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0화 보스턴 (1)
보스턴.
미국 의학의 중심이자 곧 세계 의학의 중심지.
다른 모든 도시가 적어도 의학의 역사에 있어서만큼은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양보해도 좋을 만한 도시라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수혁은 역사적인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너무 두리번거리면 넘어진다, 수혁아…….”
물론, 그 모습이 품고 있는 생각만큼 멋지진 않았다.
가뜩이나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상황에서 주변을 살피고 있으니 멋지긴 어렵지 않겠나.
“아, 네.”
그나마 다행인 건, 예상과는 달리 딱딱 눈에 들어오는 환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당연했다.
환자란 환자는 전부 유리벽 안쪽 1인실에 들어가 있었다.
일반적인,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중환자실이라 일컫는 곳은 그냥 들어가면 적어도 열 명 넘는 환자가 한눈에 들어오는 데 반해 이곳은 그럴 수가 없었다.
‘시설이 너무 좋으니까 단점도 있구만그래.’
[그러니까 말입니다. 쓸데없이 좋네.]
‘이 정도 시야로는 이상 소견을 볼 수 없지?’
[볼 수 있으면 의사를 꿈꿨겠습니까? 세계 정복 나섰지.]
‘그건…… 그건 그렇지.’
그래, 이만한 시야로 환자를 파악해 낼 수 있다면 사실상 세상에서 못 할 일이 거의 없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해서, 수혁은 일단 나중에 보기로 결심하고 환자에게로 향했다.
그가 전화로 본 환자 역시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1인실에 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중환자실에서 특실이 있나 싶을 정도로 꽤 으리으리한 병실에 들어가 있었다.
‘보통…… 의식 없는 사람들이 들어갈 텐데…… 이렇게 클 필요가 있나……?’
[1인실화하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의미가 있어 보이지만…… 이건 좀 오버 같군요.]
‘그러니까 말이야.’
[뭐, 돈 많아서 쓰겠다는데 우리가 뭐라고 할 입장은 아니죠. 막상 들어가 보면 무언가 좋은 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긴.’
괜히 넓은 집이 어딨단 말인가.
간혹 인테리어 채널에 저택 영상이 올라오면 꼭 댓글에 ‘저런 집은 청소하다가 하루 다 가겠네’ 하는 말이 달리는데, 그럼 다시 대댓으로 ‘저런 집 주인이 직접 하겠냐’란 말도 달린다.
부자들의 사고 사이즈는 일반인들과 좀 달라도 다른 법이었다.
덜커덕.
하여간 안으로 들어서자, 다른 환자들과는 달리 의식이 또렷해 보이는 환자가 앉아 있었다.
방금 결장 전 절제술을 한 사람이라고 하기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확실히 수술이 잘되긴 했어.’
[아뇨. 미흡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통증 조절이 잘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겁니다.]
‘아, 그렇겠구나.’
[네, 여기 외과 교수는 장준혁에 비하면 실력이 좀…….]
환자는 불충한 생각을 이어 나가고 있는, 그러나 얼굴만 봐서는 속으로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수혁을 바라보았다.
‘젊은 동양인 교수라고 했지.’
사진을 본 적은 없었다.
허나 딱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앞장선 동양인 의사는 연륜이 있어 보이지만 늙었고, 뒤에 대머리는 눈알이 빛나긴 하는데…… 명백히 아랫사람이고……. 나머지는 저 사람에 비하면 눈빛이 좀 흐려.’
단지 사업을 잘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MIT 출신으로 뉴욕과 매사추세츠를 왔다 갔다 하면서, 개뿔도 없는 상황에서 사업을 키워 온 그였기에 필연적으로 사람 보는 눈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이수혁 교수님 맞으신가요?”
틀리면 또 어떤가 하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마취도 방금 깨서 눈이 침침하다고 하면 되지 않겠나.
게다가 나름의 확신도 있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얘기로 전해 들었습니다. 아주 잘생긴 선생님이 절 진단해 주셨다고.”
“아, 하하하하. 과찬이십니다.”
거기에 더해 칭찬도 했다.
