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3화 미팅하다가? (3)
과거 장 출혈은 굉장히 조절하기 어려운 종류의 질환이었다.
배를 열지 않고는 조절이 되지 않았다.
아니, 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장을 절제해야만 했다.
푹.
허나 기술의 발전은 눈부시게 빨랐다.
“잘하네.”
“아빠는 그게 보여요?”
“나도 기본적으로 혈관 중재 시술을 하는 사람이니까…… 부위가 다를 뿐이지.”
“아…….”
“하여간 저기 상부 장간막 동맥 근처로 피가 새는구만.”
매사추세츠 병원의 레지던트는 여전히 영상 통화를 걸어 둔 상황이었다.
덕분에 일행은 혈관 조영술 화면을 싹 볼 수 있었다.
이현종의 말대로, 혈관 근처에서 조영제가 새고 있었다.
“색전술은 저기로 해야 할 것 같은데…… 저런다고 피가 안 나려나……?”
그리고 영상의학과 인터벤션 교수는 그 부근에 색전술을 시도하고 있었다.
즉 혈관을 막아서 아예 피가 안 나게 만들고 있단 뜻이었다.
허나 이현종의 의견은 좀 달랐다.
“그러니까요. 아까 장 보면…… 흠. 그게 좀 그랬는데.”
수혁의 의견도 비슷했다.
피가 줄줄 새고 있지 않았나?
동맥 가지에서 새는 것만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았다.
하여간 VIP다 보니 다들 열심히 보고 있었다.
다시 말해, 아까 내시경을 했던 내과 교수도 이쪽 인터벤션실에 와 있었다.
“이제 멎었을까요?”
그는 걱정스럽단 얼굴로 물었다.
인터벤션을 시행하던 교수 또한 표정이 그리 다르진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면서 답했다.
“글쎄요. 우징(Oozing, 진물)까지 완전히 잡혔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메인 출혈은 어느 정도 조절이 될 것 같은데요.”
“흐음…… 우징이라.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일단 피 들어가고 하면서…… 바이털은 좋아졌습니다.”
“네. 안정적이네요.”
“우선은 좀 지켜볼까요?”
그러나 지금 당장 뭘 더 해야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진 않았다.
어찌 되었건 주말이지 않나.
모든 것이 갖추어지진 않았다는 얘기였다.
당장 내과 과장도 학회에 가 있는 상황에서, 응급도 아닌데 뭔가를 한다는 건 부담이었다.
“아니, 잠깐만.”
그때, 수혁이 입을 열었다.
영상 통화이기에 쌍방으로 통화가 되지 않겠나.
물론 상대 교수들은 리처드 교수와 통화 중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와서 당황스러웠다.
고개를 돌려 보니 거기에 뜬 얼굴도 이질적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 저 사람이 이수혁이군.’
딱 한 사람, 노티한 레지던트들만은 그를 알아보았다.
‘태화에서 부탁한 그 사람이…… 저 사람이군. 흠.’
천재라고 했더랬다.
분명 도움이 될 테니 노티를 리처드에게 하라고 했고.
그 대가로 라스베이거스 호텔 초청권을 받았다.
이거 리베이트 아니냐 했더니 우리가 약 홍보라도 했냐고 되물었다.
심지어 자기는 바이오 계열도 아니고 보험사 직원이라, 여기엔 그냥 놀러온 거라고 했다.
‘그래, 나는 잘못한 거 없어…… 없는데……. 댁이 지금 이렇게 얘기하면 어떡하냐.’
해서 찜찜함에도 불구하고 대강 뭉개고 있었는데 갑자기 수혁이 나서자 살짝 불안해졌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수혁이 갑자기 자신을 보며 전화하길 잘했네 어쩌네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수혁은 레지던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하고자 했던 말만 이어 나갔다.
마침 이목이 집중되어서 그랬다.
“지금 색전술은…… 임시방편일 뿐이에요. 아까 내시경 소견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맥류가 다수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게 단순히 색전술로 해결이 될까요? 아니, 애초에 그게 왜 생성이 되었겠습니까.”
