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882화 (882/1,303)

882화 미팅하다가? (2)

‘뭐지?’

[조용히 하세요. 잘 안 들리니까.]

‘엄밀히 말하면 내 귀로 듣는 거거든?’

[하여간 조용히 하라고요. 안 들을 거야?]

‘닥칠게.’

물론 환자를 보는 데 수혁과 이현종에게 양해를 구하는 건 무용한 일이었다.

둘 다 딱히 꿍꿍이가 없다 해도 환자 보는 것에 있어서는 망설임이 없기 때문이었다.

“저기. 너무 가까운데요?”

아니, 망설임 정도가 아니라 적당한 무례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서슴지 않고 저지를 수 있는 위인들이었다.

“환자 얘기 아닌가. 의사 둘을 기다리게 해 놨으면, 적어도 환자 얘기 정도는 듣게 해 줘야지.”

“네? 아니, 이건 개인 정보인데…….”

“뭐 우리가 아는 사람이라도 되나? 전혀 몰라. 그리고 의사 무시하나? 나 무시해? 어디 가서 환자 얘기 떠들 것 같고 막 그런가?”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그. 얘기가 왜.”

거기에 더해, 이현종은 정작 무례는 지가 범해 놓고 상대에게 사과를 종용할 수 있는 뻔뻔한 인간이었다.

리처드로서는 상대할 일 자체가 드문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라고 하면 되게 자유분방할 것 같지만, 대학 병원 과장쯤 되면 오히려 더 빡빡할 수도 있지 않겠나.

한국처럼 불필요하게 쫄지는 않겠지만, 매너는 더 철저할 수 있었다.

“그 얘기가 뭐. 자네 얘기가 그런 것 같은데. 일단 스피커 폰으로 돌려봐. 혹시 알아? 우리가 도움이 될지.”

“그……”

“빈맥이라며. 자네도 알잖아? 나 천재야.”

“아.”

“여기 이 친구는 나보다 더 천재고.”

“아…….”

하여간 정신을 차려 보니 제 휴대폰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있었다.

모드는 당연하게도 스피커 폰이었다.

상대가 그걸 알 리는 없었다.

“교수님?”

“어어. 어…… 말해 봐.”

리처드도 그걸 원했다.

천하의 내과 과장이 이런 식으로 협박당했다는 걸 밑에 있는 사람이 알아서 좋을 게 뭐 있겠나.

“네. 빈맥으로 와서…… 검사를 해 보니까 혈압도 낮습니다.”

“혈압이 낮아? 단순 빈맥인데?”

“네.”

“그럼 출혈 아니겠나?”

“네, 그래서 여쭤보니 최근 며칠간 기운도 없었다고 하고 변에 피가 섞여 나온다는 진술이 있었습니다.”

“이런 미친.”

리처드는 저도 모르게 욕을 했다.

이걸 왜 자기한테 노티했나 싶어서였다.

‘아니, 아니지. VIP니까 나한테 노티할 수도 있긴 한데…… 그래도 이게.’

심장 내과 의사한테 변에 피가 섞여 나온다는 노티를 하는 게 말인가 방구인가.

그 뒤에 태화의 작당이 있었다는 걸 모르는, 그러니까 어지간한 질환이면 다 어떻게든 리처드에게 노티해 달라는 말이 있었다는 걸 모르는 리처드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미친’이라는 말을 끝으로 더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옆에 다른 의사들이 있으니.

“어…… 아무튼, 그럼 렉탈 이그잼(Rectal Examination, 직장 검사)은 해 봤나?”

“아, 네. 혈변입니다.”

“치질인가?”

하여간 환자 자체에 대해서도 고민을 이어 나가야 했다.

나이가 젊긴 하다.

하지만 젊으면 뭐 어떻단 말인가.

혈압이 뚝 떨어질 정도로 피가 났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었다면…… 이건 이상한 일이었다.

해서 바람을 담아 물었다.

치질이냐고.

치질이면 사실 가능하거든.

“아니…… 제가 봐선 그런 것 같진 않았습니다.”

“네가 치질 전문은 아니지 않나.”

“응급의학과 선생님도 봤습니다. 윌리엄 씨가 VIP라서요.”

“음.”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다.

응급의학과 선생님도 봤으니 이제 그럴 가능성은 사라진 셈이었다.

“어, 어!”

해서 이제 뭘 의심해야 하나 하고 있으려니 비명이 들려왔다.

