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7화 전문의 기념 학회 (3)
“미국도 학회를 호텔에서 하는군요?"
"어……? 어, 그렇지. 미국 내과 학회는 돈 진짜 많은 곳이야. 회원 수가 몇인데. 나도 회원이잖아. 회비가 싼 것도 아니고…… 게다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제약회사들이 다 여기는 기본적으로 후원한다고."
"아...… 와……”
“그 덕에 우리도 이 호텔을 배정받은 거지."
숙소로 받은 곳은 메리어트 호텔이었다.
타임스퀘어 근처라고 하기에도 좀 그럴 정도로 딱 붙은 호텔.
그만큼 가격이 미친 곳이었는데 여길 후원해 주었다.
거기에 수혁 후원금이 붙어서 룸도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아...... 센터는 숙소를 거기로 가셨어요?"
"어? 어. 우리는 포스터 아니고 다 발표라. 일단 배정을 좋게 받았지."
"아……”
같은 비행기에 탄 그러나 이코노미 타서 빈정이 좀 상한 교수와 펠로우, 레지던트 무리가 또다시 상처받은 얼굴로 서 있었다.
'왜 내가 택시 같이 잡자고 했을까...…? 어차피 인원수도 잘 안 맞는데‥….'
다 비슷한 곳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뉴욕은 진짜 비싸니까.
특히 타임스퀘어는 그중에서도 미친 곳이지 않나.
해서 대부분의 학회 참석자들의 호텔은 거기서 두 블럭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마침 3성급 호텔이 쭉 늘어선 곳이 있다 보니, 거의 뭐 학회 참석자들의 메카라 할 수 있었다.
'설마하니 거기로 갈 줄은 몰랐지……'
해서 물어봤더니 메리어트라는 이상한 답이 돌아왔다.
"우린 스위트야."
“아……”
그리고 그 답은 점점 더 이상해져만 가고 있었다.
개새끼.
소새끼.
교수는 속으로 욕을 씨불여보았다.
물론 겉으로는 웃고 있었다.
이현종이 어디 이런 일로 욕먹어야 할 짬밥인가.
솔직히 심장 학회로 냈으면 알아서 학회 측에서 비즈니스 표 보내고 스위트 룸을 줬을 터였다.
원로임과 동시에 학회의 주축인 데다가 가장 잘 나가는 현역이었으니.
"어디로 간다고? 거기 좀 위험? 하지 않나?"
"아니......그......"
"경찰이 좀 적지 않나?"
"그....."
그런 인간이 이렇게 갈굴 줄이야?
지금이라도 월급 몰빵해서 방을 옮길까 했지만, 갑자기 처자식 얼굴이 아른거렸다.
방 하나 값이 한 달 학원 값이지 않나.
"그럼 저희는 먼저…… 먼저 가겠습니다.”
“응, 그래. 밝을 때 들어가. 거기 위험해."
"후우..… 네. 감사합니다."
해서 부리나케 택시 타고 도망갔다.
이현종은 그 뒷모습을 보고 웃다가 후회했다.
“아. 우리 타는 차 보여 줘야 했는데.”
왜냐하면, 방금 온 차가 벤츠 스프린터라서 그랬다.
스위트를 빌렸더니, 그것도 방을 두 개나 빌렸더니 호텔 측에서 이걸 보내 줬더랬다.
"후하하하. 자랑 안 해도 기분이 좋구만."
허나 차에 타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들 중에서는 뉴욕 교통이 어떤지 가장 잘 아는 이현종이었기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언제 도착해도 막힐 수밖에 없는 도시에선 차가 중요했다.
좁은 차에서 막히는 구간에 갇히면 정말이지, 이런 게 분노라는 걸 새로 배울 수 있는 도시였다.
“음…… 잘해 놨네.”
“그보다…… 확실히 외국 사람이 많네요.”
"여긴 미국이니까 그렇지, 수혁아."
“아니, 그러니까요. 생각보다 미국 사람 아닌 사람이 더 많은 거 같은데요?"
“아…… 너도 국제 학회 미국으로 온 건 처음이구나."
“네. 이럴 거라고 듣긴 했는데 진짜 그렇네요.”
수혁은 오는 동안 그냥 자버렸다..
돈도 냈겠다. 아깝단 생각에 일등석을 온전히 즐기고자 잠도 안 잤기에 그랬다.