다소 원색적인 칭찬이었지만, 이것처럼 잘 먹혀들어 가는 것도 별로 없지 않나.
특히 수혁처럼 눈앞에서 외모 칭찬을 받을 일이 거의 없었던 이에게는 백발백중이었다.
[포커페이스 깨집니다……. 거짓말에 흔들리다니, 수혁도 수양이 아직 많이 부족하군요.]
‘거짓말이라니. 방금 마취에서 깬 양반이 그럴 정신이 있겠냐?’
[아니…….]
‘닥쳐. 더 말하지 마. 나는 이 말을 진리로 삼겠어.’
수혁은 저도 모르게 후허허 웃더니, 환자에게로 다가갔다.
칭찬을 받았으니 뭐라도 보답을 해야겠단 생각을 하면서였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대개 받은 것을 돌려줄 터였다.
그러니까 칭찬으로 화답했을 거란 얘긴데, 아쉽게도 수혁은 보통 사람의 범주를 이미 넘어서 버린 지 오래였다.
“좌우 발 크기가 다른 것을 언제쯤 알고 계셨죠?”
“어…… 그. 네. 오래됐죠.”
“오래되셨는데 딱히 불편감을 느끼진 않으셨나요?”
“불편해서 신발을 다른 걸 산 건데…… 그 이상으로 복잡하게 생각할 새는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기이한 일이었다.
아픈데 그걸 복잡하게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니.
하지만 나이가 젊고, 한창 달리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달리기 시작한 경주말이 옆을 돌아보던가.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는 그저 달리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두고 있는 이 젊은 사업가는 확실히 경주말이었다.
‘나도 그래서 연애를 못 하는 거잖아.’
[네네.]
수혁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그 외에도 혈뇨가 있으셨죠? 그때 아마 통증이 수반되었을 것 같은데…….”
“아, 네. 요로결석으로 진단받은 적도 한 번 있습니다.”
“아하.”
여러 징후들이 있긴 하지만, 서로 연결 짓지 않는 이상 거대한 질환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운 징후들이었다.
‘역시 내가 아니었으면…… 죽었겠군.’
수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환자의 질환에 대해 설명했다.
“드문 질환입니다. 그리고 장에 침범이 있는 경우, 예후도 좋지 않을 수 있죠. 이번처럼요.”
“아…….”
“하지만 지금처럼 일단 한고비 넘긴 상황이라면, 철분 보충과 정기적인 경과 관찰만으로도 관리가 가능합니다.”
“아……!”
나름 희망적인 얘기를 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마 살짝 거짓말을 해야 했을 상황이었다면, 했을 터였다.
정기적인 경과 관찰만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말은 결국, 정기적인 경과 관찰이 필요하다는 말이니까.
다시 말하면, 별거 없어 보여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귀찮거나 바쁜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 될 수 있었다.
그럴 때야말로 희망을 줘서 환자를 끌어나가야만 했다.
“바쁘시겠지만 치료에 협조해 주시면 큰 문제 없으실 겁니다.”
“네, 그래야겠죠. 그건 그렇고……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윌리엄 스콧이라고 합니다. 사일런스 딜리버리라는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북미에서만 서비스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더 확대할 생각입니다.”
“아, 그렇군요.”
환자는 언제 준비했는지, 명함을 꺼내 주었다.
수혁은 그 명함을 받고선 저도 모르게 이현종을 바라보았다.
사업적인 얘기로 넘어오면 거의 뭐 바보나 마찬가지라서 그랬다.
“음. 그래. 저희도 태화 의료원 뉴욕 센터를 운영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마 알아보면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군요. 좋습니다.”
“보스턴에 있을 때는 당연히 이 병원으로 가셔야겠지만, 뉴욕에 있을 땐 그쪽 병원으로 가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뉴욕 센터로 가면 교수님을 볼 수 있을까요?”
“원격 의료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을 겁니다. 시술보다는 진단에 치중하긴 할 텐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겠죠.”
“그렇죠.”
윌리엄은 아까 휴대폰으로 검색한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종교적인 느낌의 페이지가 있어서 놀라긴 했지만, 그 외에 다른 것들을 볼수록 더 놀라웠다.
