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2화 보스턴 (3)
리처드는 달렸다.
달리다 보니 내가 왜 달리고 있지 싶었지만, 코앞에 진단 검사 의학과가 보였다.
그 말은 곧 벌써 꽤 달려왔다는 얘기였다.
어차피 늦었는데 이제 와서 점잔 빼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딩동.
하여간, 리처드는 문 앞에 달린 호출기를 눌렀다.
이런 점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다 마찬가지였다.
영상의학과, 진단 검사 의학과, 병리과와 같이 어떤 검사에 대한 결과를 알려 줘야 하는 과에는 기습하는 놈들이 늘 있기 마련이었다.
의사에겐 환자가 소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문제는 모든 의사가 그렇다는 점이었다.
모든 놈들이 와서 뻔히 있는 순서를 무시하고 내 환자 검사부터 봐 달라고 난리 치기 시작하면 병원이 어찌 되겠나.
‘내가 그 짓거리를 하고 있구나…….’
리처드는 한숨을 쉬긴 했지만, 다른 의사들처럼 뻔뻔한 얼굴로 호출기 앞에 서 있었다.
만약 갑자기 찾아오는 게 정말 문제만 되는 일이었다면 이렇게 호출기도 달아 두지 않았을 터였다.
의학이 그렇게 딱딱 수학적으로만 굴러가는 학문은 아니지 않나.
예외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고.
“네, 누구…… 응?”
“어, 나 내과 과장 리처드야.”
“여기는 웬일……?”
순서에 관계없이 급하게 봐야 하는 환자가 있단 얘기였다.
물론 리처드 정도 되면 그냥 차 마시러 와도 문전박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서, 당직을 서던 진검 의사의 컨펌 하에 리처드는 아직 용건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어휴…… 너저분한 거 봐라…….’
현 진검 과장은 닥터 제.
한국계 미국인인데, 성향이 좀…… 리처드랑은 잘 맞지 않았다.
하지만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과는 달리 과장은 그야말로 그 과의 장, 왕이었으니까.
“좀 지저분하죠? 과장님이 이것저것 모으는 거 좋아해서…….”
“아니, 뭐. 괜찮아요. 뭐 하나 물어보려고.”
“아…… 네네. 얼마든지요.”
그 말은 곧 리처드도 내과의 왕이란 얘기였다.
과에 우열이 있다는 말은 논란이 있겠지만, 하여간 내과는 거대한 과였다.
그 과의 수장인 리처드였기에, 평범한 의사에겐 너무 어려운 상대일 수밖에 없었다.
“내 환자 중에…….”
리처드는 이런 게 권력이란 생각과 함께 환자의 등록 번호를 부르고, 배양 검사 배지를 찾도록 했다.
그러곤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이상하게 듣지 말고. 혹시 그…… 균주를 특정하면, 이게 무슨 균인지 알 수 있나? 검사 나간 지 며칠 안 되긴 했는데……”
“아, 잠시만요. 음. 이제 만 48시간 좀 지났는데…… 흠.”
진검 의사는 균주를 특정한다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해서, 일단 묻는 말에 답하려 애쓰면서도 머리를 굴렸다.
‘뭔 개소리야.’
그렇다 한들 별 소용은 없었다.
균주를 특정한다는 건 무슨 균에 감염되었는지 알고 있다는 건데, 이건 불가능한 일이라서 그랬다.
아, 원내 감염이고 이미 균이 동정된 환자에게서 감염된 정황이 확실하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지만, 이 환자 기록을 보면 응급실을 통해 들어왔다.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한데…… 어떤 종류를 의심하시는 거예요?”
“아, 그.”
리처드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진짜 실력만으로 과장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이현종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아쉽게도 대부분의 의사는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정도의 업적을 이루진 못하는 법이었다.
‘아 씨…… 이미 개소리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덕분에 리처드는 상대의 눈에서, 그리고 얼굴에서 여러 욕설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망할.
내가 그래도 내과 과장인데 이런 꼴을 당해야 하나?
