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9화 미국 데뷔 (2)
"안녕하십니까. 이현종입니다."
이현종에 대한 소문은 워낙에 무성한 편이지 않나.
또라이다, 무례맨이다. 학회의 깡패요, 병원의 자연재해이면서 동시에 엉망진창 원장이었다 등등.
이런 것만 보면 대체 이런 인간이 어떻게 원장을 했고, 또 더 나아가 태화 역사상 단둘뿐인 석좌 교수가 되었나 싶을 터였다.
김승규는 딱 봐도 얼굴로 협박하면 석좌 교수를 그냥 줄 것 같은데, 이 인간은 그것도 아니지 않나.
"쉿."
"쉿"
허나 여기서 집중해야 할 부분은 어떻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의 존경을 받고, 또 병원에서도 자를 수 없는지였다.
“오늘 발표할 것은…… 놓치기 쉬운 관상동맥 질환의 전조 증상 및 소견입니다.”
그가 입을 떼자 강의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미 센터 내 인원들의 발표가 썩 훌륭했던 탓에 수군대던 사람이 많았음에도 그랬다.
아니, 썩 훌륭한 정도도 아니었다.
수혁이 발표 대본을 짜고, 이현종이 갈군 만큼 대단히 잘했다.
꿀꺽.
그럼에도 지금 강의실에 들려오는 소리는 그저 마른 침 삼키는 소리뿐이었다.
그것마저도 눈치가 보일 정도로 조용했다.
“관상동맥 질환으로 인한 사망은 꾸준히 줄고 있습니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그렇죠. 우리가 잘해서일까요? 내과 의사가 진단을 잘해서일까요? 아쉽게도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한때 관상동맥 질환과 뇌혈관 질환으로 죽어 나가는 인원이 미쳐 날뛰던 적도 있었더랬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두 질환 모두 대사 질환(비만으로 인해 발생하는 질환)의 결과로 나타나는 합병증이니까.
그리고 20세기 중반 이후 인류는 화학 비료의 개발과 각종 운송 수단의 발전, 그리고 전쟁의 부재로 인해 이전과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 풍요로운 시대를 열어 버렸다.
비만의 위험성에 관한 연구를 하기도 전에 비만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 버렸고, 그로 인한 결과를 의료계는 통계로 겪어야만 했다.
당연하게도 의사들과 정부는 이를 줄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캠페인을 쉬지 않고 진행한 결과, 이제는 당뇨나 고혈압을 반드시 관리해야 하는 만성 질환으로 인지하게 되었죠. 그 전에 비만도 관리해야 할 질환의 일종으로 보기 시작하게 되었고요. 물론 최근엔 그러한 시각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도 생기고 있지만...... 하여간, 이를 통해 줄어들곤 있습니다.”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타났다.
이제 대부분의 주요 선진국에서 사망원인 1위는 혈관 질환이 아니라 암이 되었다.
물론 오래 살게 되면서 암의 발병률이 더 늘어난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엄밀히 말해 어느 정도 예방 가능한 질환인 혈관 질환이 줄어든 덕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혈관 질환은 위협적입니다. 내과 의사라면 반드시 이 질환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죠. 미리 처치할 수 있는 질환이라면 놓쳐선 안 됩니다. 이 질환의 특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음 화면에서는 암 환자와 혈관 질환 환자의 진단 전후 비교 사진이 떠 있었다.
암.
이것도 위협적인 병이긴 했다.
아니, 아마 현생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적일 터였다.
다른 병은 어떻게든 예방하는 게 가능하거나, 치료 또는 관리가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암은 어떤가.
그동안 세대를 거쳐 항암제들이 개발되었고, 앞으로 어떤 경과를 걷게 될지 미약한 빛이 보이는 순간이긴 했으나, 적어도 현재까지는 암을 이겼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암 환자는 진단이 된다고 해서 그날 바로 어떻게 되진 않습니다. 하지만 혈관 질환은 어떻습니까.
진단받은 그날 사망할 수 있고…… 남은 여생 동안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죠?"
허나 혈관 질환처럼 즉각적으로 환자가 어떻게 되진 않았다.
-그럼...... 우리 어머님은 이제 평생 이렇게 사셔야 되는 겁니까?
