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881화 (881/1,303)

881화 미팅하다가? (1)

커피 타임을 잡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학회라는 게 배우기 위한 곳이기도 하지만, ‘회’라는 말이 가리키듯 친목 도모의 성격도 가지고 있기에 그랬다.

특히 국제 학회는 더더욱 그랬다.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얼굴 보고 얘기하겠나.

“자자, 이쪽으로.”

해서, 내과 학회 내에서 주요 이사직을 맡고 있는 리차드 매사추세츠 병원 내과 과장은 허허 웃으며 컨퍼런스 룸 안쪽으로 위치한 미팅룸으로 일행 중 둘을 안내했다.

“니들은 가서 공부해라.”

“아, 네.”

왜 둘이냐.

둘만 교수라서 라고 하면 너무 정 없어 보이겠지만, 실제로 그랬다.

“허투루 새지 말고 공부해, 진짜. 저녁에 맛있는 거 사 줄 테니까.”

이현종과 이수혁 모두 진심을 담아 나머지 일행을 내다 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들 펠로우니까.

김성진은 펠로우라고 하면 좀 억울해할 만한 취급이긴 했지만, 둘이 볼 때는 그랬다.

-너네 다 나가면 훌륭한 전문의지? 월급도 많이 받고…… 아마 2차 병원 가면 과장급은 꿰찰 수 있는 인재들일 거다.

아니, 이현종이 보기엔 그랬다.

그래서 이현종은 좀 미안해하는 편이었다.

다른 교수들은 펠로우라는 존재를 일종의 소모품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그만은 제자의 미래를 늘 염두에 두고 있어서 그랬다.

-그걸 희생하고 온 거야. 여기서 줄 수 있는 건 가르침밖에 없으니까 그런 거지. 교수 자리를 다 보장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솔직히 말해 보장된 놈은 안대훈뿐이야. 이놈은 이사회에서도 다 지켜보고 있거든.

빈말은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희망 고문 같은 건 이현종이 그 누구보다 싫어했으니까.

적어도 제자의 앞길에 대해 쓸데없는 희망을 흘리는 건, 이현종이 제일 지양하고픈 일이었다.

그럼에도 안대훈에 대해서는 큰소리를 쳤는데, 김다현과 얘기가 되어서 그랬다.

-그러니까 니들은 배워라. 배워서 우리 병원이 됐건…… 다른 병원이 됐건 니들을 놓치는 게 정말 멍청한 일이 되게끔 만들어. 논문에 대해서는 걱정 안 해도 좋아. 이번에 봐서 알겠지만 나나 수혁이나 논문 쓰는 기계니까. 임상적인 능력만 보장해 주면 가이드해 줄게.

나머지에게는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솔직히 밑에 사람들로서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일 수도 있었다.

‘나만 믿고 따라오면 교수 만들어 줄게!’ 같은 말이야말로 펠로우들이 제일 듣고 싶은 말 아니겠나.

“니들은 좋겠다.”

허나 그 말에 된통 당해 본 바 있는 김성진은 나머지가 부러웠다.

“뭐…… 그렇죠. 저런 교수님이 없죠.”

나머지도 그걸 모르진 않았다.

대학 병원에 벌써 몇 년을 있었는데 그런 거 하나 모르겠나.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지만, 대개의 대학 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그리고 펠로우는 그냥 노예 취급이었다.

아니, 그나마 인턴과 레지던트는 전공의라는 테두리 안에 들어가 법적인 보호라도 받지만, 펠로우는 펠노예라는 자조적인 단어가 말해 주듯 정말 노예 그 자체였다.

아무도 그걸 잘못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심지어 당사자인 펠로우조차도.

그 와중에 이현종이 저리 말을 해 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럼 흩어져서 듣다가 올까? 어차피 관심사들은 각자 다를 거 같은데.”

김성진은 나이도 경력도 긴 만큼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안대훈의 눈치를 살피긴 했지만, 다행히 안대훈은 수혁 외에 다른 이들에게는 모두 공평하게 대하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데면데면했다.

“네, 그러죠.”

“네, 저는 처음부터 듣고 싶었던 강의가 있습니다.”

“좋네. 그럼 이따가 보자.”

