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3화 이제 보니까 우리……? (1)
“2.6mmol/L(혈중 리튬 농도 평균, 0.6~0.75)입니다.”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무척 떨렸는데,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김승규가 직접 결과를 내놓으라며 재촉하러 가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사채를 써도 오늘 겪은 일만큼 험한 일을 겪을 수 있을까?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옳거니.”
“역시.”
아니, 수혁과 안대훈은 별생각이 없었다.
그냥 뭐…….
환자에게만 관심이 있달까.
“이 환자, 아마 지금도 먹고 있을 거야.”
“그럴 공산이 크겠군요. 정상 수치를 훨씬 웃도는 걸로 봐서는…….”
“악순환의 고리를 돌았을 수도 있어.”
“네.”
치매.
기억을 잃는 병.
단순히 어떤 사람을 잊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기억이 쌓이지 못했다.
그 말은 곧, 방금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약을 먹어도 먹은 줄 모르고, 심지어 이 약이 뭔지도 모르고.
다만 습관처럼 먹기만 하게 되는 병.
누군가 지키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또 모르겠으나, 이 환자처럼 혼자 지냈던 이에게는 너무도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괜히 치매에 걸리면 다른 모든 원인을 보정한 채로도 사망 위험이 극도로 올라가는 게 아니었다.
“일단 찾아보도록 하고.”
“네.”
지시가 있기 전에 벌써 간호사가 움직였다.
시간이 늦었지만 둘의 대화는 여전히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간호사는 뭐가 되었건 3교대를 하지 않던가.
쌩쌩한 나이트번 간호사는 벌써 환자 병실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이렇게 되면 예후가 나쁘진 않겠어. 리튬만 끊어도…… 좋아질 거야.”
“문제가 있다면, 리튬을 끊었을 때 기존에 있던 조울증이 어떻게 되느냐인데…….”
“이건 정신건강의학과에 의뢰해 봐야겠지.”
“네. 저희가 건드릴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응.”
정신건강의학과는 많고 많은 과 중에서도 유독 튀는 과 아니던가.
그나마 이제는 정신의 영역에서 신체적인 영역 쪽으로 조금 더 들어오고 있긴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유물론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직 인간은 인간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해부하지 못했다.
그 말은 곧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조차 완전치 못하다는 뜻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이 더 낫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단 말이 정신과만큼 어울리는 과도 없을 터였다.
-고진선처 부탁드립니다(苦盡善處, 어려우시더라도 잘 봐달라는 의미).
해서 수혁은 정신과에 협진 요청을 냈다.
이미 밤이 늦은지도 오래다 보니 답장은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지금 당장은 조울증이 중요한 게 아니라, 환자의 인지 기능 장애가 회복될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으니까.
“교수님, 찾았습니다. 이거…… 이게 리튬일까요?”
그렇게 컴퓨터 앞에서 처방을 낸 다음 정리하고 있던 사이, 간호사가 환자가 들고 다니던 가방 안에서 알약 더미를 발견했다.
균일한 약제가 뭉탱이로 들어 있었는데, 아마도 그게 다 리튬인 듯했다.
이 지경이 되고 나서도 처방은 받은 모양이었다.
해당 정신과 의사를 비난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리튬 중독에서 이런 식으로 증상이 나타나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으니.
게다가 환자는 혼자 사는 노인이다 보니 치매 이환율이 높을 수 있는, 즉 다시 말해 위험 요인이 있는 사람이지 않나.
‘뭐…… 어쩌면 그쪽 의사는 그냥 치매가 발병할 나이라 그렇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무리도 아니었다.
고령화 사회를 넘어 초고령화 사회를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치매는 더 이상 희소 질환이 아니었으니.
“네. 내려서 봐야겠지만…… 맞는 것 같군요. 모양이나 색이 완전히 같아요.”
“와…….”
수혁의 머릿속을 흐르는 생각과는 별개로, 간호사는 감탄을 내뱉었다.
