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889화 (889/1,303)

889화 살아난 환자 (4)

뉴욕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길은 그리 멀고 험하진 않았다.

그냥 국내선 한번 탔더니 바로 도착했다.

물론 누군가 알아서 해야 했다면 좀 성가셨을 텐데, 이들에게는 태화가 있지 않나.

태화의 뉴욕 센터를 위한 일이라고 입을 털었더니 즉시 표가 나왔고, 심지어 공항에서는 이현종이 따로 찾은 에스코트도 이용할 수 있었다.

그 덕에 일행은 말끔한 얼굴로 보스턴 공항에 내려 매사추세츠 병원으로 향할 수 있었다.

“제가 에스코트라 이거죠?”

리처드 교수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따라붙은 빈대들을 돌아보았다.

“자네 VIP 환자 쪽 요청으로 온 거잖아. 우리 가? 가 버려?”

“아니, 그건 아니고요. 근데 너무 이게. 막말로 제가 교수님 빼곤 나이가 제일 많은데요.”

“아…… 자네 종교 유교야? 우리나라도 요새는 할 수 있는 사람이 하지, 해야 되는 사람이 하진 않는데?”

“그…… 정말요?”

“사실 거짓말인데, 하여간 자네는 어차피 해야 하는 걸 좀 더 하는 거잖아.”

“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새끼들.

표라도 구해 왔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더 고생할 뻔했다.

세상에 수속까지 다 시킬 줄이야.

더 열 받는 건, 이걸 좀 당연시하는 느낌이 든다는 점이었다.

“태화에서 챙겨 준대. 우리가 환자도 살렸는데 이것도 못 해 주나?”

“그…….”

“감사 인사는 했던가?”

“아…… 감사합니다…….”

“그래, 나도 고마워.”

심지어 감사 인사를 이쪽에서 먼저 해야만 했다.

부우웅.

그나마 다행인 건, 병원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점이었다.

그 말은 곧, 혼자 이 사람들을 대응해야만 하는 시간이 아주 많이 남진 않았다는 얘기였다.

덕분에 리처드는 정도 이상의 분노에 휩싸이지 않은 채 운전할 수 있었다.

“차가 좋네.”

“그러니까요.”

“미국 의사가 연봉이 높긴 높나 보다.”

“이 정도 실력으로도 많이 받을 수 있는 거 보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야.”

일부는 택시에 타고, 일부는 리처드 차에 타고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현종, 이수혁, 김성진, 김인수가 리처드 차에 탔다.

유교 사상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 이현종이지만, 뭐가 되었건 찬물도 위아래가 있어야 단체가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랬다.

아무리 안대훈이 똑똑하다고 해도 편애를 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수혁을 편애하는 걸 넘어 양아들로 삼은 주제에 이따위 말을 해 봐야 설득력은 없겠지만, 이현종은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는 설득이 필요치 않은 사람이었다.

“얼마 받는지 물어보면 실례인가?”

“네, 실례죠…… 그냥 한국말로 떠들면 안 됩니까?”

“에헤이. 못 알아듣는 말로 수군거리면 기분 나쁘지 않겠어?”

“지금 말은 차라리 못 알아듣는 게 나았을 것 같은데…….”

“연봉이 그 정도로 기분이 나빠?”

“아뇨, 그 전에…… 아닙니다.”

리처드는 ‘이 정도 실력’이라는 말이 떠올라 한숨을 쉬었다.

다시 언급하는 것조차 기분이 나빴다.

사실, 웃고 넘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랬다.

‘이 둘……에게 비하면 또 틀린 말은 아니란 말이지?’

그럴 수가 없는 건, 이수혁과 이현종 때문이었다.

이현종이야 뭐 워낙에 학계에서 유명한 사람 아닌가.

그냥 논문만 잘 쓰는 샌님도 아니고, 임상 쪽으로 오히려 더 강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뉴욕의 유대인계 병원에서는 벌써 여러 차례 백지 수표로 꼬시려고 든 적이 있었다.

‘대충 들어 보니까 연봉도 연봉이고…… 차에 기사까지 붙여 주고, 맨해튼 쪽 아파트도 숙소로 준다고 했지.’

