앉은 내과 레지던트들을 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과는 쉽게 나올 거니까…… 사실상 컨닝하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분명 들어오기 전에 이렇게 들었는데.

그렇다면 대체 지금 제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광경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다들 목을 자라처럼 빼고 하늘만 보고 있는데요.

'컨닝은 안 하는 거 같은데……'

컨닝?

전문의 시험에서 컨닝?

그건 이들의 자부심을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길게는 5년, 짧게는 4년간 대학 병원에서 뒤지게 일해 온 이들 아닌가.

치프쯤 되면 대학 병원에서 꽤 위치가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병원에 처음 오는 사람이 보면, 저 사람은 젊은데도 교수네 싶을 만큼이나 권력도 부릴 수 있었다.

그런 인간들이 컨닝을 하겠나.

"하아…… 시발."

욕은 할 수 있었다.

욕은 많이 하거든.

아래 연차나 상황이나 하여간 대상이

뭐가 되었건 간에 많이.

'저분은 머리끝까지 빨개졌네…… 안타깝다. 나이도 많으신 거 같은데……'

거의 모두가 비탄에 빠져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이가 있다면, 안대훈이었다.

외모부터 좌중을 압도하는데, 표정이나 색도 그래서 그랬다.

'다 풀었군.'

허나 안대훈은 그냥 아까울 뿐이었다.

이 문제가.

수혁이 좀만 더 시간이 있다면 더 많은 문제를 내주셨을 텐데, 뭐 이런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건 그 누구보다 안대훈이 제일 잘 알았다.

수혁은 환자를 봐야 할 사람이지, 문제를 내야 할 사람은 아니지 않나.

'부족하나마..… 다른 문제라도 풀어 볼까'

안대훈은 벌써 수혁이 낸 문제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푼 참이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그리 많이 지나지 않았다.

왜냐?

워낙에 뛰어난 사람이니까.

그간 미친 듯이 달려온 안대훈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슥.

그런 안대훈에게 다른 이가 낸 문제는 너무 쉬웠다.

아니, 싱겁다고 해야 할까?

이런 걸 문제라고 내나? 정말 이번엔 100%겠네.'

지문이 길긴 했다.

확실히 길긴 한데……

길기만 했다.

심지어 문제 중에는 지문이랑 관계없이 딱 문제만 봐도 풀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

이래서야 무슨 변별력이 있겠나.

'이러다 만점자 막 나오는 거 아닌가……'

그럼 안 되는데.

나만 빛나야 할 텐데.

'아니, 아닌가? 어차피 만점이면 수석이니까...... 교주님께 누를 끼치는 건 아닌가?'

초조함이 후루룩 피어오르다가 다시 흘러내리고 하는 시간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럼 진짜 만점을 노려야겠군......'

실수할 수도 있어서 그랬다.

실수도 곧 실력이란 말 정도는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

대학 병원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수가 곧 환자의 생명으로 직결되어 버리니까.

일견 숨 막혀 보일지 몰라도, 어쩔 수 없지 않겠나.

의료진들의 스트레스가 괜히 많은 게 아니었다.

'좋아…… 할 수 있어.'

물론 3년 차쯤 되면, 그것도 내과 3년 차쯤 되면 일종의 업이 되어 익숙해지기 마련이었다.

그중에서도 안대훈의 경험치는 레지던트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지 않겠지만, 또 통합진료센터의 이현종, 수혁은 그렇게 생각지 않겠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어지간한 조교수급은 된다고 봐도 무방했다.

슥슥.

해서, 안대훈은 망설임 없이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 또한 감독관의 눈에 훅 들어왔다.

다른 이들은 지문 보면서 끙끙대고 있어서 그랬다.

그중에서 오직 안대훈만이, 연필을 쉼 없이 굴려 가고 있었다.

'이제 아예 포기했나……?’

감독관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안대훈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문제 푸는 과정을 내려다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머리가 새빨개져 있다가, 지금은 좀 가라앉아 보이는 느낌이라는 것 정도였다.

'이상하네……진짜 푸는 거 같잖아……?'

선생님으로 오래 있다 보면 감독관으로 설 일도 많지 않겠나.

이런 큰 시험 말고 학교 시험까지 포함하면 거의 반평생 감독관을 해 왔다고 봐도 무방했다.

해서 사람을 볼 때 눈알을 보는데, 눈알이 문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좀 빠르다 싶긴 했지만 하여간 풀고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되게 어려워하는 것 같은데 ...… 흐음.'

감독관은 넋 놓고 안대훈을 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시간이 훅훅 지나가고 있었다.

근데 이놈들, 특히 내과 놈들이 문제였다.

아직도 문제를 반도 안 푼 사람들이 많았다.

이래선 안 됐다.

감독관이 그냥 공정한 시험만을 위해서 들어와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시험의 원활한 진행도 도와야만 했다.

특히 이번 내과는 중요했다.

"자자. 이제 시간 30분 남았습니다. 좀만 더 서둘러 주십쇼."

“하아…...”

"아......"

“이거 어쩌나…...”

"흐아아아······.”