시발놈이.

“왜, 뭐!”

이럴 거면 영통을 하지.

소리까지 질러 가면서 앞은 안 보여 주고.

“피가, 피가 나와서요.”

“어디서!”

“항문에서…….”

“피똥이야?”

피똥을 싼다?

지금 전화를 하고 있는 걸 보면 의료진 앞인데…….

거기서 피똥을 싸?

이게 똥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윌리엄이…… 그럴 만한 사람은 아니야.’

보통 젊은 VIP라고 하면 상속받은 게 많거나 많을 부자를 뜻하겠지만.

이 인간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냥 자체 능력이 좋았다.

그만큼 체면도 있을 텐데, 의료진 앞에서 막 지린다고?

이건 인력을 넘어선 일이라고 봐야 했다.

그 말은 곧, 상당 부분 변보다는 피라고 봐야 했다.

“일단 CBC(혈액 검사)부터 나가고! 소화기 내과는 컨택했어?”

“했습니다. 같이 보고 있습니다!”

“그럼 인마, 빨리 뭐라도 해! 전화는 그냥 두고! 상황 봐야지!”

그 생각이 딱 들자마자 옆에 누가 있는지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환자 생각만 들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도.

‘내과 과장……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미끄러질 수는 없었다.

학회 내에서 위치도, 병원 내에서의 위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네, 네!”

해서 소리까지 막 질렀다.

괜찮았다.

이수혁도 이현종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으니.

“빈맥은 아무것도 아니었구만? 사실 그럴 거야. 젊은 환자에서 부정맥인데…… 그냥 지켜보고 있었으면 양성이겠지. 뭐, 별거 아닌 거지.”

“그러니까요. 소화 기관 출혈일 텐데…… 흠. 갑자기 저렇게 터져 나오는 경우라면…….”

“당장 생각나는 건 너무 많네.”

“흐음.”

둘은 이미 환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있었다.

당장 들리는 말만 따지면 별것도 아니었지만, 속으로 오가는 생각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일단은 출혈 컨트롤을 위해서 내시경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네. 그렇죠.”

일단 지침이 나왔다.

당연하게도 현장에서도 다른 지침이 나오진 않았다.

“빨리!”

그냥 전화상으로 대화를 듣고 있는 거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상식선에서 그랬다.

“달려!”

곧 수화기 너머가 더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두두두 달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러곤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석션.”

너무 급하다 보니 대화 태반은 뭉개져서 들렸지만 대강 파악하기로는 중심정맥관을 잡아서 피를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은 아마 직장 내시경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정황상 그래야만 했고, 매사추세츠 종합 병원이라는 곳은 다른 경우의 수를 여러 개 만들 만큼 녹록진 않은 곳이었다.

치이익.

소음이 들려왔다.

“으음…….”

이따금 한숨 비슷한 소리도 들려왔다.

피가 많이 나는 모양이었다.

“이거 CBC 한 번 더 나가죠.”

안 그러면 내시경 하는 사람이 이런 걸 요청할 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겠나?

“출혈의 양이 많다라…….”

“그러면서 매스(Mass, 미확인 덩어리)에 대한 이야기는 없어.”

“석션이 계속되는 걸로 봐서는 현재 진행이에요.”

“그래, 그렇지. 염증성 장 질환일까?”

“염증성 장 질환도 물론 장 출혈의 원인이 되긴 하지만, 저런 식의 매시브(심각한) 출혈은 드물죠.”

“그래. 의심할 수는 있지만…… 흠. 그래, 그렇지.”

하여간 둘은 그러한 정황을 종합해 대화를 나누었다.

매스 얘기는 없다.

물론 시야가 출혈 때문에 후질 테니, 암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당연히 염증성 장 질환 또한 가능성은 있겠지만 그 가능성도 좀 떨어졌다.

“다른 랩을 좀 봐야 할 것 같은데. 아직 안 나왔나?”

허나 여기서 얘기하는 건 아무래도 제한적이었다.

원래도 답답한 걸 너무 싫어하는 사람이 이현종 아니던가.

그리고 또 무례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 교수님이에요?”

해서 이현종은 전화기에 대고 물었다.

레지던트는 혼란스러웠다.

안 그래도 케이스가 확 급한 느낌인데 전화하던 상대방도 바뀌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 나도 교수지.”

“아…….”

