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3화 대훈아 오늘은 너 원하는 거 다 해 줄게 (4)
“이, 일단 교수님 자리 하나만 좀 내주실 수 있어요?"
대훈의 말에, 응급의학과 간호사는 이게 뭔 소리인가 하는 얼굴로 수혁을 돌아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취객인 줄로만 알고 있었어서 그랬다.
아니, 그냥이 아니라 중독자인 줄 알았다.
'지금 세 시인데…… 교수……? 어? 이수혁 교수님...?'
허나 간호사의 눈에 비친 사람은 이수혁이 맞았다.
그래서 정말 놀라웠다.
사실 수혁에 대한 이미지가 꽤 좋아서 그랬다.
특히 간호사들 사이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딴짓 안 하고 일만 하는 교수이지 않나.
게다가 와서 이상한 드립도 치지 않고,
언제나 나름 멀끔한 차림으로 나타나선, 에이아이처럼 환자를 해결해 주고 떠나는 사람.
'와...... 이거 은경이가 보면 진짜 놀라겠네!'
그렇다 보니 나름 간호사들 중 수혁을 동경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이성의 감정을 느끼는 이들도 있을 터였다.
"어우우.……”
뭐 남녀가 같이 일하는 곳에서 그럴 수 있지 싶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은 슬의생 같은 판타지 세계관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애정의 대상이 되는 교수도 어딘가에 있긴 있겠지만, 그냥 없다고 보는 게 나았다.
"알코올 인톡시케이션……”
그 희귀한 존재가 눈앞에 엎어져서 이상한 주정을 부리고 있었다.
"교수님?"
“인톡시케이션으로 후…… 인한 위장장애 및 평......뭐더라. 아, 평형기능 장애….”
"저기 선생님. 교수님 이거 괜찮으신 거 맞아요? 정식으로 수속해서 CT라도 찍는 게…….”
“과속…… 차량 후...... 타고...... 인지 괴리…… 후...... 멀미.... 읍.”
"야! 여기 비닐! 봉다리!"
진상?
아니, 개진상?
뭔 미친 소리를 하나 싶어서 자세히 들으려고 귀를 가져다 댔더니 구역질을 하려 하고 있었다.
그나마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안에 든 내용물을 쏟아 내지는 않았지만.
“하아…….”
하여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걸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간호사도 괴롭긴 했지만.
안대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는 아직까지 이렇게까지 흐트러진 수혁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앞으로도 못 볼 것 같았다.
모시고 싶었다.
모셔야 했다.
"어우, 선생님. 저는 어떻게 끅. 되는…… 끅.”
하지만 그의 옆에는 환자가 있었다.
그것도 되게 아파 보이는 얼굴의 환자였다.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일단…… 아까 했던 치료 좀 더 해 보고요. 약도 쓰겠습니다.”
"약...... 끅. 약이요? 약. 끅 약이 있어요?"
"뭐…… 써볼 수 있는 약은 있습니다."
해서 안대훈은 단장(斷腸)의 아픔을 느끼며 수혁에게서 신경을 끄고, 환자에게로 향했다.
정말이지, 새끼를 잃은 엄마 원숭이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알알이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대훈에게 수혁인데.
허나 안대훈은 수혁과 이현종에게 배운 제자이기도 하기에 최선을 다해 눈앞의 환자를 보고 있었다.
수혁은 보기엔 안타까워도 그냥 주취자라는 걸 머리로는 확실히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주정이 진단이라니. 과연 의술의 신이로다.'
아까 했던 이상한 말의 진위도 대훈만은 알고 있었다.
확실히 수혁은 범인은 아니었다.
“맥페란(항구토제) 주시고…… 설압자 좀 주시겠어요?"
“아, 네.”
“혹시 모르니까 펜라이트도 주시고요. 아, 통합진료센터에 의뢰도 넣어 주세요. 어차피 교수님이 보시건 이현종 교수님이 보시건 할 것 같아서요."
"네, 선생님."
대훈은 아직 3년 차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능숙하게 지시를 딱딱 내렸다.
듣는 사람들도 그 지시에 딱딱 잘 따랐다.
늙수그레한 얼굴이 일할 때만큼은 압도적으로 유리하지 않던가.