해서 워닝을 해 줬더니 난리가 났다.

재활의학과 쪽 사람들도 옆을 돌아보고 있었다.

뭔가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였다.

'어렵나 보네…...'

왜냐.

재활의학과는 올해 시험이 평이해서 그랬다.

합격률도 무난하게 95%는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재활은 내과에 비해 어마어마한 인기과였다.

일도 내과에 비하면야 편한 편이고, 나갔을 때의 대우도 더 좋았다.

'더럽게 고생하던데…… 여기서 떨어지면 얘들은 뭐가 되는 거지?'

살짝 미안해질 정도로 차이가 있어서일까.

재활의학과 친구들 중 일부는 진심으로 응원을 하기 시작한 이들도 있었다.

슥슥.

하여간 워닝은 효과가 있었다.

끙끙대던 이들 전원이 후다닥 풀 수 있는 문제부터 풀기 시작한 것.

덕분에 시간이 끝날 때쯤엔 거의 전원이 문제를 다 풀 수 있었다.

끝 페이지까지 넘어갔다는 얘기였다.

허나 답안지를 낼 때는 다들 아쉬워하는 얼굴들이었다.

어떤 이는 부리나케 계산에 들어간 이들도 있었다.

절대 평가 기준에 자신이 부합하는지 못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자, 1교시 끝났습니다. 다음 교시가 마지막이니…… 남은 시간까지 힘내 주시기 바랍니다.”

감독관은 그렇게 말하곤, 답안지를 가지고 밖으로 향했다.

아니, 밖으로 향하려 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닥치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터였다.

“야, 대훈아. 어땠어?"

"대훈아, 어땠어?"

때문에, 감독관은 잠시 강의실에 남아 이 일련의 사람들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봐야만 했다.

달리 할 것도 없어서 그냥 봤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반말을…… 해? 의사들끼리 위계가 엄청나다고 하더니……'

지금 들어온 놈들은 다 어려 보이는데,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반말을 쓰고 있었다.

미친놈들 아닌가.

버릇없는 놈들.

아무리 동기라도 나이 차가 나면 형이라고 해야 될 거 아닌가.

“쉽던데."

허나 아직 놀라기엔 이른 마당이었다.

'쉽다구요? 선생님……'

감독관은 이미 안대훈이 자신과 비슷한 연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해서 은연중에 응원하고 있었는데 저런 구라를 치다니.

“아…… 역시 넌 쉬웠구나. 어쩐지 그럴 거 같았어.”

“케이스 풀이하는 건 전국에서 대훈이가 짱이지."

“아, 근데 쉬웠다고? 그 정도였나?"

또 놀랄 일은 사람들이 안대훈의 말에 대해 토를 달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토를 달기는커녕 그저 감탄만 하고 있었다.

평소 엄청 우수했던 모양이었다.

- 내과 시험 감독관님들은 지금 바로 2강당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하도 신기하다 보니 그 자리에 붙박이장처럼 서 있었다.

아마 방송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계속 있었을 텐데.

이렇게 콕 짚어서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어쩐지 무슨 일인지 알 것도 같았다.

‘여기 분위기 좀 봐라……’

스무 살 수험생들도 아니고,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쯤 되는 사람들이 이렇게 침울해지는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지 않겠나?

해서 강당으로 들어갔더니, 감독관들이 우르르 서 있었다.

그 앞에는 내과 교수들과 보복부 직원들도 있었다.

보통 이런 적은 없는데, 확실히 특이한 상황이긴 한 모양이었다.

"분위기 어땠습니까?"

“아…… 별로였어요."

"저는 의사 선생님들이 그렇게 쌍욕을 잘하시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어휴…… 초상집이던데요? 딱 내과 시험만 그랬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최우식 서기관이었다.

그는 한결같은 답을 듣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아, 방금 들어오신 선생님. 그쪽은 어땠습니까?"

그러다 안대훈의 방에 있던 이를 보고 물었다.

감독관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어려워하긴 하시던데…… 한 분은 진짜 거침없이 푸시던데요? 30분 남았을 때는 주무셨어요."

"네? 누군데요?"

“이름은 모르겠는데 머리가 없으신……"

감독관의 말에 우창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걔는 예외입니다."

동시에 최우식은 우창윤을 비롯한 학회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학회 사람들은 억울했다.

'아니...... 새꺄...... 네가 문제 다 바꾸라며.'

시키는 대로 했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특히 동종헌 교수는 사무치는 억울함에 손을 벌벌 떨었다.

하지만 우창윤은 달랐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서기관님."

딸랑딸랑에 최적화된 인간 아닌가.

실력과 딸랑이를 겸비한 문딸겸비의 인재.

그것이 우창윤이었다.

"어떻게요?"

"여기. 2교시 문제...... 이걸로 하시면 됩니다. 미리 얘기도 나누지 않았습니까? 문제 수준은 떨어져도.….. 아마 다 맞출 수 있는 수준일 겁니다."

그는 전혀 다른 문제지를 들고 있었다.

대충 봐도 '나 쉬워요'라고 쓰여 있는 느낌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