다들 통합진료센터에 들어온 몸이었지만, 각기 관심 있는 분야는 따로 있었다.

해서 우르르 흩어졌고, 그 사이에 이수혁과 이현종은 자리에 앉았다.

눈앞에 놓인 대충 내린 커피를 내려다보면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미국 놈들은 커피에 진심이 아니구나.’

[그러니까요. 이런 걸…… 떼잉.]

나름 기대를 했었는데 형편없는 수준이라, 수혁은 그냥 잠이나 깨자는 느낌으로 마셨다.

물론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기에 대화에 방해가 될 정도로 신경을 쓰진 않았다.

“영어를 다들 잘하시니까 통역은 대동 안 해도 되겠죠?”

“그렇지, 뭐. 단순히 친목 도모 아닌가. 아무튼, 오랜만이네. 리처드.”

이현종 또한 미식가답지 않게 밍숭맹숭한 커피를 들어 올리며 리처드를 돌아보았다.

“아, 네. 오랜만입니다. 교수님.”

“응, 그래. 잘 지내지? 과장 된 거 같은데?”

“아…… 네. 그건 어떻게…….”

생각 없이 앉아 있던 수혁과는 달리, 이현종은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혼자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 형! 그렇게 센터를 다 데리고 간다고?

-솔직해져라. 너 빼고 뉴욕 가서 화나는 거지?

-어. 아니, 아니! 아니이이이이!

갑자기 잡힌 학회에 신현태가 기함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대학 병원 교수라는 존재는 휴가조차 마음대로 내지 못하는 이들이지 않나.

그나마 내과 쪽이 외과 계열보다는 자유롭다고 해도, 센터 전체를 비우는 건 아예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게다가 정곡을 찔린 부분도 있었다.

어딜 자기만 빼고 뉴욕으로 간단 말인가.

해서 김다현에게 쪼르르 달려가 일렀는데, 신현태의 예상과는 반응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뉴욕이요? 잘됐네요.

-네?

태화의 목표가 무엇인가.

아니, 태화 바이오의 목적은 무엇인가.

세계 최고의 의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이런저런 일을 추진할 때 말빨이 서니까.

허나 아직은 공허한 말이었다.

미국 때문이었다.

아무리 대한민국 의료가 최고라 해도, 정말 최고 수준의 의료 서비스 제공은 미국만이 할 수 있는 일로 남아 있었다.

-저희 센터가 거기로도 진출합니다. 적자는 각오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수혁 교수나 이현종 교수님이 있으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죠.

-아…….

당분간 아니, 꽤 오랫동안 그저 상징적인 곳으로만 남게 될 센터일 터였다.

오히려 뉴욕에도 진출했다는 말로 국내에 어필이 될 거란 계산도 있었다.

또 미국 연수를 꿈꾸는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고.

허나 기업인의 특성상 아무리 예정된 손해라 해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어지는 법.

-도움을 좀 드려 봐야겠네요.

학회에 태화의 입김이 미치게 된 데는 다 그러한 연유가 있었다.

“그래도 한때 나랑 같이 일했던 친군데 알고 지내야지. 안 그런가? 자네도 내가 뭐하는지 다 알 거 아닌가?”

그렇게, 이현종은 김다현에게 주워들은 얘기를 당당히 꺼냈다.

실제론 리처드 이름도 다 까먹었던 주제에 그랬다.

“아…… 뭐. 하하.”

리처드도 마찬가지였다.

이현종의 이름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존재이니만큼 기억은 하고 있었지만, 뭘 하고 있는지 알 게 뭐란 말인가.

의사라는 존재는 세계 어디에 있다 해도 바쁜 법이었다.

게다가 리처드는 그중에서 능력도 있는 편이다 보니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모르는 거 같네.”

“아니…….”

“통합진료센터라고,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이름인데 말이야.”

“그…… 그건 압니다.”

“초록을 그 센터 이름으로 냈으니, 당연히 그렇겠지.”

“그렇죠. 하하.”

허나 눈앞에서 자기 일상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좀 부끄러워지기 마련이었다.

그게 윗사람이면 더더욱 그랬다.

해서 리처드는 일단 이현종이 하는 말을 들었다.