자다가 뇌경색이 온 어머님을 보면서, 그로 인해 말도 못 하게 된 어머님을 보면서 울부짖는 자식의 모습은 끔찍할지언정 보기 드문 광경은 아니었다.
-돌아가셨다고요? 아침에 조깅 나가신 건데…… 어제까지 건강하셨는데……
새벽 운동을 하다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면서 말끝을 흐리는 자식들의 모습 또한, 겨울이면 거의 늘 보게 되는 광경이라 할 수 있었다.
"책임감을 느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외래에서 스치고 지나간 환자가 바로 다음 날 영안실로 갈 수 있어요. 그들이 하는 말, 그리고 증상을 늘 잘 봐야 합니다. 그래야 그 환자들을 살릴 수 있어요.
아니면 남은 생을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즐겁게 보내게 만들어 줄 수 있죠.”
이현종뿐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의사들도 다 경험이 있긴 할 터였다.
심장 학회가 아니라 그냥 내과 학회다 보니 일반 내과 전문의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사실 대한민국처럼 동네 병원에 전문의가 넘치다 못해 분과 전문의가 발로 차이는 곳은 없으니까.
당장 이곳 미국만 해도 의뢰서를 들고 오면 내과 전문의가 보지, 심장내과 전문의를 볼 수는 없었다.
물론 아주 좋은 보험을 들고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만한 보험을 들고 있는 사람은 월가에서 일하거나 실리콘 밸리에서 일하는 이들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 집중하십시오."
이현종은 단지 경험이 많고 지식만 대단한 게 아니었다.
전달 능력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손뼉을 한 번 짝- 치곤 다음 화면을 띄웠다.
거기엔 여러 질환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개중에는 흔한 질환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질환도 있었다.
어떤 건 수혁 정도나 되어야 익숙할 만한 질환도 있었고, 그나마 쉬운 것도 안대훈 정도나 되어야 익숙할 만한 것들이었다.
어렵다. 이 말이었다.
“질환만 놓고 보면 너무 어렵죠. 그러니 여러분이 집중해야 할 것은 역시 증상입니다. 놓쳐선 안 될 증상을 위주로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히려 환자 본인은 모르던 거라도, 여러분은 잘만
물어보면 알 수 있는 증상들이죠."
그래서 쉽게 풀었다.
수준을 맞춰 주었다는 얘기였다.
애초에 강의 주제도 그러했으니, 이현종으로서는 딱히 아쉬울 만한 것도 아니었다.
"와…… 미쳤다.”
“너무 좋다……”
"흐아아..……”
이걸 대가가 해 주니 얼마나 좋은가.
강의가 끝나고 잠시 텀이 떴을 때 반응이 이랬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학회 관계자들 또한 역시나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확실히 이현종은 이현종이네."
"포스가 있죠?”
“사실…… 내용만 보면 아주 특별한 건 아닌데…… 전달이 좋아, 역시."
“네. 이현종 교수님이라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있죠. 같은 말도 원래 대가가 하면……”
그렇게 발표가 끝나고, 다음은 이름 모를 외국인이었다.
약간 고래 싸움에 끼인 새우 느낌으로 후루룩 지나 버렸다.
애초에 레지던트다 보니 내용은 물론, 전달력도 별로긴 했다.
경험 삼아 나온 입장에서는 다행인 셈이었다.
괜히 주목받으면 할 수 있는 말도 절어서 조졌을 테니까.
“다음은…… 아. 태화 의료원 통합진료센터 이수혁 교수가 맡아 주시겠습니다. 주제는 당신이 충분히 알지 못하는 과민성 대장 증후군입니다.”
그 상황에서 튀어나온 이수혁은 솔직히 외모로만 보면 지금까지 나온 사람 중 제일 어려 보였다.
실제로 군 면제에 대한민국 내과는 3년제가 되어서 안대훈 말고는 제일 어리기도 했다.
그런데 교수라니.
거기에 더해 주제도 보라.
당신이 충분히 알지 못하는 과민성 대장 증후군.
이 얼마나 광오한 이름인가.
이현종이 당신이 충분히 알지 못하는 관상동맥 질환이라고 했으면 다들 납득했을 텐데, 수혁은 아직 듣보잡이나 다름없었다.