뭐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하여간에 뭐에 씌어서 여기까지 온 참이었다.
게다가 아까 이현종의 추론을 들었을 때, 진짜 그럴싸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나.
완벽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리처드와 그 팀이 해 오던 추론보다는 훨씬 대단했다.
“제멜라(Gemella) 종류…… 음. 낯선 균인데.”
“아…… 표재성 균이죠. 면역력이 떨어져 있나 보죠?”
“아, 그렇네. 사실 얼마 전에 제세동기 심었어. 근데 그 전자 리드에 감염이 있는 것 같아서.”
“아…… 어……?”
“왜 그러나?”
“아니, 얼마 전에 컨퍼런스에서 들어 본 것 같아서요. 사실 요새 리드 감염이 엄청 늘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야 그럴 수밖에 없지.”
리드 감염.
즉 전극 도자 감염은 예전엔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병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뭔가를 신체에 심는 행위 자체가 비교적 최근 들어서야 가능해지지 않았나.
리처드는 아직도 처음 페이스 메이커를 접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했다.
사실 본인이 의사 생활을 본격적으로 할 때는 이미 페이스 메이커가 꽤 자리를 잡은 뒤였음에도 그랬다.
인간이 만든 무언가가, 망가진 인체를 보정하는 장치로서 몸 안에서 반영구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언제 봐도 경이로운 것이었다.
‘이제는 뭐…… 엄청 많지.’
허나 과학은 정말이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 덕에 인류는 이런저런 삽입기들을 어마어마하게 개발하기 시작했고, 그걸 체내에 박아 넣기 시작했다.
그 수가 늘어나면서 관련 감염이 늘어나는 건,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여러모로 새로운 감염이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그쪽 컨퍼런스가 엄청 많거든요. 잘 아시겠지만요.”
“그렇지.”
하여간 진검 의사는 배양 배지에서 일부 자라난 균주를 따로 떼어내 슬라이드로 만들고 있었다.
숙달된 의사다 보니 속도는 빨랐지만, 그만큼의 침묵도 참을 수 없었는지 입을 쉼 없이 놀리고 있었다.
“거기서 주목받고 있는 균주가 제멜라(Gemella) 속입니다. 그중에서도 제멜라 히멀리전스(Gemella haemolysans)인데.”
“아.”
“왜요?”
“아니, 그 균주를 의심하고 있어.”
“허.”
제멜라 히멀리전스(Gemella haemolysans)라고 했었더랬다.
분명.
‘방문 열고 나올 때…… 그랬지? 이수혁 교수가.’
리처드 교수에게는 낯설기만 한 균주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두 번이나 들었더니, 아까 들었던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해서 다시금 확인을 해 주었더니 진검 의사 얼굴이 좀 괴상해졌다.
“왜 그러지?”
“음…… 더 자세한 건 염색을 해 봐야겠지만…… 제멜라 히멀리전스(Gemella haemolysans)라 생각하고 보면…… 맞는 것 같아서요. 아니, 이건 확실해요. 맞습니다.”
“하.”
“근데 이걸 대체 어떻게 아신 거예요? 아무리 리드 감염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받는 균주긴 해도…… 반드시 그런 건 아닌데……?”
진검 의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리처드는 그런 진검 의사를 비슷한 얼굴로 마주 바라보았다.
‘왜 그런 모르겠다는 얼굴로 봐? 지가 물어봐 놓고?’
진검 의사야 이 인간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리처드는 살짝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뭐 어쩌겠나.
‘이수혁 교수…… 진짜 미친놈인가.’
아니,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이수혁에 대한 생각이 그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분명 시작은 이현종이 했다.
확실히 대가답게 신중하고도 의미 있는 접근이었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이쪽에서는 확인하지 못했던 리드 감염도 확인하지 않았나.
‘근데 거기서 균주를…… 특정해?’
허 참.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눈앞에 아직 진검 의사가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진짜로 미친 수준이었다.