[이러다 돈 생각만 하다가 학회 끝나겠어요.]
'아...... 안 되는데. 기왕 온 거 공부는 해야 되는데.'
처음엔 바루다도 동조했으나 점점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우였다.
수혁은 의학 덕후여서 그랬다.
딱 학회장에 들어오자마자 이곳저곳을 들여다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일개 레지던트 시절이 아니다 보니, 모든 일행은 그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내일 우리 발표 있는 곳이네. 잘해 놨네.”
“응. 그러네. 흐음...... 근데 좀 작네."
“어쩔 수 없죠. 저희 센터 이름으로 국제 학회에 낸 건 처음이니까요."
"그래도 난 유명인인데. 이렇게 해?"
"그...... 하긴 그렇긴 하네요."
"내일 보여 줘야지 뭐."
강의실은 아직 대개 비어 있었다.
허나 포스터는 거의 다 설치되어 있어서 찬찬히 돌아보기 좋았다.
"포스터도 꽤 좋은 주제들이 있네요. 설계가 아쉽긴 한데......”
"응. 엔수가 적거나…… 너희들도 와서 다 봐 봐. 이수혁 교수 말대로 포스터가 의외로 추후 연구에 단초가 되는 경우가 있어. 우리가 그런 것처럼 미국에서도 이런 건 거의 레지던트들이 하거든?"
이현종은 그 중심에 선 채 제자들을 불렀다.
하늘 같은 사람의 부름인 만큼 죄다 모여서 그를 돌아보았다.
“어…… 닥터 리다."
"응? 심장내과 닥터 리?"
동양인 여럿이 모여 있다 보니 눈길을 끌었다.
학회 당일이면 사람이 많아서 그냥 묻혔겠지만, 오늘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저 설치하러 온 사람들 아니면 강의 리허설을 하러 온 사람들 또는 학회 관련자들이 다였다.
덕분에 이현종은 외국인들의 시선도 받을 수 있었는데, 그는 천성이 뻔뻔하기도 한데다가 애초에 국제 학회에서 대가 취급을 받아온 지 오래된 사람이다 보니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당황하기는커녕 어느 순간부터 은근슬쩍 한국어를 영어로 바꾸었다.
“레지던트 때 논문 내봐서 일 거야. 사실 이번에도 그랬지? 아이디어 자체는 교수들이 던져 주는 경우가 많아. 레지던트 선에서 들고 오는 아이디어는…… 본인이 생각할 때만 참신한 경우가 많거든. 그럴 수밖에 없는데 경험이 적다 보니, 원래 있던 내용을 새로운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그러지."
이현종의 영어는 나이를 생각할 때 말이 안 될 정도로 유창한 편이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인정을 받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긴 한데, 그걸 감안하고도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중에 정말 보석 같은 아이디어가 있어. 임상으로 머리가 굳어 버린 교수들은 생각지도 못하는 아이디어가 있지. 그걸 디벨롭해서 나온 게 이 중에 있을 거야. 물론 레지던트가 주도적으로 진행한 연구가 보니 어설프지. 약점이 술술 보여. 여기도 봐라. 대체 왜 이런 결론을 낸 거야?"
이현종의 모두까기 스킬은 단순한 국내용이 아니었다.
그는 공평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해외에서도 마구 깠다.
지금도 그랬다.
심지어 까이는 사람은 관광 중인데도 그랬다.
"그런데 말이야…… 원래 논문은 잘 쓴 논문이고 못 쓴 논문이고 다 도움이 된다고 잘 쓴 건 공부가 되고, 못 쓴 건 개선할 점이 한가득하잖아. 그런 거 보면서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논문이 나와. 난 벌써 한두 개 생각났어. 그중 하나는 NEJM감이네."
심지어 능력도 있는 사람이었다.
자기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검증까지 이중삼중으로 마친 사람.
그런 이가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다들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지 않겠나.
당장 올해도 이현종 이름을 단 NEJM 논문이 나왔으니, 교수들마저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NEJM감이 있다고……?'
'저만한 사람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는데......'
'뭐지. 어떤 주제야?'
'흐음…… 이따 천천히 뜯어 봐야지.'
이현종은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시 보니까 그 정도는 아니네.'
다시 아니라고 할까.