‘천재지…… 천재이긴 한데…….’
간호사가 이 센터에 배정된 것도 벌써 어언 일 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꿀보직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미끼로, 이미 한 병동에서 시니어를 달고 이른바 베테랑이 된 그녀를 이현종이 꼬셨더랬다.
솔직히 말하면 미끼고 나발이고, 그냥 이현종이 그러고 다니는 게 신기해서 온 것이었다.
평생을 제멋대로 아니, 지식을 폭력 삼아 휘두르며 그야말로 배운 깡패처럼 살아온 사람이 이현종이지 않던가.
그런 사람이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다니.
그때는 진짜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생각 반, 저 양반이 대체 언제까지 저럴까 두고 보자는 생각 반으로 왔다.
‘이 정도로 천재일 수가 있나……?’
물론 이제는 다 옛날 일이 되었다.
간호사 본인조차 본래 동기를 잊었다.
왜냐?
이곳에서 마주하게 된 진료라는 게 평생 동안 보아온 진료와는 차원이 달라서 그랬다.
매번 같은 양상으로 다른 것도 아니었다.
각양각색의 진료를 볼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오늘 일은 발군이었다.
‘치매가…… 아니라 이거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치매라니.
간호사 본인도 가장 두려워하는 질환이 치매였다.
딱히 치매 병동에 있어 본 적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건너 들려오는 고생의 조각들만 봐도, 그리고 의료진의 지식 때문에 가능한 상상을 해 볼수록, 신을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친정엄마는 평생 아니길 바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그 질환이라고 진단을 받았다가, 아니라는 얘기를 들으면 대체 무슨 기분일까?’
간호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 이거 끊으면…… 그래도 좋아지는 데…… 음. 대충 5일에서 일주일 정도 걸리긴 할 텐데.”
그 사이에도 수혁은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대훈과 간호사를 바라보면서였다.
여전히 놀랄 만한 이야기였다.
이런 케이스를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정확하게 시일까지 얘기하고 있지 않나.
“아…… 그럼 5일 정도는 계속 중증 인지 장애를 동반하고 있을까요?”
물론 그저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간호사는 환자를 봐야 하는 입장이라서 더 그랬다.
센터에 오고 진짜 별의별 환자를 다 보게 되었지만, 인지 기능 장애가 있는 환자는 처음이지 않나.
기억이 쌓이지 않는 건 섬망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보니 벌써부터 두려웠다.
“아…… 중증 인지 기능 장애는 아마 한 3일 정도 더 지속될 거예요. 문제가 있다면…… 그 기간 동안 바로 곁에서 쭉 봐 주긴 해야 한다는 건데……. 지금 센터에 그런 경험 있는 의료진이 없겠죠?”
수혁도 머리로만 알지, 실제로 간호 경험이 있을 턱이 없지 않나.
간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네. 음…… 신경과 병동에 있다고 해도, 치매 환자를 병동에서 관리해 본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저희는 3차 기관이니까요.”
“하긴. 만성 질환자는 안 받죠?”
“네, 현실적으로 받을 수가 없어요.”
말이 3차지, 사실상 4차 의료기관이라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그런 곳에서 만성 질환자의 입원을 볼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이곳은 새로이 발생하는 환자를 제대로 진단하고 동시에 급한 치료를 해야만 하는 곳이었다.
만성 질환에 대한 관리는 외래에서 진행하는 편이 모두를 위해 좋았다.
“어쩐다……? 지금 이 환자는 퇴원해서 보는 건 너무 위험할 텐데.”
“그럴까요?”
“리튬을 먹는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아…….”
“가능성은 적지만, 인지 기능 장애가 있는 상황에서 조증 삽화가 오게 되면…… 지극히 위험할 겁니다.”
“네, 그렇네요. 음…… 그럼 제가 일단 간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볼게요.”
“우리 병원은 그런 거 없지 않나요?”
“일적으로는 아니어도, 이제 치매는 흔한 질환이잖아요.”
“아.”