“어…… 누구…….”
“제가 누구인 게 중요합니까. 아니면 이 질문이 중요합니까.”
“어…….”
그 말을 들은 내시경 맡았던 교수, 그러니까 소화기 내과 교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일단 이놈이 누군가 싶었다.
시답잖은 질문이면 그냥 무시하면 될 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
‘정맥류…… 그래, 확실히 그렇게 보였어. 크론은 가능성이 떨어지지.’
아까 수혁이 했던 말을 제대로 못 들어서 더 그랬다.
그냥 속으로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크론인가?
이상한데?
하여간 피가 많이 나니까 멈추긴 해야겠다.
뭐 이런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참이었는데, 조약돌 소견으로 보였던 것이 정맥류일 거란 말을 듣자 머릿속이 점차 하얘지기 시작했다.
“이걸론 안 되겠는데…….”
정맥류가 그런 식으로 조밀하게 형성되는 질환이 뭘까.
그건 알 수 없었다.
기전조차 추론하는 게 불가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안 될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탐색 복강경 검사(Exploratory Laparoscopy)라도 해 보는 게 좋겠어요. 필요하면 결장 절제술을…… 해야 될 수도…….”
“네? 방금 색전술을 했는데요? 일단 출혈 추이를 보죠.”
허나 인터벤션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 또한 수혁이 누가 됐건 간에 의견이 형편없다고 여기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환자를 수술장에 끌고 들어가는 건 좀 너무하다 싶었다.
보이는 소견에 대해 합당한 조치를 취했다고 생각했기에 그랬다.
“그럼 지금 바로 출혈 추이를 보시죠.”
수혁은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대화를 시도했다.
인터벤션 교수는 몰라도, 소화기 내과 교수는 감히 그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정맥류…… 정맥류라……. 그 와중에 그걸 그렇게 봤다 이 말이지.’
이 인간이 누군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허나 그렇게 피가 많이 나는 와중에 저만한 소견을 짚어냈다면, 그것도 심지어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영상 통화를 통해 짚어 냈다면 존중하는 게 옳았다.
“내시경 말씀이십니까?”
“네. 직장경이라도 보시죠. CBC만 따라가는 것으로는 좀 늦을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매시브 출혈이 있을 수 있어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뭘 그렇게 해요? 아니, 이 사람이 누군데?”
수화기 너머로 인터벤션 교수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무시되었다.
어차피 환자는 내과로 접수되어 있어서 그랬다.
만약 이 환자가 잘못될 경우 최대 책임은 내과에, 그중에서도 내시경을 시행한 소화기 내과 교수에게 있었다.
‘이런 제기랄…….’
물론, 책임은 리처드에게도 있었다.
좀 억울할 만한 순간인데, 하여간 전화가 온 순간 책임은 피할 수 없었다.
원래 의사란 게 그런 직업이었다.
해서 리처드는 이동하느라 사정없이 흔들리는 화면과 옆에 서 있는 이현종, 이수혁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된 이상 저 환자를 해결해야 할 텐데…….
‘나는 전혀 모르겠는데……? 애초에 나한테 왜 노티를 한 거야, 저 새끼?’
리처드 교수는 폰을 들고 있을 레지던트를 노려보려 애썼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다 보니 별 소용은 없었다.
‘빈맥은 진짜 그냥 출혈 때문이었잖아? 그걸 몰랐던 것도 아니고. 아…… 저 새끼…….’
리처드는 한숨을 푹 쉬었다.
두두두.
그 사이, 환자는 다시 내시경실에 도착했다.
이런저런 검사 때문에도 그렇고 들어간 약 때문에도 그렇고, 환자는 의식이 흐려져 있었다.
만약 바이털이 흔들리고 있었다면 당장 급하게 뭐라도 해야 할 정도로 흐렸다.
허나 들어간 약이 있기에 일행은 우선 검사부터 진행했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이미 한 번 했던 검사를 다시 한번 하는 것이다 보니 별도의 준비 과정, 즉 관장이 필요치 않아서 그랬다.
푹.
소화기 내과 교수는 직장 내시경을 시도했고, 진입하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피가 나고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이.