그걸 거절한 건, 대한민국 의료를 위해서라고 들었다.

그건 뭐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상하게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있는데, 한국 사람들이 주로 그랬다.

‘이수혁 교수는…… 오늘 한번 보긴 했지만…….’

수혁은 어떤가?

아마 이걸 봤으면 헤드 헌터들이 군침을 흘렸을 터였다.

어쩌면 이현종보다 더한 조건을 불렀을 수도 있었다.

“조용해졌네? 우울한 일 있나.”

“저기, 저 운전하잖아요.”

“아, 그래, 그래. 자자, 여기 보스턴이다. 뉴욕이랑은 좀 다르지?”

그런 고민에 빠져 있으려니, 이현종이 한 방 더 때리고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빠는 여기도 와 봤어요?”

“당연하지. 나는 학회는 진짜 많이 다녔어. 초빙을 많이 받아서.”

“그렇구나.”

“너도 곧 그렇게 될 거야. 일단 이번 일이 계기가 될 것 같아.”

이현종은 부럽다는 눈길을 숨기지 않고 보내오는 수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이현종을 보면서, 리처드는 진짜로 놀랐다.

‘이 사람이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일전에 연수 왔을 때였나?

남들은 다 날씨 좋은 서부로 가서 쉬기도 좀 하고 하는데, 이현종은 동부로 왔다.

그중에서도 보스턴, 매사추세츠 병원.

물론 그때 리처드는 아직 학생이라, 원래 같으면 이현종과 별로 접점이 없어야만 했다.

실제로도 이현종은 당시 리처드가 어디 있었는지조차 몰랐다.

허나 리처드의 기억 속 이현종은 꽤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자신만만한…… 동양인 의사였지. 처음엔 꼴불견이었는데, 실력이 진짜…….’

과장이고 나발이고 다 발라 버렸던 이현종.

그러면서도 꼴통 짓을 해서 상대에게 더더욱 발렸다는 느낌을 주던 이현종.

그뿐만 아니라, 학회에서도 쌈닭처럼 굴던 이현종.

이게 다 언더독의 어려움에서 비롯된 일이었는데, 날 때부터 백인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지금껏 어려움 없이 살아온 리처드에게는 고려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에게 이현종은 그냥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배드에스 정도로 남아 있었다.

“이따가 맛있는 거 먹자. 여기 랍스터가 엄청 유명해.”

“오. 랍스터!”

그 배드에스가 지금은 수혁이 앞에서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리처드는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 생각하면서 로비 앞에 차를 세웠다.

“전 주차하고 갈 테니까, 로비에 있으세요.”

“아, 그래.”

“내리자.”

“차는 좋은데 역시 많이 타니까 좁긴 하네요.”

일행은 우르르 내려 로비에 들어섰다.

아니, 일단 내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진짜 크다…….”

“크네. 더 커졌어. 그새 건물 하나 더 올렸네.”

“어마어마하군요.”

뒤따라 온 택시에서 내린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눈앞에 자리한 병원 때문이었다.

존스홉킨스, 메이요 등과 더불어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병원 자리를 놓고 싸울 수 있는 병원인 매사추세츠 종합 병원은 그 위용부터가 장난이 아니었다.

[태화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여길 보니까, 아직 최고는 아니네.’

1811년에 지어졌다는 마일 스톤이 보였다.

1811년이라니.

새삼 이들이 쌓아온 역사가 느껴졌다.

200년이 훌쩍 넘은 병원이지 않나?

태화는 이제 기껏해야 20주년을 갓 넘긴 신생 병원이었다.

제아무리 기업에서 돈을 쏟아붓는다고 해도, 열 배 가까운 세월을 따라잡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와…… 로비 봐.”

“미쳤다.”

“와…….”

“얘들아, 로비는 태화도 좋아. 너무 두리번거리지 말자.”

안쪽 또한 대단했다.

화려한 것은 오히려 태화가 더 화려할 수 있었다.

층고도 더 높고 태화의 막대한 수집품 중 일부가 벽에 걸려 있다 보니 세계 유수의 갤러리를 방불케 하는 지경이었다.

