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6화 MOU 아니라 각서 체결 (1)
“이제…… 이제 그만 가죠.”
밤이 깊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해가 저문 지 오래였다.
이대로 더 있다간 예약해 둔 식당도 문을 닫아 버릴 판이었다.
“아…… 그럴까요? 아쉬운데.”
그리고 이걸 다시 말하자면, 정말 하루 동안 온종일 환자만 보고 다녔다는 얘기였다.
한 자리에 서서 본 것도 아니고 온 병원을 헤집으면서 환자를 찾아나섰다.
다리도 하나 불편한 양반이 대체 무슨 기운이 있어서 그랬을까.
여기까지 다닌 것만 해도 불가사의에 속할 일 같은데, 미친놈이 아쉽다고 하면서 정말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하아…….’
그럼에도 리처드는 화까지 내진 못하고 있었다.
처음 환자, 그러니까 심장 환자는 솔직히 말하면 그냥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현종이니까.
또 리드 감염에 관한 논문을 최근에 봤다면 더더욱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원래 명의라는 게 순간적으로 돋보이는 면도 없지 않아 있지 않나.
어딘가에 푹 꽂혀서 다니다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을 해결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두번째부터는…… 그건 절대 우연일 수가 없어.’
신경과 환자라는 것부터 어이가 없었다.
리처드도 내과 의사로 살아온 세월이 짧은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매사추세츠 종합 병원은 남들 앞에서 ‘여기가 세계 최고의 병원이다’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곳이었다.
이 안에 있다 보면, 아니, 버티다 보면 좋든 싫든 이런저런 경험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그런 그조차 그런 건 처음 봤다.
‘형광 물질…… 그게 뭐…… 그래. 백번 양보해서, 해당 과에서는 드물지 않게 시행하는 거라고 치자…….’
들어 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1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하는 시술이라고 했다.
그나마 매사추세츠 병원이 TSA(코를 통해 뇌하수체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법)를 비롯한 머리 바닥 건드리는 수술을 많이 해서 이렇지, 규모가 조금 작은 병원에선 신경외과고 이비인후과고 이론적으로만 건드는 시술이었다.
실제로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다음 환자도…… 그다음 환자도…… 지금은 심지어 소아.’
리처드가 화를 내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병동의 아이 하나가 구원을 얻었다.
그리고 그 부모 또한 구원을 얻었다.
죽어 가던 자식의 삶에, 그 앞에 희망이 비치게 된 것을 구원이라 부르지 않으면 달리 어떤 걸 구원이라 부를 수 있겠나.
“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아유…….”
수혁은 그 앞에서 그냥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눈으론 다른 환자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라고 해서 사람을 살리는 데 무감한 것은 아니었다.
그건 그것대로 기뻤다.
하지만 살렸잖아?
그럼 됐다.
어려워하는 다른 사람을 보고 싶었다.
“이제 가자, 수혁아. 진짜 밤이 깊었어.”
허나 사람은 자중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뭐…… 오늘 재밌었죠.]
‘보람도 있었지.’
[네. 그렇죠. 보람도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래, 그렇지.’
진단을 했다고 해서 다 치료할 수 있는 건 또 아니지 않나.
예전에도 알고는 있던 사실이지만, 그런 생각이 최근에 점점 더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옛날엔 단지 진단해 낸 것만으로 기뻐했다면, 이제 진단은 점차 상수가 되어 가고 있어서 그랬다.
그에 비해 치료는 어떤가.
현대의학의 한계라는 이름으로, 치료는 제한되어 있는 질환이 많았다.
‘일단 암 환자가 없었어.’
[네. 다행이죠.]
암이라니.
대체 언제적 암인가.
다른 질환들은 그래도 하나하나 정복해 나가고 있는데, 이건 어떻게 된 게 아직도 오리무중이었다.
물론 이렇게만 말하면 좀 섭섭하긴 했다.
세대를 거듭해 가면서 보다 좋은 항암제들이 나오고 있긴 하니까.
허나 부족했다.
여전히, 사람은 죽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네? 아. 아뇨. 뭐…….”