“우선 석션부터 하죠. 이미 나온 피가 고인 것일 가능성이…… 일부 있습니다.”
다만 수혁은 침착했다.
일단 처치를 본인이 하고 있는 게 아니라서 그랬다.
[예상했던 바이기도 하죠.]
‘그렇지. 아까 그걸로 될 게 아니었어. 물론 양은 줄었겠지만…… 한시름 돌린 것뿐이지. 이걸로 완전히 해결될 수는 없어.’
[그보다 이게 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알아야 할 텐데요.]
‘그러니까…… 우리 아직 환자 전신도 제대로 보지 못했잖아. 일단 이거 처치 끝나면 좀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해야지.’
또 이럴 줄 알았다.
말을 하면 좀 싸가지 없어 보일까 봐 가만히 있기는 했지만, 하여간 그랬다.
치이익.
그사이, 소화기 내과 교수는 석션을 통해 피를 제거하고 있었다.
허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한번 제거해서 깨끗한 시야가 생기는가 싶던 순간 또다시 위에서부터 피가 흘러내려 왔다.
처음 몇 번은 ‘그래, 쌓인 피겠지, 고인 피겠지’ 하고 희망을 품어 봤지만 반복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피가 나는 것이었다.
“망할.”
급기야 욕설이 흘러나왔다.
아니겠거니 하고 따라왔던 인터벤션 교수도 말이 없었다.
눈으로 피가 나는 걸 봤는데 그럼 뭐 어쩌겠나.
“그래도 색전술을 해서 이만한 거죠. 시간을 번 셈입니다. 외과 컨택해서 수술 잡으시죠. 제 생각에는 처음부터 결장 절제술을 염두에 둬야 할 거 같습니다. 적어도 직장과 좌측 결장은 살리기 어려울 거예요.”
제대로 된 의견을 제시하는 건 수혁뿐이었다.
듣기에 타당했다.
아니, 그것 말고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여전히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이 환자가 대체 왜 이렇게 되고 있는 건지 알지 못했다.
허나 알지 못한다 해서 해야 할 것을 모를 만큼 물렁한 인원은 아니었다.
“그래, 외과 컨택하고…….”
“나는…… 뭐 일단 다른 환자 보러 가지.”
해서 해야 할 일을 딱딱 해 나가기 시작했다.
레지던트는 사실 좀 방황했는데, 그것조차 수혁이 붙잡았다.
“지금 전화기 들고 있는 선생님?”
“아, 네.”
레지던트는 즉시 답했다.
이제 태화에서 뭔가 들었었단 사실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그냥 정신이 없었다.
“환자 전신을 좀 보여 주시겠어요? 아직 시진도 못 해서.”
“아…… 네.”
사실 말도 안 되는 요구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미 병원에 와서 레지던트를 포함해 여러 교수들이 본 상황이라 그랬다.
게다가 이런저런 검사를 시행한 마당이었다.
헌데 무슨 놈의 시진인가, 시진은.
허나 정신이 없다 보니 그냥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아주 잘한 일이었다.
‘창백해. 빈혈 소견이야.’
[그거야 뭐…… 헤모글로빈으로도 검증이 된 사안이죠.]
‘그렇지. 흠…… 그 외에는…… 음.’
수혁은 대번에 뭘 잡아 내지 못했다.
그의 평소 능력과 성과를 생각해 보면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스스로는 위기라 평할 만한 일이기도 했다.
‘진짜 뭐지?’
아직 이 환자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몰라서 그랬다.
여전히 시시각각 변화하는 변화에 대처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시 말하면 대처하는 게 고작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보통 이런 식으로 따라가는 데 급급한 진료는 환자를 잃기 마련이었다.
해서 초조한 얼굴이 되고야 말았는데, 옆을 보니 바루다는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넌…… 넌 뭐가 보이는구나.’
[비루한 수혁이 모르는 걸 저는 알죠.]
‘비루?’
[요새 잘난척할 기회가 없었죠. 이해하십시오. 오늘은 좀 까불어야겠으니.]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