이건 머리가 좋고 말고를 떠나서…….
‘무슨…… 인터넷 달린 A.I.도 아니고……?’
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나?
-야, 가서 전화해. 균주 특정되면 바로 항생제 바꿔야지. 넣은 거 빼는 것쯤이야, 네가 알아서 저 환자 상태 조절하면서 잘 보고.
마냥 놀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그렇게 입만 헤 벌리고 있을 수만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냥 퀴즈 맞히고 놀고 있는 게 아니지 않나.
리처드는 환자를 보고 있었다.
그것도 자기 환자를.
“아, 교수님.”
“응.”
“제멜라 히멀리전스(Gemella haemolysans)…… 특정되었습니다.”
“역시.”
상대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이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몰라서 그런 걸까?
그건 아닐 터였다.
이현종은 대가니까.
‘그 말은 역시…….’
이수혁이 워낙에 대단해서, 이런 일은 놀랄 일 축에도 못 낀다고 여기는 것이 맞을 터였다.
“약은…….”
“반코마이신 및 세프트리악손으로 가죠. 그게 제일 잘 듣습니다.”
“아, 그래.”
감탄하고 있으려니, 수화기 너머에서 이런 대화가 들려왔다.
약도 알고 있었다.
물론 뭐…….
‘반코랑 세프트리악손이 대단한 약은 아니지…….’
많이 쓰는 약제였다.
두 개를 동시에 쓰는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하여간.
허나 균주를 특정한 동시에 그 균주에 제일 잘 들을 만한 약을 바로 말할 수 있다?
이건…….
‘괴물인가…….’
리처드는 허, 허! 하면서 저도 모르게 방에서 나왔다.
“아니, 이러고 가?”
진검 의사가 들으라는 듯 일부러 중얼거렸음에도 별 소용은 없었다.
리처드의 머릿속이 워낙에 복잡해져서 그랬다.
‘전화로 진료한 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건데……. 이런 의사가…… 현존하는구나.’
리처드는 대표적인 현대의학의 신봉자였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의학에 한계가 없다고 생각하냐?
그건 또 아니었다.
개선해야 한다곤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개인의 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였다.
한때 윌슨으로 대표되는 A.I.에 희망을 걸어 본 적도 있기는 했지만.
이젠 시스템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라 여기고 있었다.
‘아니, 근데…… 이게…… 가능하구나.’
그걸 혼자서 해낼 수 있는 놈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잡아?
어떻게?
잡으면 무엇을 하나?
뭐 이런 생각이 자꾸만 떠올라서 걸음걸이마저 휘청였다.
“어…….”
하지만 그건 너무 이른 것이었다.
다시 말해, 리처드는 그때 놀라서는 안 되었다.
‘여기…… 내 환자가 있는 곳이 아닌데?’
중환자실은 꽤 넓었다.
그렇다고 맨날 오는 리처드가 길을 잃거나 환자 위치를 헷갈릴 만큼 넓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지금 이…… 이현종 일행이 위치를 옮겼다고 봐야 할 터였다.
다시 말해, 이놈들이 멋대로 남의 병원을 휘젓고 다닌다는 뜻이었다.
‘아, 화장실 가려나?’
그래.
설마.
화장실이겠지.
환자를 지 멋대로 보고 있진 않겠지.
‘근데 화장실은 저렇게 신난 얼굴로 가나……?’
특히 이수혁 교수는 무슨 놀이동산에라도 온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놀이동산에 가도 저런 얼굴이 될 거 같지는 않았다.
나이 먹고 그럴 수가 있겠나.
“저기…….”
이런저런 생각에 혼란만 중첩된 리처드는, 설마 하는 얼굴로 이수혁을 불렀다.
허나 이수혁은 대답 대신 방으로 들어갔다.
아니, 병실로 들어갔다.
거기엔 환자가 있었다.
심지어 리처드의 환자도 아니었다.
‘아, 지인인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뒤로하고.
“저기요!”
리처드도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