안대훈은 그런 면에 있어서 천생 교수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이걸...... 끅. 또.……? 끅."
환자는 설압자를 보며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까 숟가락으로 누를 때 너무 고통스러웠던 탓에 그랬다.
그냥 아무 이상 없는 상태에서 눌러도 구역질이 나는데, 환자는 심지어 바로 전에 목이 막혀서 죽을 뻔한 상황이지 않나.
그 때문에 자극이 된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지금은 가만히 있어도 아팠다.
“네, 일단 멈추는지 봐야 합니다. 안 멈추면 기질적 원인을 의심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일이 살짝 복잡해져요."
"하아...... 끅."
딸꾹질이 참 악랄한 병이라는 걸 아는가.
하는 사람은 진짜 고통스러운 데다가, 기저에 깔린 질환마저 심각할 수 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운 증상이었다.
솔직히 이 환자도 그랬다.
물론 대훈에게 그렇다는 건 아니었다.
뒤늦게 따라온 연인에게는 좀 그랬다.
'하...... 웃으면 화내겠지?'
방금 한숨을 쉬면서도 딸꾹질을 하는데, 좀 웃겼다.
그러나 연인은 초인적인 인내심과 사랑을 발휘해서 간신히 참았다.
“웁․ 우웁․ 끅.”
그 사이에 대훈은 다시 혀뿌리를 자극했고, 실패했다.
"으아아.”
경동맥을 꾹 눌렀고, 실패했다.
“아, 아파끅."
쇄골 주변을 꽉 눌렀고, 실패했다.
쓸 수 있는 방법은 거의 다 쓴 셈이었다.
‘아니, 아니지…아직 한 발 남았다…..'
대훈은 후...... 한숨을 내쉬곤 장갑을 꼈다.
그러곤 커튼도 쳤다.
그 모습이 자못 비장해서 연인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간호사는 대훈이 뭘 할지 알아서 자리를 비켜 주었다.
환자는 짐작이 가서 도망치려 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병원에서, 그것도 처음 온 환자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경우는 없다고 보면 되었다.
"바지...... 꼭 내려요?"
“네. 제가 내리게 하지 말아 주십쇼."
“하…… 끅. 근데 뭘……”
"직장을 자극하려 합니다."
"직장...…? 끅."
“네, 문헌에도 나와 있는 방법입니다. 가장 강력하기도 하고요."
이걸로도 안 되면 그땐 다른 검사를 해 봐야 한다.
대훈은 심리적 마지노선을 정하고, 바지를 내린 환자의 항문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무슨 심호흡 같은 게 필요하지는 않았다.
대학 병원 내과 의사로 일하다 보면 사실 이럴 만한 일이 되게 많아서 그랬다.
물론 딸꾹질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 본 건 두 번째지만, 혈변의 양상을 보기 위해서는 말이 얄궂기는 한데, 그야말로 밥 먹듯이 해 봤다.
"으...... 끅."
그렇다고 환자도 익숙할 수 있는 건 아니어서, 대훈은 찌르고 장갑을 벗자마자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환자를 관찰했는데 여전히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이런 망할.'
대훈은 반사적으로 옆 침대를 바라보았다.
"어우...... 돈다. 돌아."
완전히 맛탱이가 가 버린 수혁이 보였다.
이제는 양복도 풀어헤친 채 천장인지 뭔지 특정할 수 없는 어딘가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Verrigo…… 후...... 알코올이 무섭긴 하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의학 용어를 내뱉고 있었는데, 그래서 더 무서웠다.
“아니, 얘는 왜 꽐라가 됐어?"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현종이었다.
그가 세상에서 제일 어처구니없어하는 얼굴로 선 채 대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나면...."
“네가 우리 아들 꽐라 만들었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대훈은 오해를 사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급히 말을 내뱉었다.
다행히 눈앞에 환자가 있어서 이현종을 납득시키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
“저, 교수님. 근데 뭐 하시는……”
"아, 우리 수혁이 이렇게 된 걸 다시 볼 수 있을 거 같냐?"
“아, 아뇨. 볼 수 없을 것 같긴 합니다.”
