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897화 (897/1,303)

897화 MOU 아니라 각서 체결 (2)

리처드는 꾸준히 노력했고, 이현종도 노력했다.

서로의 역량 자체가 비슷하지는 않았다.

이현종은 정치질로 원장까지 해 먹었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리처드도 정치질만 해서 과장 자리에 올라갔다는 말을 들으면 너무 억울하고 분할 만큼의 실력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하여간 일반인보다는 월등한 정치 감각을 가졌다고 봐야 했다.

허나 이현종은 수혁의 아빠.

때문에 둘의 노력은 어느 선에서 결국, 평행선을 이루고 있었다.

“밥은 맛있네.”

“확실히 미국이 재료가 좋네요.”

그렇다 보니, 식사 시간을 나름 2시간가량 가져갔음에도 불구하고 리처드가 얻어 낸 소득은 거의 없었다.

숙소에 돌아온 이들은 고작해야 밥 얘기나 하고 있었다.

그럴 만한 밥이긴 했다.

랍스터를 언제 그렇게 배 터지게 먹어 보겠나.

특히 수혁은 아직까지 소시민적 마인드를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아무리 돈을 충분히 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한 끼에 태울 수 있는 금액은 정해져 있다, 이 말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현종은 잠시 밖을 내다보았다.

급히 잡은 호텔은 병원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뭔 호텔이 병원 근처에 있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이 호텔은 병원 때문에 지어졌다고 봐야 했다.

매사추세츠 병원의 위엄은 정말 전 세계로 뻗어 있었기 때문에, 일단 사방팔방에서 찾아오는 환자들이 많았다.

어지간해서는 입원을 시켜 주지 않았기 때문에, 외래 베이스로 다니게 생긴 환자들 중엔 울며 겨자 먹기로 호텔을 이용해야만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 외에도 연수생, 또는 학회 참석차 오는 이들도 1년 내내 꾸준히 있어서 호텔은 장사가 아주 잘됐다.

‘연구라.’

때문에 이현종은 창가 너머에 있는 병원, 그리고 연구 시설 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정말이지 입이 떡 벌어지는 규모였다.

아무리 한국에서 병상이 몇 개 가지고 있니 떠들어 봐도 여기에 댈 건 아니었다.

병상 규모만큼의 연구 단지가 아니, 그 이상의 연구 단지가 따로 있었다.

‘확실히…… 아직 우리나라가 저쪽 분야에선 딸리긴 하지.’

기초 과학 또는 기초 의학으로 분류되는 분야에 있어, 대한민국은 사실상 불모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한민국만큼의 역량을 지닌 국가에서, 그것도 거의 세계 최고 수준에 달하는 임상 능력을 지니고 있는 국가에서 기초 의학 분야에 노벨상이 하나도 없다는 건 기형적인 일이라고 봐야만 했다.

당장 임상 수준만 놓고 보면 이웃 나라 일본을 압도하고도 남지만, 기초 의학 분야에 있어서는 비교 자체가 불가할 정도로 차이 나지 않나.

다들 성격이 급해서 그런지, 당장 성과가 보이지 않는 분야에 대해서는 정부도 회사도 심지어 국민도 인색하게 구는 편이었다.

‘협업을 제안받았으면 그건 그것대로 잘된 일이긴 해.’

이현종은 머릿속을 뒤적거려 보았다.

기초 의학이라는 말 말고, 정작 기초 의학에 관한 지식은 거의 없었다.

석박사를 해도 임상 교수 밑에서 밟아 나가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장 수혁도 석사 과정을 밟고 있지만 실험 연구는 아예 해 보지 못했다.

기껏해야 영상의학과 김진실 교수와 했던 게 다인데…….

그것도 솔직히 말하면 실험 연구라고 하기엔 좀 어폐가 있었다.

매사추세츠 사람들이 보면 놀랄 지경이었다.

너무 잘해서가 아니라, 너무 허접해서.

그리고 그 주체가 국제 학회에서 나름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이들이라는 것에 또 놀라겠지.

“수혁아.”

“네, 아빠.”

호텔 방엔 단둘뿐이었다.

나머지는 각자 자기 방에 흩어져 있었다.

뒤풀이니 뭐니 하면서 술 한잔 더 까기에는 하루가 좀 힘들어서 그랬다.

