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8화 미국 데뷔 (1)
"음......"
사람이 꽤 많았다.
뉴욕에서 열리는 미국 학회니 당연했지만.
하여간 학회 당일 호텔 로비는 목에 명찰 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RSNA랑은 좀 다르지 않아요. 여기는?"
수혁은 언젠가 김진실 교수에게 주워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정식 명칭은 Radiological Society of North America,
즉 북미영상의학회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냥 영상의학과에 있어 세계 최고라고 보면 되었다.
매년 시카고에서만 열리다 보니 RSNA 시즌이라는 말도 있다고 들었다.
일부러 학회 차원에서 학회 파워를 올리기 위해 전략적인 선택을 한 것인데, 엄청 잘 먹혀들어 간 셈이었다.
하여간 그때가 되면 전 세계에서 몰려든 영상의학과 의사들로 인해 학회장은 물론이거니와 시카고 전체가 가득 찬다고 했다.
“어...... 다르지. 다르긴 한데...... 그래도 미국에서 열리는 학회는 다들 좀 열심히 해."
"하...... 하긴. 유럽 학회는 놀러 가는 느낌이라고 했죠?"
"그렇게 말하면 기분 나빠할 텐데 사실 그렇게 된 지 오래지."
"흐음...... 그렇구나."
그러니까 등록한 사람들 전원이 학회장에 와 있다, 이 말이었다.
유럽 학회는 등록한 사람들 중 태반이 나가서 놀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고.
물론 최근 들어 분위기가 다시 좀 조여지는 느낌이라곤 하지만, 그렇다고 대세가 뒤엎어지지는 않았다.
“근데 저희 발표 장소는 엄청...… 마이너한 곳 아니에요? 약간 세션이 잡다구리했는데?"
“그렇지. 네가 하도 늦게 말해서 남는 자리가 거기밖에 없었어."
"그쵸. 그래서 별 부담 없이 온 건데……”
"그러게. 이게 뭐니."
열띤 분위기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허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통합진료센터 여섯은 작디작은 컨퍼런스 룸 앞에 서 있었는데, 안쪽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정도만 있을 지경이었다.
단상 위에 앉아 있던 좌장도 놀란 얼굴이었다.
별 긴장감 없이 있다가 뜨끔한 얼굴이라고나 할까?
“그...… 이제 곧 세션 시작이니까 빨리 앉아 주십시오. 서 계시면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놓을 정도로 정신이 나간 건 아니다 보니 금세 멀끔한 얼굴이 되어 이렇게 외쳤다.
그러자 웅성대던 이들이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자리가 부족해서, 태반은 뒤로 가서 서 있었다.
“그리고 발표 맡으신 분들…… 빨리 앞쪽으로 와 주시죠!"
동시에 좌장과 학회 행사 진행을 맡은 인원이 외쳐 댔다.
길을 터 주면서였는데, 덕분에 통합진료센터 인원도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세션에 배당된 발표 개수는 기껏해야 8개.
그중 6개가 한 센터에서 나온 참이었다.
이 꼴을 보고 나서야 이현종은 대체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렸는지 알 거 같았다.
'우리가 궁금한가 본데…… 하긴, 아시아 계열 병원들 중에서는 나름 우리가 꽤 알려져 있을 거야.'
센터가 출범한 지 이제 고작해야 1년 남짓.
학회가 출범한 지는 반년이 조금 넘은 마당이지만, 그들의 행보는 대단하지 않았나.
싱가포르에서도, 두바이에서도 통합진료센터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몽골에서도 몇 건 해내는 바람에, 그야말로 의료 관광의 허브가 되어 가고 있었다.
심지어 애초에 의료 관광의 메카로 발돋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유수의 대학 병원에서조차 통합진료센터로 전원 보내는 것에 주저함이 없어졌다.
직접 겪지는 못했더라도 뭔가 들어 본 사람은 많을 터였다.
'뭐…… 잘하라는 말은 불필요하겠지.'
이현종은 수혁을 돌아보았다.