애초에 뭐 하는 곳인지 궁금해서 미팅을 잡은 것이었기에 잘됐다 싶었다.

“하여간 우리 센터는…… 현대 의학이 잊고 있는 걸 되찾는 데 그 의의를 두고 있지.”

“음…….”

“우리는 너무 세분화되고 있잖아. 그래서 각기 잘하는 분야는 잘하지만 결국, 우리가 보는 건 한 명의 사람이라고. 사람은 나누어져 있지 않지. 그래서 겹치는 분야가 나오고, 그만큼의 분과 학회가 또 생기긴 하지만…… 이런 낭비가 어딨나.”

“그건 그렇습니다.”

원래 뭘 모를 땐 용감한 법이었다.

19세기를 돌이켜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때는 학계 전체가 확신에 가득 차 있었고, 그만큼 온갖 개짓거리들을 해 댔다.

그럼 20세기라고 달랐나?

그때보다는 나았지만, 여전히 개짓거리들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과를 딱딱 나누어서 보려는 노력을 했더랬다.

사회 흐름 자체가 분업을 지향하고 있어서 그랬다.

지금?

지금은 또 융합형 인재 타령을 하고 있지 않나.

“그래서 우리는 인간을 통합적으로 보려고 하네.”

“쉽지 않겠는데요…….”

“그렇지. 그래서 역량이 되는 친구들만 따로 모집해서 키우고 있어.”

“흐음…….”

리처드는 그 친구가 이현종 옆에 있는 이수혁이라고 생각했다.

이현종도 물론 천재긴 했지만, 나이가 있지 않나.

이제 와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고 완성해 나가기엔 좀 늦었다.

‘그 정도 천재로는 안 보이는데…….’

해서 이수혁을 눈여겨보았는데, 이런 말을 해도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막 뭐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아니, 애초에 너무 어렸다.

아까 발표를 잘하긴 했지만…….

그리고 모든 발표를 설계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머리도 좋을 것 같긴 했지만…….

그 정도 천재?

미국에는 널렸다.

리처드 본인도 그 정도는 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김다현 사장이…… 이 미팅 자리에 뭔가 있을 거라고 했는데.’

그런 리처드를 이현종은 여유로운 얼굴로, 그러나 초조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수혁에게는 일부러 이러한 내막을 말하지 않았다.

아직 수혁이 타고난 사기꾼이라는 걸 몰라서 그랬다.

아마 알아도 무시하게 될 터였다.

이현종은 아버지니까.

부우웅.

그때, 리처드의 휴대폰이 울렸다.

리처드도 이수혁도 몰랐지만, 이현종은 느낌이 왔다.

‘이건가?’

매사추세츠 종합 병원.

미국 보스턴에 위치한 병원으로, 예로부터 미국 최고 병원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당연히 태화 바이오에서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실제로, 바이오에서 위탁 생산하고 있는 약들이 들어가고 있기도 했고.

“어…… 잠시만요. 병원이라.”

“괜찮네. 받아야지. 학회 중인데 온 거면 중요한 얘기인가 본데.”

“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여간 리처드는 그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응, 무슨 일이지?”

침착하게 말했지만, 그 안에 깃든 긴장감까지 죄다 숨기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학회 중인 걸 뻔히 알면서도 전화를 했다는 건,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니까.

동시에 싹 정리를 하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문제가 생겼다는 건, 리처드의 판단력에 대한 문제이기도 했다.

“아, 네. 교수님. 교수님 외래 팔로우업 중인 윌리엄…… 일로 전화 드렸습니다.”

윌리엄.

윌리엄…….

어떤 환자더라.

“아, 부정맥 환자 말이지. 그래, 말해 봐. 뭐…… 이벤트라도 있었나?”

“아, 네. 지금 빈맥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빈맥이라, 얼마?”

“120회입니다.”

“으음.”

분당 120회라.

젊은 환자에서는 별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다.

허나 윌리엄은 41세였고.

심지어 VIP였다.

재단에 기부한 금액만 해도, 한국 돈으로 따지면 한 3억쯤 되려나?

“자세히 말해 봐.”

해서 리처드는 다시금 양해를 구하곤 통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