혈액종양내과를 택한 의사들이 내면에 우울감을 간직하게 되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에 비하면 이현종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그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심장내과는 엄청난 발전을 했고, 그에 기여를 한 게 이현종이지 않나.
무엇보다 심장 내과는, 그러니까 심혈관 질환은 진단만 제때 해서 처치하러 들어가면 대개 살릴 수 있었다.
심부전증이야…… 여전히 도전적인 분야긴 해도, 암보다는 훨씬 나았다.
조태진이 술에 취해서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그냥 오늘 본 환자들은 다 살 사람이라. 그게 좋았어요.”
“아. 그렇지. 오늘은 그랬지.”
물론 이제 이현종은 더 이상 그런 범위 안에 있지 못했다.
아들내미 뒤치다꺼리를 너무 세게 하느라 팔자에 없던 통합진료센터 센터장을 하게 되어서 그랬다.
취미의 영역에 있던 것이 업이 되면서, 이현종 또한 보지 않아도 되었던 죽음과 절망을 마주하게 되었다.
“치료에 대한 얘기시군요.”
리처드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둘…… 그중에서도 이수혁은 천재야. 스카웃하는 게 어렵다면, 관계라도 쌓는다.’
다분히 정치적인 계산이 서 있기도 했지만.
‘심부전도 여전히 지지부진하긴 하지…….’
그 또한 의사고 또 의학자다 보니, 이 대화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무 이해가 가서 그랬다.
“아, 네.”
“식당은 걸어갈 만한 곳에 있으니…… 천천히 걷죠. 걱정 마세요. 이 근처는 뉴욕하고 달라서 치안이 아주 좋아요.”
“네네.”
리처드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대개 그러하듯, 공기가 좋았다.
때문에 보스턴의 반짝이는 불빛에 가려지지 않을 만큼 강한 별빛을 고스란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 길을 좋아했다.
지금도 그랬다.
“저 뒤에 건물 보이십니까.”
물론 과장이 된 이후로는 마냥 좋아만 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그 길 너머에 있는 것들이 더 눈에 들어와서 그랬다.
가령, 지금 손가락 끝에 걸린 건물이 그러했다.
“아, 네. 병원 건물인가요? 본관보다도 큰 것 같은데.”
“아뇨. 부속 연구 시설입니다.”
“연구……? 저게요?”
“네. 한국하고는 좀 다르죠? 거기는 임상이 주를 이룬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주?
저걸 보니까 주, 부가 나뉘긴 하는 건가 싶을 지경이었다.
그만큼 거대한 건물이 저 너머에 서 있었다.
전에 미국 연수 왔을 때도 연구동이 따로 있어서 놀라긴 했는데, 이건 그 정도가 아니라 거의 도시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그 뒤에 보이는 건물이랑 센터들, 다 연구 시설입니다. 저쪽이 오히려 인력이 더 많아요. 저희도 물론 임상 진료를 보지 않을 때는 저기로 가 있고요.”
“와아…….”
정말 과장이 아니었다.
도시가 있었다.
오로지 연구만을 위한 도시가.
레지던트 때의 수혁이었다면 그냥 무슨 연구를 할까, 얼마나 많은 연구를 할까 궁금해하기만 했을 텐데.
지금의 수혁은 달랐다.
‘저게 다 무슨 돈으로 굴러가지……?’
[그러니까요? 아무리 수가(진료비)가 비싸도, 그걸 저기에 쏟을 수는 없을 텐데요?]
수가가 비싸다는 게 마냥 장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가가 비싸다는 건 그만큼 인건비도 비싸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니까, 나가는 돈도 많았다.
게다가 각종 고소·고발에 개연성이 있었다.
돈을 얼마를 냈는데 이렇게 해?
안 되겠는데?
게다가 미국은 그럴 때 징벌적 보상금을 먹이는 곳이기에, 병원은 따로 보험도 들어야만 했다.
“제약회사들이 돈을 쏟아붓기도 하고, 정부 보조금도 매년 천문학적으로 쏟아집니다. 저희가 성과로 보답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만…… 사실 그 전에 돈이 있고, 설비가 있고, 사람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죠.”
리처드는 수혁의 눈에 깃든 의문을 바로 읽어 냈다.