“좀 찍어 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사실 이현종은 수혁을 보면 수혁이 뭔 짓을 하고 있던 간에 기분이 좋아지는 편이다 보니, 별 노력이 필요 없기도 했다.
지금도 함박웃음을 지은 채 수혁을 찍고 있었다.
심지어 진료 보는 동안에도 계속 찍을 수 있도록 인턴까지 동원했다.
이게 갑질일 수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인턴도 그러긴 했다.
'영상이나 찍고 있을 수 있으면 개꿀이지 뭐.'
응급실 인턴의 고됨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여간…… 딸꾹질을 계속하신다?"
“네.”
이현종은 그렇게 필요한 세팅을 마치고, 환자에 대해 물었다.
눈으로는 환자를 관찰하면서였다.
바루다는 없지만, 지난 세월이 있지 않나.
심지어 그냥 지나간 세월도 아니고, 치열하게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런 이현종은 몇 가지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기저질환 가능성은 떨어져. 뭐...... 암 같은 경우에 초기라면 얼마든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아주 초기 암은 딸꾹질과 같은 전신 증상을 거의 일으키지 못하지.'
이현종은 추론을 하면서 동시에 질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환자에게 병력 청취했나?"
"아, 아직..... 제대로 하진 못했습니다.”
“제대로 하지 못해? 그건 무슨 말이야?"
“그…… 식사하다가 갑자기 질식이 발생해서 처치하고 온 거여서요."
“환자가 힘들어해서 그랬어?"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흠. 비켜 봐.”
이현종은 안대훈에게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아는 사람이지 않나.
지난 3년 아니, 4년간의 노고를 평가받는 날이었다.
그리고 안대훈의 노고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기도 했고.
이현종은 그런 날 경황이 없어 저지른 아주 사소한 실수에 대해 뭐라 할 만큼 몰인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해서 안대훈 대신 환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뭔가 진단받은 병이 있으십니까?"
"어떤...... 끕."
묻자마자 알았다.
뭔가 있긴 있다는 걸.
신체적인 질환은 아닐 수도 있었다.
허나 치료받고 있는 질환은 있다면.
'정신과...... 쪽인가?'
이현종은 질문을 조심스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되물었다.
“아, 보호자분, 잠시…… 우리 안대훈 선생하고 면담 좀 하시죠.”
아니, 그 전에 보호자부터 떼어내기로 했다.
부부일 수도 있겠지만, 설령 부부 관계라고 해도 비밀이 없는 긴 아니라는 걸 알아서 그랬다.
특히 이상하게 남자들은 본인이 아픈 걸 자꾸 숨기려 하지 않나.
그런다고 아픈 게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아, 네, 교수님.”
안대훈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보니, 정확히 무슨 질문을 할지는 몰라도 곤란한 질문일 것임을 알아차리곤 보호자와 함께 옆으로 사라졌다.
이현종은 이만하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을 때, 재차 물었다.
"숨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진단에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거든요."
"끅."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는 질환이 있습니까?"
“끅...... 네."
환자 또한 이현종의 배려를 눈치챘고, 고개를 끄덕였다.
딸꾹질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런 것도 있었다.
뭐가 되었건 이걸 좀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보기에 우스운 증상이라고 고통스럽지 않은 건 아니어서 그랬다.
"어떤 질환이죠?"
"그…… 양극성 장애……가 있습니다."
"아."
조울증.
그렇다면 무슨 약을 썼을까.
그 약 중 딸꾹질을 일으킬 수 있는 약이 있을까?
아니면, 별 상관없이 정말 암과 같은 기저질환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이현종의 머릿속을 부유하기 시작했다.
"음?"
그때, 갑자기 뒤편에서 술 냄새가 훅 하고 풍겨 왔다.
그리고 그 술 냄새의 주인공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눈 풀린 이수혁이 서 있었다.
"아, 교수님! 거기 화장실 아니에요!"
간호사도 뒤에 있었고.
“아리피프라졸......”
"뭐?"
수혁은 술 냄새 섞인 단어를 내뱉곤 다시 끌려갔다.
이현종과 환자, 그리고 자리로 돌아온 안대훈은 그런 수혁을 여러 감정이 섞인 채 바라보았다.
아니, 사실 지금은 하나였다.
'왜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