허나 이곳은 태화가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단지 세월만을 논하는 건 아니었다.

그 세월 간 켜켜이 쌓아 올린 업적이 벽에 수놓아져 있었다.

“와…… 인공와우도 여기서 처음 한 거구나.”

“외과의 아버지도 이 병원 출신이네.”

“미쳤네.”

이에 비하면 태화고 어디고 간에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 역사적인 의사들이 쌓아 올린 업적은 그대로 압박이 되어, 지금 있는 이들에게도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매사추세츠 종합 병원이 여전히 세계 최고의 병원으로 군림하고 있는 게 우연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로구만.’

[그러니까요.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확실히 다릅니다. 이 벽은 의학의 역사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흐으음…….’

다들 충격을 받은 참이었다.

허나 그중에서도 수혁과 바루다가 받은 충격은 이질적이었다.

다른 이들은 태화가 하는 말을 그저 받아들였을 뿐이었으니까.

이현종조차도 진짜 자신들이 세계 최고를 노릴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현종이나 신현태처럼 경험이 많이 쌓인 이들은, 그만큼 본 것이 많은 이들은 함부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허나 수혁은 어떤가.

‘오히려 두근두근하네.’

[네, 벌써 세계 최고가 된다면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 고작 이 정도여서는 안 돼.’

[좋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공부하죠.]

‘학회에?’

[왜요? 지금 마음가짐은 거짓입니까?]

그는 바루다와 더불어 진심으로 최고를 꿈꾸고 있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최고를 논할 만한 실력도 되고.

아마 개인으로만 두고 따지자면 그렇지 않겠나.

각각의 분과를 놓고 본다면야 당연히 수혁보다 뛰어난 이들이 있겠지만, 종합적인 추론 능력은 이제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허나 팀 단위로 가면 얘기가 달랐다.

‘그래, 까짓거…… 다 같이 하지 뭐.’

[네. 그것이 최고를 노릴 수 있는 길입니다.]

의학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추론도 토론을 통해 더 날카로워지는 법이었고.

해서, 수혁은 짧은 시간 사이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것은 고스란히 안대훈에게 전달되었다.

‘공부하고 싶으신 얼굴인데…… 그전에…….’

안대훈은 수혁 말고 다른 쪽을 돌아보았다.

‘여기 있는 환자 중에 특이한 환자가 눈에 띄면…… 오후 일정은 캔슬이겠는데.’

다른 이들은 눈치 없이 하버드 대학이 어떻고, 보스턴 항구가 어떻고 등 잡담만 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갈 일이 있을 것 같으면 안대훈도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안대훈은 알고 있었다.

그가 섬기는 교주 아니, 이수혁 교수가 얼마나 미친 사람인지.

그리고 그의 아버지인 이현종도 만만치 않게 미쳐 버린 사람 아니던가?

아마 학회 마지막 일정은 여기서 마무리되고 말 터였다.

“아, 늦었습니다. 가시죠.”

그때, 리처드가 주차를 마치고 나타났다.

그러곤 일행을 끌고 병실로 향했다.

가는 길이 만만치만은 않았다.

아마 몇 년 전이었다면 태화에서 온 이라 해도 익숙지 못했을 터였다.

어디 하나 들어가려면 다 보안 통과를 해야 했기에 그랬다.

허나 이제 한국도 나름 환자 개인 정보에 대한 인식이 개선된 참이다 보니, 다들 그러려니 하고 뒤를 따랐다.

“여깁니다.”

하지만 병실을 눈앞에 뒀을 땐 더 이상 그러려니 할 수가 없었다.

“와…….”

“아, 한국은 시스템이 좀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1인실로 이루어진 중환자실이라니.

이런 게 가능한가 싶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중환자실이 적자라 어떻게든 줄여야 하는데, 여긴 반대인 모양이었다.

거의 센터라고 불러야 할 만한 사이즈의 중환자실이 눈앞에 있었다.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환자분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아, 네.”

허나 수혁만은 빠르게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만큼…… 어려운 환자가 있다는 뜻 아닐까?’

[최대한 둘러보시죠. 제가 분석해 보겠습니다.]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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