특히 유튜브가 그랬다.
자막이 있어서 영어만 하는 그조차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딱 봐도 너무 어려워 보이는 케이스들을 딱딱 진단해 내는 과정이 꽤 재미있었다.
‘원격 의료…… 아직 사업적으로는 쉽지 않긴 하지.’
말만 사일런스 딜리버리고, 귀찮고 좀 부끄러울 수 있는 약을 보내 주는 서비스였지만, 실상은 원격 의료의 한 갈래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나.
한 발 떡 걸치고 있다는 얘긴데, 당연하겠지만 그리 쉬운 사업은 아니었다.
대면 의료에 내는 돈만큼 낼 의향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꽤 호기롭게 뛰어들었던 여러 업체들, 그중에서도 발군이었던 업체조차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뭐…… 더 암초들이 많지.’
그런 윌리엄을 보면서 이현종은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쭐레쭐레 따라온 수혁과는 달리, 그는 어른이지 않나.
본래 같으면 이따위 것들 다 상관 안 하다고 하겠지만 자식새끼가 문제였다.
가슴으로 낳은 새끼건 진짜 낳은 새끼건 간에, 사랑으로 품고 나면 그때부터는 사실상 고생 시작이었다.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할 만한 일은 없을 거야. 그래도…… 다른 스타트업하는 사장들…… 신흥 상류층들하고 병원이 자선 행사라도 열게 되면 도움이 되긴 하겠지.’
하여간 한국에서의 원격 진료는 진짜 어려운 일이었다.
컨셉은 좋았다.
만약 원격 진료가 상용화된다면 의료 취약층까지 가지 않더라도, 만성 질환이라서 어차피 먹어야 할 약을 한두 번 정도는 영상통화로 진료받고 받을 수 있지 않겠나.
게다가 팬데믹 사태가 온다면, 그때는 그러한 시스템이 있고 없고가 국민 건강은 물론이거니와 경제적으로도 꽤 차이를 불러올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돈 낼 사람이 없다는 거다.
앱 개발하고 서버 구축하고 병원 모집하고 광고 돌리는 건 죄다 업체가 부담해야 할 돈인 데 반해, 진료비는 국민 보험 공단에서 나오는 돈 외에 더 줄 리가 없었다.
환자?
당장 환자 알선 행위로 걸릴지 말지를 염려해야 하는 마당에, 환자에게 돈을 받아?
‘뭐, 내 일은 아니지.’
이현종은 쿨하게 생각을 지워 버렸고, 그 사이 수혁은 환자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한 참이었다.
“그럼, 나중에 뵙죠.”
“아, 네.”
“몸조리 잘하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그러곤 별 망설임 없이 밖으로 나섰다.
‘수혁아? 우리 지금 이 사람 보러 보스턴까지 온 건데? 돈 얘기는 안 하니? 후원금…… 얘기 안 하는 거야?’
이쯤 되니 이현종도 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알아보니, 이 양반은 돈 좀 만지는 사람이라 더 그랬다.
물론 돈 잘 번다고 거액을 턱턱 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그런 상상쯤은 해 볼 법하지 않나?
하지만 수혁의 눈을 보니 이미 다른 생각이 그득해 보였다.
그리고 이현종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환자 보고 싶구나. 하긴…… 학회 와서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역시 환자 보는 게 최고지.’
슬슬 그도 금단 증상이 오기 시작해서 그랬다.
남들이 보기엔 미친놈 같겠지만, 하여간 이들은 그랬다.
그렇게 미쳐서 명의에 미친 것일 수도 있었다.
“자, 그럼 관광 가실 거에요?”
이윽고 밖으로 나온 리처드는 수혁에게 이렇게 물었다.
일반 사람의 당연한 생각이었고, 당연히 빗나갔다.
“병원 구경을 좀 하죠. 중환자실부터요.”
“네? 아니, 뭐…….”
“투어 있지 않아요?”
“투자자들 대상으로…….”
“투자는 저쪽에서 했으니까 대신하는 거로 하죠. 어때요?”
“아니, 그. 그 뭐……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