그런 의문을 품을 수 있는 깜냥도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순진한 연구원이라는 건 유니콘 같은 존재니까.
오히려 챙길 거 챙길 수 있는 주변머리 있는 사람이 더 나았다.
그런 걸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뭘 얼마나 받은 건지 모를 수도 있지 않겠나.
“어어, 이거 너 꼬시는 거지! 너!”
그때, 이현종이 끼어들었다.
리처드는 너스레를 떨었다.
“에에이. 꼬시긴요. 부센터장이라면서요? 그리고 통합진료센터라니. 우리는 그런 뭐야. 어? 그런 개념의 센터가 없습니다.”
“만들면 되잖아! 니네 돈 많은 거 내가 모르냐? 전에 러시아 사람도 백지 수표 주고 데리고 오지 않았어?”
“우리 아니에요, 그거. 뉴욕에서 그런 거죠.”
“아, 거긴가.”
“그쵸. 거기가 유태인 재단이라…… 아이, 거기는 연구도 안 하고 다 임상으로 박는 곳인데 돈이 너무 많지.”
“아무튼! 꼬시지 마!”
“넘어갈 것 같지도 않은데요, 뭐.”
리처드는 좀 아쉽다는 얼굴로, 그러니까 아까 병원에서 끌려 나올 때 지었던 표정을 지은 채 수혁을 바라보았다.
‘음…… 뭐 도전정신이 부족한 느낌도 아닌데 말이야…….’
아까 병원에서도 그렇긴 했지만.
수혁은 쫄지 않았다.
말이 이상한데, 사실 미국 의사들도 여기 오면 쫄기 마련이었다.
세계 최고라는 이름에, 그리고 그 이름에 걸맞아 보이는 시설과 인력에.
허나 수혁은 그저 환자만 볼 뿐이었다.
‘이미 충분히 보고 있다…… 거기서 할 수 있다, 이건가. 하긴, 뭐…… 태화가 큰 기업이긴 하지.’
그냥 큰 기업이라고 퉁 치기도 좀 뭐 했다.
더 이상 한국이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는 기업이었으니.
심지어 미국에서도, 그러니까 미 정부에서도 우습게 볼 수 없는 존재였다.
거기서 민다면, 전력을 다해 밀진 않겠지만 그만큼 성과를 낼 수도 있을 터였다.
그렇다 해도 아쉽긴 했다.
‘저 머리를…… 연구 쪽에도 쓸 수 있으면 진짜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바루다는 리처드가 되었건 누가 되었건 표정을 읽는 데 도가 튼 지 오래였다.
[이 인간 진짜 아쉬워하는데요?]
‘음…… 근데 진료에 대해 아쉬워할 게 있나? 봤잖아. 여긴 태화보다 수준이 높아. 전반적으로…… 실수가 없어.’
[그건 맞습니다. 확실히…… 임상이 왜 세계 최고인지 알겠어요. 아마 우리가 오늘 맞춘 것도 주말이라 그랬을 겁니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시간의 문제였지, 오진으로 남을 것 같지도 않았어.’
근데 왜 아쉬워할까?
바루다는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그가 연구의 산물이라서 그럴 수도 있었다.
[연구동을 보다가 지은 걸 보면…… 연구 역량에 대해 아쉬워하는 것 같은데요?]
‘음…… 연구라.’
[연구 쪽은 사실 고려 대상이 아니긴 하죠.]
‘하지만 치료를 하려면 연구도 하긴 해야 해.’
[하지만 수혁. 신약 개발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시잖아요?]
‘알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로도 부족한 것이 신약 개발이었다.
막대한 자본과 설비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누구에게라도 똑똑하단 말을 듣기에 충분한 사람들이 그야말로 삶을 갈아 넣어야 했다.
바루다도 수혁도, 수혁이 나선다 해서 그게 크게 다를 것 같진 않았다.
수혁 역시 삶을 갈아야 한다, 이 말이었다.
그리고 그건 곧 임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여간 구경만이라도 가 보고 싶으면 제가 주선해 볼 수 있습니다. 어차피 내일 일요일이니까 뭐…….”
“꼬시지 말라니까?”
“아니, 교수님도 한번 보세요. 혹시 압니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계속 꼬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