간호사의 표정엔 어딘지 모를 그늘이 져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제 치매는 흔한 질환이라고 해도 좋았다.
사람의 수명이 길어지는 속도를 현대 의학이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서 그랬다.
오래 살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웠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교수님.”
“좋아. 그럼 내일 보호자 오시면 말씀드리도록 하고…… 보호자분도 단 며칠 정도는 집중 간병이 가능할 거야. 용의도 있고, 또 그러면 후회도 덜 남겠지.”
“네, 교수님. 그건 제가 말씀드릴까요?”
“아니, 같이 말하지, 뭐.”
“네.”
수혁의 말에 간호사와 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중 대훈이 물었다.
“그럼 이 환자 정식 진단명은…… 뭐가 될까요?”
“‘리튬 중독으로 인한 가역성 치매’라고 하지. 아직 확진은 아니니까…… 의증으로 잡아 두자.”
“네, 교수님.”
대훈은 진단명을 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있던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개중에는 진단검사 의학과 교수인 박종국도 끼어 있었다.
계속 빤스 바람으로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니, 가리기 위해 수술복을 입고 있었다.
‘왜…… 왜 이 개지랄을 했나 했더니.’
감히 김승규를 노려볼 수는 없고 해서, 속으로만 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이제는 그저 수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에서 천재라 말하는 걸 듣기는 했다.
아니, 실제로 몇 번 목도한 적도 있었다.
또 아선에서 진검 쪽 오류로 인해 내려졌던 오진을 다름 아닌 이 센터에서 잡았다는 얘기도 들었더랬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건…….
‘여긴 나도 낑겨 들어간 거긴 하니까…… 케이스 리포트에 이름 올릴 수 있나? 발표도 하고 싶은데.’
이런 추론을 하는 데 있어서 진검이 도움을 좀 줬다는 말을 진검 학회에서 할 수 있다면, 묻는 것쯤이야 알 게 뭐란 말인가.
자랑할 거 없어 죽겠는데, 이런 건덕지라도 생기면 얼마나 좋겠나.
‘이따 물어봐야지.’
헤헤 하고 웃고 있으려니 어느새 모임은 해산되었다.
시간이 너무 늦기도 한 데다가 결론까지 난 마당이다 보니, 사람들이 헤어지는 데도 별 아쉬움은 없었다.
특히 수혁과 이현종, 대훈이 그랬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열정적으로 움직이긴 했지만 알고 보면 미국 갔다가 오늘 돌아온 사람들 아닌가.
“이 정도면 만족하나?”
“네? 아, 더없이요. 아주 좋았습니다.”
“좋아. 한 발 남았군.”
“네?”
“아니, 아닐세.”
김승규는 어떤 수술에 끌고 들어갈까 하는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다른 이가 그런 일을 겪었다면 잠도 자지 못했을 텐데, 수혁은 아니었다.
그냥 집에 가서 잘 잤다.
그러곤 아침에 연락을 받았다.
아니, 알람으로 받았다.
홍보팀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명의를 향해 한수혁, 두수혁 나아가고 있는 안대훈 군. 내과 전문의 시험 만점으로 수석. 차석과의 성적 차 역대 두 번째로 커.
기사가 날아와 있었다.
‘이게…… 뭐야?’
[꿈인지 생시인지 검증 중입니다. 띠디디디. 생시입니다.]
‘잉? 이런 제목이 난다고?’
[네. 났네요.]
‘아니…… 무슨 웹소설도 아니고…….’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는 법이죠.]
거참.
황당하긴 했지만, 하여간 보내 왔으니 기사를 들여다보았다.
내용 자체는 딱히 뭐 신기할 건 없었다.
다만 대훈의 자애로운 사진이 좀 특이할 뿐이었다.
“이 새끼들.”
하지만 그 기사에 분노하는 이가 하나 있었다.
이현종이었다.
“왜 수혁이랑 대훈이만 엮어.”
뭔가 좀 이상한 방향에서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