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0화 미국 데뷔 (3)
과민성 대장 증후군에 진단 기준이 있다는 걸 몰랐던 이들도 있었다.
사실 없을 리는 없는 일이었다.
의사들이란 진단에 목숨을 거는 존재들이지 않나.
정말 사소한 질환에도 기준이 다 있는 법이었다.
특히 뭔 증후군이란 이름이 붙은 경우엔 더더욱 그랬다.
'로마 IV…… 이게 벌써 네 번이나 바뀌었구나.'
'그러니까...... 나야 뭐 별 상관없는 질환이긴 한데......'
'네가 무슨 관계가 없어. 똥쟁이 새끼가.'
'환자한테 똥쟁이라고 하는 말버릇은 텍사스 출신이라 못 배운 결과인가?'
'지역감정 은근히 드러내는 거 봐라, 이 새끼.'
그렇다 보니, 과민성 대장 증후군에 대한 진단 기준도 벌써 4번이나 바뀌었다.
심지어 지금도 뭔가 더 추가하거나 제외해야 하지 않냐는 논의가 있었다.
당연했다.
애매했기에 그랬다.
"하지만 이러한 질환에서 중요한 건 역시 치료입니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의 진단은...... 사실 진단을 배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다른 질환, 그러니까 진행할 경우 매우 심각해질 수 있는
질환인데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라고 오진하는 경우가 훨씬 위험하겠죠. 그거야...... 내과 의사라면 어느 정도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어려우신 경우라면 케이스를 봐야 하는데, 저희 학회 사이트에
오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수군대는 동안 수혁은 발표를 이어 나갔다.
[또 어필하네.]
'이런 학회에서는…… 그래야지.'
[그건 그렇긴 합니다.]
소소한 학회이지 않나?
미국 학회라 봐야 전체 내과가 오는 학회다 보니, 이곳에서는 아무리 발표를 잘해 봐야 한계가 있었다.
애초에 주제 선정 자체도 그랬다.
때문에 수혁은 처음부터 목표를 아주 높은 곳에 두고 있지 않았다.
‘아쉬울 것도 없어. 올해야 나랑 아빠밖에 센터에 없고…… 센터 자리 잡게 하느라 정신없어서 이제야 학회를 왔지만, 앞으로는 매년 적어도 한 번씩은 나올 수 있을 테니까.’
[제가 돕는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죠.]
'그러니까 말이야.'
[돕는 걸 당연시하는 게 살짝 열 받긴 하는데......]
'그래서 안 도울 거야?'
[아뇨. 도와야죠. 제 목표는 어디까지나 수혁을 세계 최고의 내과 의사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차근차근 밟아 나가면 되지 않겠나.
열심히 밟았는데 평지거나 내리막길이라면 참 화가 나거나 허탈할 수도 있겠지만.
수혁과 바루다는 자신이 있었다.
무조건 다음에는 더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원인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가설들이 정립되어 있습니다. 최근에는 감염도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하죠.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감염이 진행 중이라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인체의 항상성을 감염이 해칠 수 있다는 건 이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장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보면 될 겁니다."
하여간 수혁은 무아지경 속에 발표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내용만 보면 딱히 어려울 만한 것이 없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이 어렵지 않은 내용을 당연하다는 듯 내뱉기 위해서는 무던한 노력이 필요했더랬다.
수혁은 천재지만 소화기 내과 전문의가 아니고, 따라서 그가 과민성 대장 증후군에 쏟았던 시간이나 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그랬다.
'내가 논문을 관련된 것만 100편도 넘게 봤지.'
[저도 억울할 지경이니 수혁이 어떤 심정일지도 예상이 가는군요.]
'그러니까.'
[하지만 보람은 있지 않습니까?]
그 결과, 방 안에 있는 대부분의 인원은 수혁을 보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뒤늦게 필기구를 꺼내 끄적이는 이도 있었다.