다른 놈들?
그놈들도 잘하는 놈들이긴 하지만, 국제 학회에서 두각을 드러낼 만한 놈들은 아직 아니었다.
열심히 배우고 구르면 뭐라도 될 가능성'이 있는 놈들이란 얘기였다.
'얜......처음부터 보석이었어.'
그에 반해 수혁은 완성된 천재였다.
아니, 그 와중에 저 혼자 계속 앞으로 달려나가는 괴물이었다.
이현종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표정을 살폈다.
어떻게 변할지 기대하면서였다.
"자 그럼...... 첫 번째 연자는 태화의료원 통합진료센터 펠로우 안대훈 선생입니다. 발표 주제는 중환자 의학 업데이트입니다."
다만 좀 아쉬운 건 이게 내과학회라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분과학회가 아니다 보니 최정점에 선 주제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지 않겠나.
때문에, 주제도 이런 식으로 선정해야만 했다.
물론 이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일단 펠로우 주제에, 사실은 레지던트인 주제에 제목이 좀 거만하지 않나.
중환자 의학 업데이트라니.
발표라기보다는 강연에 가까운 주제라 할 수 있었다.
"음."
그래서 그런가, 반응이 좀 이상했다.
하지만 단상 위에 모습을 드러낸 안대훈을 보자마자 다시 뒤바뀌었다.
"아."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 않나.
아마 대한민국에서는 펠로우를 오래 하나보다 싶을 터였다.
'사실은 이제 서른인데.'
이현종은 굳이 그런 말을 하진 않았다.
대신 제자 안대훈을 바라보았다.
안대훈은 침착한 얼굴이었다.
수많은 외국인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임에도 그랬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수혁과 이현종에게 수련을 받았으니까.
"안녕하십니까, 안대훈입니다. 중환자 의학이라는 개념이 출범한 지는 꽤 되었는데...... 여전히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현장을 들여다보면 놀랍도록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이 많죠.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개선되어 가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죠."
덕분에 안대훈은 주르륵 발표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종종 너무 로컬, 즉 대한민국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도 뒤섞여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미국에서도 충분히 적용 가능한 이야기들이었다.
“항생제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죠. 감염관리실에서 관리를 하긴 하지만..... 여전히 중환자실의 내성균 비율은 다른 병실보다 훨씬 높습니다. 이는 병실 내의 감염을 시사합니다. 이유는 이렇죠."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얘기는 항생제와 슈퍼 박테리아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원내 감염은 21세기 의학에 있어, 암이나 노화와 같은 주제를 제외하면 가장 중요한
화두였으니까.
동시에 외면하고 싶은 주제이기도 했다.
돈은 안 되는데, 그러면서도 심각해서 그랬다.
"의료진이 환자의 몸에 손을 대는 빈도가 확실히 높습니다. 동시에 손 씻기를 미처 하지 못하고 달려들어야 하는...... 소위 말하는 '응급 상황'의 빈도도 높죠. 이 두 가지 상황이 동시에 발생하면 우리가 경계해야 하고 또 두려워해야 하는 원내 감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항생제 개발은 항암제에 비해 팬시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돈이 되지도 않았다.
허나 필요한 일이었다.
앞으로 점점 더 그렇게 될 터였다.
인류가 항생제를 개발한 지 이제 고작 100년도 채 안 되었는데, 수많은 내성균이 발생해서 그랬다.
문제는 점점 더 그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 지침은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환자를 보고 난 다음엔 다른 환자 보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하죠. 그건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만...... 1분 1초가 급한 상황에서, 지금 당장 처치하지 않으면 환자가 죽는 상황에서 손 씻기라...... 무시하는 게 정당화됩니다. 감염은 그
중요도가 뒤로 밀릴 테니까요."
모든 의료진이 겪었던 딜레마였다.
이건 만국 공통이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미 눈앞의 사람이 통합진료센터인지 뭔지, 펠로우인지 뭔지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본인의 기억을 더듬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그랬었지.
그럼 안 됐었는데.