하다가 그냥 떠나기로 했다.
모양 빠지는 일이지 않나.
'어차피 어그로 끌려고 한 일이지.'
이쯤에서 논문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터였다.
해야 할 얘기는 따로 있었다.
“아무튼, 쓱 보자고. 우리 내일 다 발표지? 저기서...... 한방에 몰아 뒀는데, 열심히 해 보자고. 내용만 따지면 우리 쪽이 여기 있는 포스터 다 합친 것보다 나...... 아 이거 한국어로 해야 했는데 영어로 했네. 하하. 하여간 특히 이수혁 교수 발표는 발군이지. 뭐 다들 놀랄 거야."
다분히 속이 보이는 연기를 하고는 즉 사라졌다.
그냥 약 올리려고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일정이 있었다.
수혁이 후원한 덕에 식당도 예약되어 있었고, 또 뮤지컬까지 예약되어 있었다.
'내일.…… 발표시구나.'
'이수혁 교수……? 누구지? 처음 들어 보는데.'
'아...… 설마 그 이수혁인가? 나는 개발자인 줄 알았는데, 의사였어?'
그래서 나간 건데 의외의 후폭풍이 있었다.
수혁의 이름이 각인된 것.
아니,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 씨앗은 수혁이 뿌려 놓은 것이긴 했다.
“싱가포르...… 거기서 이수혁 교수 도움으로 해결한 케이스가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싱가포르? 거기 그래도 의료 수준이 나쁘지 않은 곳 아닌가?"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주변국에서는 의료 관광을 그리로 가지.”
"두바이 측에도 지금 제일 잘 나가는 병원이 태화에서 지은 병원이지 않나?”
“아...... 그거 물 먹어가지고 우리 병원이 난리지."
사실 태화가 같이 심어 둔 것이기도 했다.
수혁의 지난 몇 년과 태화 바이오 그룹의 노력은 암암리에 이곳저곳에 퍼져 가고 있었다.
사실 어마어마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허나 한계도 있었다.
아직 메이저 레벨에는 비비지 못했다는 것.
의학에서 메이저라 함은 역시나 미국이었다.
이런저런 단점이 있는 나라이긴 하지만, 하여간에 세계 최고의 의료를 경험하려면 미국으로 와야 하지 않나.
"내일 발표라고?"
“젊어 보이던데…… 그냥 뭐 특수관계에 있는 사람 아닐까?"
"하나도 안 닮았던데 뭔 소리야."
"그런가? 난 동양인은 구분이 안 가서."
“너 그거 되게 인종차별적인 발언인 거 알지?"
“우리끼리 하는 소리지…… 하여간 궁금해지네?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닥터 리 같은 사람이 저렇게 말을 했는지……”
그들은 이제 이현종이 언급했던 포스터 앞에 서 있었다.
잘 보니까 그냥저냥 잘 쓴 포스터였다.
여기 약점이 많다고?
'NEJM이 있다고?'
'이게 그렇게 못 쓴 거라고 하고…… 내일 발표는 기대해도 좋다고 했지? 흐음..'
어그로는 제대로 끌린 셈이었다.
게다가 그것과 별개로 학회 측에서의 관심도 엄청났다.
“일등석 타고 왔다고?”
“네. 태화에서 후원하지 않았을까요? 숙소도 여기 스위트래요.”
“아니, 나보다 좋은 방에서 묵네."
"그러니까요.”
“거기 기업이 뭐…… 작은 기업도 아니고…… 그냥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죠. 기업들이 돈 허투루 쓸 리가 없는데 ......”
이걸 설마 교수 하나가 플렉스했다고 생각할 수가 없어서 그랬다.
상식선에서 보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게다가 방금 들어온 제보를 보니 이번엔 호텔 식당에 가 있다고 했다.
그것도 이번에 미슐랭 3스타를 받아서 가격 올린 그 식당.
'그다음엔 뮤지컬을 간다...… 뭐 기업의 미래야? 아니면 총수 일가인가? 그러면 좀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예전 같았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었다.
콧대가 얼마나 높은데 한국인에게 관심을 두겠나.
'혹시 모르잖아. BTS 사인이라도 받아 줄지……’
허나 이젠 얘기가 달라진 지 오래였다.
한국 대기업 총수라면 앞에서 정수리도 보일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