그만큼 수혁의 발표는 정제되어 있었고, 유려했다.
“그 외에 대장 내에 유산균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허나 모두 추정일 뿐이죠.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 모두 지속적인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 연구에 의하면 제왕절개로 태어난 사람에게서 자연분만으로 태어난 사람보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더 흔하다는 보고도 있긴
하지만…… 별 상관없다는 보고도 많죠. 심지어 유산균을 복용하여 호전되었다는 보고도 있으나, 마찬가지로 별 상관없다는 보고도 많습니다. 다만 의사로서 유산균은…… 환자가 기저 질환이
없다면 복용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군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가격적인 부담이 큰 것도 아니니까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간략히 그간 있었던 논문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의견을 제시하는 부분이 그랬다.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사람들이 듣기에도 이만하면 그럭저럭 넘어갈 만했다.
"허나 과민성 대장 증후군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에게 단지 유산균만 처방하는 건, 이제는 조금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중간중간 이런 식으로 푹 찌르는 지점이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내과 의사들 중 일부의 눈이 동그래졌다.
실제로 그런 처방만 하고 있던 이들이 있어서 그랬다.
‘뭐…… 효과가 없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뾰족한 수가 있나?'
그들이 그렇게 놀란 건 단순히 다른 의사가 자신의 처방 행위를 지적해서만은 아니었다.
환자에게도 비슷한 말을 계속 들어서 그랬다.
열심히 먹어도 똑같다는 말을 하는 환자들이 적지 않았다.
“우선은…… 이 환자가 정말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례를 검토해 보면, 놀랍게도 꽤 많은 케이스에서 기저에 있는 전혀 다른 질환을 무시했던 경우가 있더군요. 가령 갑상선 기능 항진증에서도 비슷한 증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걸 늘 유념하셔야 합니다."
해서, 집중도가 올라간 상황에서 수혁은 말을 이었다.
아까와는 살짝 톤을 다르게 한 상태였다.
일부러 '우선은......' 을 말하고 잠시 쉬기도 했다.
때론 잠시 이어지는 침묵이야말로 주의를 환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걸 알아서 그랬다.
아니, 배웠다.
어느 저명한 아나운서에게.
"그 외에도, 부신 질환과 같은 호르몬 계통 질환들이 당연히 이러한 증상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자율신경계통의 질환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죠. 실제로 이쪽으로 연구가 진행 중이긴 하지만, 진단에서도 치료에서도 적응 가능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지는 못합니다. 때문에
이쪽으로 고민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혈액 검사를 통해 증명할 수 있는 다른 질환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하여간 수혁은 이러한 류의 질환 진단에 있어, 역시나 기본이 되는 '배제 과정'에 대해 얼마간 더 설명을 이어 나갔다.
간혹 있을 수 있는 감염성 질환이나 염증성 장 질환의 초기 단계, 또는 국외에선 드물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결핵도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설명했다.
'결핵......'
'그건 어떻게 진단하는 거지?'
'하아...… 결핵 어렵지.'
듣던 대로 결핵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아빠 말대로네. 결핵 진단하라고 하면 대체 어떻게 하는 거냐고 한다더니만.'
[개발도상국의 그늘이 남아 있는 결과인데…… 하여간 미국에서는 이제 정말 보기 드문 질환이 된 것도 사실이죠.]
국가별로 호발하는 질환의 차이가 만든 광경이었는데, 수혁은 뼛속까지 의사인 데다가 유머 감각도 어딘가 모르게 비틀려 버린 지 오래다 보니 살짝 웃음이 흘러나왔다.
발표 자리에 선 채 웃었기에, 일견 여유 있는 모습으로 비쳤다.
실제로 여유가 있기도 했기에 오해는 아니었다.
“이러한 것을 배제하고 나면...... 이제부터는 치료에 전념할 때죠. 우선 유산균은 기본으로 깔고 나가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식이입니다. 때문에, 저는 치료란 단어보다는 관리라는
말을 쓰고 싶군요."