뉴욕에서 날아와 하루 종일 진료 아닌 진료를 보고, 바로 또 2시간 동안 때려먹지 않았나.

물론 젊은 청춘들은 이 와중에 나가서 놀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하여간 두 교수는 배정받은 방 안에 있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 연구에 대해서.”

“연구요? 음…… 사실 요새 그게 좀 고민이긴 해요.”

“고민? 왜?”

이현종의 눈이 가늘어졌다.

연구에 대한 열망은 의학자라면 누구라도 가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국가 연구비를 타든, 기업 후원을 받든 간에, 환자만 봐도 뒤질 지경인 태화 교수들도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인생을 갈더라도 뭔가 업적을 하나 만들고 싶다, 이 욕망은 학자에게 있어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근데 그 환경이 수혁이 눈에 찰까……? 임상적인 부분은 우리가 얼마든지 채워 줄 수 있다지만 연구는…… 확실히 미국에 오는 게 맞아.’

좀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허나 아빠로서 응원해 줘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자식이 큰물에서 놀고 싶다는데.

“진단이 제일 재밌어요. 재밌긴 한데…… 가끔 보람은 없을 때가 있죠. 치료가 안 되니까.”

“아, 그건 그렇긴 해. 그건 이 애비도 고민이야.”

“네. 근데 또 그렇다고 연구에 매진하기엔…… 시간이 없단 말이죠. 이건 아이디어나 추론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실행하고 입증해야 하는 거잖아요? 제가 쌓아 온 커리어랑 딱히 아주 잘 맞지도 않고.”

“어…… 그렇지.”

헌데 듣다 보니 그런 얘기가 아니었다.

하루 종일 환자 보면서 놀다가 저녁엔 랍스터를 얼굴에 묻혀 가면서까지 먹길래 별생각이 없는 줄 알았는데, 나름 뭐랄까.

자기 생각이 있었다.

[너무 후려치는 것 같지만…….]

‘임상을 도와주고 연구에 도움을 받는 게 뭐가 후려치는 거야?’

[임상은 얘들도 할 수 있는 건데, 연구는 우리 독자적으로는 못 하는 거잖아요?]

‘하청받는 거나 마찬가진데 뭐.’

[그리고 논문하고 실적은 나눠 먹자는 얘기잖아요?]

‘그건…… 뭐…… 그렇게 해 줄 때 얘기지.’

보다 깊게 들여다보면 사실 그 정도가 아니었다.

이현종이야 자식이고, 또 그 전부터 애정하던 놈이니 결점 비슷한 것은 볼 생각도 없고 또 보이지도 않겠지만, 바루다의 영향 때문에라도 지극히 합리적이면서 어찌 보면 이기적이기까지 한 판단이 가능한 게 수혁이지 않나.

이미 머릿속으로는 리처드를 무릎 꿇려 놓고 각서까지 다 받았다.

신체 포기 각서……가 아니고, 연구 포기 각서.

아니, 이것도 아니고…… 공동 연구 각서.

“근데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도 사실 부센터장이고, 우리 센터에서도 앞으로 대학원생이나 박사 인력으로 뽑을 수 있는 TO(자리)를 만들 수 있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들고요.”

“어, 그렇긴 하지. 근데 내가 예전에 해 봤거든? 그거 보통 일이 아니야. 물론 네가 사람 쓰고 그냥 버릴 생각이면 모르겠는데.”

“아, 그럴 수는 없죠. 커리어에 보탬이 되어야죠. 연구 교실 이름으로 내는 논문에 이름도 실어 주고.”

“근데 그러려면…… 미국에서 포닥으로 갈 만큼 뛰어난 인재는 못 불러. 왜냐면 우리는 그만한 연구를 할 수 없거든. 결국, 타협을 봐야 한다는 건데…… 이게 또 쉽지가 않아요. 너랑 나나 눈높이가 이게 보통 눈높이니.”

임상에서 안대훈만큼 할 수 있는 PhD(의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 박사를 구하려면 대체 얼마나 줘야 할까?

또 그의 커리어에 얼마나 보탬이 되어 줘야 할까.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이현종으로선 한번 구체적으로 계산해 본 적이 있어서, 엄밀히 따지면 상상이 아니라 회상이었다.