앞으론 어쩐다?
같은 일이 벌어진다손 쳐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이걸 어떻게 해결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결국, 당장의 산은 넘어도 뒤에 내성균에 의한 감염이 발생한다면.…… 응급처치를 해야 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했던 환자가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이 커지니까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종도 그랬다.
발표를 만들어 주다시피 한 수혁도 그랬다.
[이거 또 거들다 광고네. 그 새끼 그거 별것도 아닌 프로그램인데.]
통합진료센터팀은 죄다 흐뭇한 얼굴이었다.
바루다만 빼고 그랬다.
녀석은 틱틱대고 있었다.
수혁으로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뭔 소리야 인마. 네가 왜 라이벌 의식을 불태워.'
[라이벌이라니. 그런 하찮은 것에게……]
'근데 왜 그래. 하찮은 것이면 그냥 무시해.'
[아니, 아니! 그런 놈인 주제에 또 확 관심이 끌릴 거 아닙니까!]
'몰라, 인마. 잘 되는지 봐야지.'
[그건 그렇고...… 신성한 학회에서...… 그것도 제자 발표에 사심을 넣다니.]
'이렇게 해야 이번에 본 손해를 얼마간이라도 보전할 수 있어. 그래서, 어제 맛없었어?'
[아뇨. 지금도 생각이 나는군요…… 왜 미각에 대한 기억은 모호한 것인가……]
어쩌면 세계 유일의 강한 인공지능이지 않겠나.
바루다는 나름의 감정도 가지고 있는데다가, 독단적인 판단도 가능한 놈이니 아마 그럴 터였다.
그런 주제에 자아는커녕 단순 계산 프로그램에 불과한 거들다를 질투하다니.
심지어 먹을 거 얘기하니까 또 설득되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변수는 바로 응급 상황입니다. 이 응급 상황을 적어도 5분이라도 더 전에 예측할 수 있다면…… 도움이 되겠죠. 하지만 인력이 부족하고 변수가 넘치는
중환자실에서는 계속 들여다보고 있는 것조차 어렵죠. 그 와중에 계산까지 하는 건 더 어려운 일입니다."
안대훈은 그렇게 말하곤 화면을 넘겼다.
그러자 거들다가 떴다.
"그래서 우리 병원은 이 프로그램을 중환자실뿐 아니라 준중환자실에도 도입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다음부터는 솔직히 말해서 광고였다.
의료진의 발표를 빌어 하는 신뢰도 높아 보이는 광고.
그러면서도 수혁은 죄책감 하나 없었다.
왜냐?
실제로 이건 사람을 살릴 수 있으니까.
유료 프로그램이면 좀 어떤가?
한국처럼 수가 책정이 필요한 나라가 아니라면, 의료진들이 자기 돈 써서라도 쓸 게 뻔했다.
“시간이 늘어져서…… 질문과 답변은
추후 이메일 또는 점심시간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아."
과연 이번에도 그랬다.
다들 궁금증이 인 얼굴이었는데, 좌장의 말 때문에 아쉬움에 마이크로 향하던 발걸음을 되돌리고 있었다.
“다음은...… 동 병원 동 센터 김인수 펠로우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주제는..... 치매, 내과 전문의의 역할입니다."
숨돌릴 틈도 없이 김인수가 올라섰고, 양질의 발표를 해냈다.
암의 장종우, 감염의 김성진도 그랬다.
아니, 김성진의 발표는 꽤 훌륭했다.
감염을 들이 판지가 벌써 3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여운이 아직 채 가시지도 않았을 무렵, 이현종이 몸을 일으켰다.
“다음은 동 병원 동 센터 이현종 교수님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이현종 교수님은 국제 심장내과 학회 학회장을 역임하셨고, 심혈관 중재 시술의 신기원을 여신 분으로......"
다른 이들과는 달리 소개가 길었다.
그만큼 입지전적인 족적을 남긴 사람이었고, 덕분에 그가 단상 위에 올라서는 동안 사람이 더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