치료가 아닌 관리.
이 개념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현대 의학이 폭발적인 발전을 이루어 내면서 수명이 크게 늘어난 탓에, 오히려 난치성 질환도 늘고 있어서 그랬다.
개중에는 치료가 되지는 않아도 관리는 충분히 가능한 질환도 있었다.
당뇨나 고혈압을 포함한 수많은 질환들이 그랬다.
해서 수혁의 말이 어색하게 들리거나 하진 않았다.
“저포드맵(FODMAP, 과민성 대장 증후군을 악화시키는 탄수화물) 식이 요법이 효과적일 겁니다.
말이 조금 애매하긴 한데…… 포드맵 식이에 해당하는 것을 피하는 거라 보시면 됩니다. 생각보다 꽤 많은 식품군이 들어가 있고, 그중에는 우리가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식품들 역시 많이 들어가 있어서 헷갈릴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얘기는 아닙니다. 환자가 그런 것이죠. 우리 내과 의사가 그러면 안 됩니다."
수혁은 화면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내과 의사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다 알지는 못할 거라 여겼기에 진짜 의외라 생각할 만한 식품들은 일일이 언급까지 했다.
"호밀, 양파, 비트, 대파, 콩, 우유, 치즈, 사과, 배, 망고 등은...... 좀 의외죠? 이 대신 당근, 토마토, 감자, 쌀, 바나나, 딸기 등을 추천하시면 됩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좀 부족합니다. 리팍시민과 같은 항생제를 병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장내 세균총을 조절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통증이 지속되는 경우, 스트레스 등의 유발 요인이 되기도 하기에 저용량의 항우울제도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모두가 관리를 잘할 수 있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다는 나을 겁니다.
제가 보증하죠. 그럼 이만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반응이 한국에서처럼 뜨겁진 않았다.
주제 자체가 그랬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허나 분명 의사들 중 눈빛이 변한 이들이 있었다.
당장의 발표만 본 게 아니라 이 팀의 발표를 본 이들이었다.
특히 눈썰미가 좋은 사람 중에는 이 발표들이 일정한 톤을 유지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현종의 발표가 살짝 엇나가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설마......'
'저거 다 이수혁 교수, 저 사람 작품인가?'
이현종은 워낙 대가다 보니 튀어도 별 상관은 없었다.
다들 그러려니 하는 데다가, 아마 톤이 같았다 해도 반응이 달랐을 터였다.
‘분명…… 하루 전에 제출이 됐다고 했는데…… 전에 다 만들어 놓고 일부러 그때 낸 건가?'
'아니야, 태화에서 부탁한다고 따로 연락이 왔어. 너무 급하게 드리는 부탁이라 죄송하다고도 했고…… 합리적인 이야기는 아니지.'
'아니, 이게…… 그럼 저만한 퀄리티의 발표를 하루 만에 다 만들었다고?'
'허어......'
그중에서도 학회 관련자들의 관심은 비상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현종 교수가 왜 저기 들어갔겠어?'
'이수혁 교수라는 사람을 키우려고?'
‘들어 보니까 이미 나름 유명인이던데...… 연구보다는 임상 쪽으로 아주……’
'이따 밥이나 같이 먹으면서 얘기나 들어 볼까요?'
'밥은 안 돼, 매사추세츠 과장님 오셨어.'
‘그럼…... 그냥 둬요?'
'미쳤어? 커피라도 마셔야지. 요새 한국, 그중에서도 태화에서 나오는 연구들은 미쳤다고.
저쪽이랑 연구를 진행할 수 있으면 뭐든 하는 게 좋아.'
때문에 수혁과 티타임이라도 요청할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이런저런 기대를 하면서였다.
허나 그들의 기대는 여전히 사실에 비하면 미진했다.
수혁의 진가는 연구가 아니라 임상에 있었으니까.
심지어 미국 전역의 병원을 도울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