실제로 숨이 안 쉬어져서 잠깐 창문을 열어야만 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응……? 뭔가 생각이 있어?”

찬바람을 쐬며 심호흡하고 있으려니, 수혁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나쁜 생각이지만 솔깃한 제안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리처드 박사님이 연구 쪽으로 어필을 하려고 하잖아요. 제 생각에는 내과 과장 정도 되면…… 미국에서는 연구 열몇 개는 관장하고 있을 것 같은데…….”

“묘하게 정확한데. 옛날부터 관심이 있었어?”

“관심은 있었죠. 근데 뭐 뒤로 미루고 있었는데…… 리처드 박사님하고 할 만한 뭔가가 생겼으니까요. 우리가 임상적으로 어려운 환자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공동 저자로 케이스 리포트를 많이 써 주고, 이쪽에서 연구 진행하는 과제 중에 그…… 하청 줄 만한 게 있으면 우리 병원에서 진행하고, 또 공동으로 하면 어떤가 싶은 거죠.”

“공동으로…… 케이스 리포트랑은 체급이 너무 안 맞긴 한데……. 사실 환자 보는 걸 딱히 논문 임팩트 팩터(평가 점수)만으로 비교하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그건…… 좀.”

솔깃한 제안이긴 했다.

하지만 너무 솔깃하다는 게 또 문제였다.

보통 이러면 사기 치는 건데, 이건 어떻게 들어도 사기였다.

리처드가 호구 새끼라면 또 모르겠지만…… 아니, 그가 호구라고 해도 매사추세츠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뻔했다.

“연구 과제 설계를 우리가 돕는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한국이 요새 임상 시험 1등이잖아요. 우리가 주체로 하진 않지만…… 진행 자체는 많이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음…… 설계? 우리가 별로 해 본 적이 없는데, 괜찮으려나?”

“말이나 해 보는 거죠.”

“음. 그래, 말하는 데 뭐 돈도 안 들고. 여차하면 리처드 더 안 보면 되지.”

“아, 그렇게까지 실례가 되는 말일까요?”

“아니, 지금까지 내가 좀 실례를 저질러 놓은 게 있어서 좀만 더 건드리면 바로 파투야.”

“아.”

그렇다면 인정이지.

이현종의 학회 인성이야 유명하지 않나.

진짜 실력이라도 없었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였다.

물론 실력이 있어서 인성질을 할 수 있는 거긴 한데…….

하여간에 이건 아들도 쉴드 불가였다.

“괜찮아. 이런 식으로 끊긴 인간관계가 좀 있는데…… 진짜 친한 애들은 안 그러더라고.”

“뭐…… 보통은 원래 그렇지 않나요?”

“하여간. 낼 그렇게 얘기나 해 보도록 하지.”

“아빠만 괜찮으면, 저는 좋죠.”

이현종은 고개를 주억거리는 수혁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아빠라고 부르는 동안에는 뭘 해도 좋단다.’

이현종을 아는 사람이 듣는다면 망치 들고 쫓아올 만한 생각을 하면서였다.

하여간 아침이 되자마자, 그러니까 일요일 아침이 되자마자 리처드는 호텔 로비로 와서 일행을 데리고 연구동으로 향했다.

“다 보여 드리면 좋은데, 사실 저랑 무관한 프로젝트들이 너무 많아서…… 관련된 것만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말은 공손하게 하는데, 표정에서는 부심이 일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꼬셨던 동양인 의사들이 몇이던가.

진짜 한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임상을 안 하고 연구만 하는 직위로도 여럿이 왔다.

‘그리고 다들 잘하더라고…… 기본적으로 좀 꼼꼼하다고 해야 하나.’

나름 훌륭한 의사들이었지만 글쎄, 아무리 그래도 수혁만 할까?

저건 숫제 괴물인데.

저런 사람이 와 준다면……?

‘안 오고 비대면으로 도움만 줘도 괜찮은데…… 아, 이거 너무 후려치는 것 같은데.’

속으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혁과 이현종의 걱정을 다 쓰잘데기없는 것으로 만드는 생각인데, 그런 생각을 괜히 한 건 아니었다.

한국의 기초 의학 연구실 기준으로는 너무 후한 조건이 미국의 기준으로는 너무 후려치는 조건이 되어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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