거기에 대고 이런 답이 날아가니, 레지던트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일단 랩을 찾았다.

“Hb 7.1g/dL(헤모글로빈, 정상 수치 13~17), 헤마토크릿 22.9%(혈액 내 적혈구 비율, 정상 수치 45% 내외), MCV 80.6fl(적혈구 크기, 정상 수치 80~96), MCH 24.9pg(적혈구 내 헤모글로빈 농도, 정상 수치 27~33)입니다. 혈소판도 정상보다 좀 떨어져 있고…… INR(혈액 응고 시간)도 연장되어 있습니다.”

“랩은 그냥 급성 출혈에 의한 변화로 보이는데. 대장 소견은 어떻지? 이쯤 됐으면 뭐라도 보일 텐데. 에이, 답답해. 다시 걸 테니까 받아 봐.”

이현종은 뻔뻔스레 전화를 끊고는 영상 통화를 걸었다.

리처드 옆에 딱 붙어야 할 것 같아서 그를 가운데에 끼우고 수혁까지 셋이서 선 상태였다.

“아니, 이거 너무 가까운…….”

“환자 살려야 할 거 아냐?”

“지금 진료 중인데…….”

“진단 내렸어? 치료 들어가?”

“아니, 그런 건 아닌…….”

리처드는 좀 부담스러워서 뭐라 말을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막무가내인 데다가, 일리도 있어서 그랬다.

아니, 일리가 있나?

아무튼, 리처드는 닥치고 있었다.

그 사이 레지던트는 전화를 받았고 움찔했다.

‘뭐지?’

허나 리처드가 있으니 일단 내시경 화면을 보여 주었다.

나름의 센스였다.

영상 통화를 걸었다는 건, 이걸 보여 달라고 한 것 아니겠나.

“으음…….”

“뭐가 저래?”

“아니, 이게 뭐야.”

마침 내시경은 직장 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피가 흘러내려 오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보였다.

“조약돌…….”

“크론인가?”

이현종과 리처드도 역시 훌륭한 의사다 보니 딱 보자마자 어떤 소견인지 알아보았다.

허나 크론이라기엔 좀 성급했다.

적어도 수혁의 생각은 그랬다.

바루다 덕이었다.

그의 분석은 언제나 그러하듯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면이 있었다.

“결절성 변화를 동반한 광범위한 점막 정맥류로 보이는데요.”

해서 지금 상황에서는 지나치게 구체적인 얘기를 꺼냈다.

“응?”

“으응?”

정맥류?

그렇게 보이나?

이것만 보고 그렇게 얘기할 수 있나?

리처드는 그런 얼굴이었다.

이현종은…….

‘역시.’

아직 뭔지 모르겠지만.

이수혁이 그렇다면 그런 것일 터였다.

단지 능력의 뛰어남만을 떠올려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이놈은 그 와중에 신중하기까지 했다.

‘허튼 소리할 사람이 아니지.’

이현종의 신뢰감 가득한 눈빛과 함께 수혁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이 정도 출혈이라면 내시경으로는 조절 못 합니다.”

레지던트가 아니라, 저 너머에 있는 이들 전부에게 하는 말이었다.

“혈관 조영술 하시죠. 출혈 범위가 아주 넓어요. 이대로면 환자 잃을 겁니다. 일단 색전술부터 해야 해요. 열 수 있다면 열고. 근데…… 하필 휴일이니 그건 안 되겠군요.”

지침.

아니, 지시라고 해야 할까?

하여간 이것 또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다만 정맥류 운운하던 것과의 차이가 있다면, 이건 너무 타당해서 저도 모르게 몸이 막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그래. 일단 조영술부터 해! 영상의학과 연락해!”

“그 사이에는…….”

“일단 피 부어! 살려야 될 거 아냐!”

내시경 하던 의사도 마구 외쳐 댔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피를 석션하고 그렇게 시야를 확보해서 위로 올라갈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색전술 얘기를 듣자마자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망할! 저 기세로 피가 계속 났다면…….”

물론 리처드는 초조해졌다.

VIP라서 그랬다.

그리고 생각하면 할수록 출혈량이 심상치가 않았다.

‘일단 좀 기다릴까.’

물론 수혁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혈압과 심박 수 그리고 나이를 고려하면…… 못 버틸 건 없어.’

[그보다는 이후가 문제가 되겠죠.]

‘응. 내시경 소견…… 저거 심상치가 않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