'뭐 어떤 강의를 하려고 저러나……'
‘이 자리에 소화기 내과 전문의들도 많은데…… 보니까 분과 전문의도 아니잖아?'
'네. 뭔 이상한 학회를 신설했던데요? 아직 분과로 인정받지도 못했어요.'
'거참.'
학회 관련자들도 설왕설래하는 기분으로 잠시 기다렸다.
또각.
그때, 수혁이 위로 올라갔다.
지팡이를 짚은 채.
'이 조용해지는 느낌이 좋더라, 나는,'
[보통은 싫어할 텐데…… 확실히 수혁은 지나칠 정도로 긍정적인 인간입니다.]
'그래서 다행인 거 아니냐?'
[그렇죠. 관련된 호르몬이나 신경전달물질 모두 머리를 굴리는 데 도움이 되니까요.]
'그런 말을 들으니…… 좀 우울해지는군.'
수혁은 이유 없이 숙연해진 강의실 단상 위에 오른 채 사방을 둘러 보았다.
그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다루는 의학은 단순히 생과 사에만 연관된 것은 아니죠,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의료진에게도 있고, 일반인들에게도 있지만 지나치게 좁은 시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의학은 결국, 우리의 인생 전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가장 우리와 가까운 학문이죠.”
화면을 넘기지도 않고서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답답해하거나 지루해하지 못했다.
화두가 최근 의학이 지향하고 있는 지점과 맞닿아 있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수학의 목소리와 톤, 그리고 완벽하다고 해도 모자랄 만한 영어 때문이었다.
'뭐지? 여기서 살았나?'
'교포라고 해도...... 그냥 여기서 지금 살고 있는 교수 수준인데요?'
태반은 바루다 덕이고, 원래는 영어라고는 알파벳만 아는 수준이었으나 알 게 뭔가.
사기 치는 건 원래도 자신 있는 일이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미뤄 보면…… 과민성 대장 증후군은 굉장히 중요한 질환입니다. 의료진과 보건당국에서 간과하고 있는 사이 유병률은 점점 더 올라가고만 있고, 딱히 치료법이라고 나오고 있는 것도 없죠. 허나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은 분명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요."
게다가 주제 또한 중요한 주제였다.
1차 진료에 치중해야만 하는 내과 학회에서 환영할 만한 주제임과 동시에 소화기 내과 학회의 최신 지견과 닿을 수 있는 주제.
생과 사에 관계 있는 질환은 아니었지만, 방금 수혁이 말한 것처럼 계속 늘어만 가고 있어서 그랬다.
"유병률을 보다 정확히 보자면, 전체 인구의 7%에서 20%까지 보고됩니다. 적게 잡아도 14명 중 하나고, 많게 잡으면 5명 중 하나이니 엄청나게 많은 숫자죠?”
딱히 관심이 없던 이들도 이제 눈을 치켜떴다.
유병률이 20%라면, 그건 이미 병이 아니라 정상의 다른 변형이라고 봐도 되는 범주라서 그랬다.
물론 이 자리에서 그거 원래 그런 거라고 말할 만큼 지각없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자연스러운 현상에서 질환으로 인식하게 된, 그리고 이제는 치료가 되기 시작한 수많은 현대 의학의 성과조차 죄다 부정해야 할 테니까.
무엇보다 비만율만 해도 20%는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진단 기준은 이 질환이 정의된 이후로 계속 변화되고 있습니다. 모호한 기준에서 확실해져 가고 있다고 보면 되겠죠. 다만 문제가 있다면 너무 잦은 변경으로 인해 우리 내과 의사들조차 정확한
진단 기준을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강의는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청중의 약점을 파고들고 있었다.
확실히 소화기 내과 의사가 아닌 사람들은 처음 듣는 얘기가 많았다.
아니, 소화기 내과 의사 중에서도 딱히 관심이 없던 이들은 잘 몰랐다.
"우선 가장 저명한 진단 기준은 로마 기준입니다. 많은 분들이 2006년에 변경된 3번째 버전을 기억하실 텐데…… 2016년 4번째 기준이 수립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알아 두시면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