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4화 더 커진 센터 (2)
결핵이라는 증거를 찾아보자.
대훈은 비합리적인 요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무엄한 생각이라는 느낌이 들자마자 마음을 고쳐먹긴 했지만, 하여간…….
어떤 질환이, 그것도 만만치 않은 질환이 강력하게 의심되는 상황에서 다른 질환을 의심해 보자는 건 딱히 의미 없는 일이었다.
객관적으로만 보면 그런데…….
‘만 2세. 흐음…… 확실히…….’
안대훈은 수혁보다도 훨씬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원래도 그랬는데, 최근 보육원 봉사를 다닌 후로는 더더욱 그렇게 되었다.
흔히들 착각하는 것이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건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은 물리적인 곳간이 아니어서 베풀다 보면 어느새 더 커지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물리적으로는 절대로 갚을 수 없는 이들에게 베푸는 행위는 더 자주 그런 일을 불러일으키는 법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 그래, 교수님 말씀대로 볼까…….’
대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수혁을 바라보았다.
수혁은 이미 한번 보았던 기록들을 다시금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쪽에서 훨씬 의미 있는 답이 나올 가능성이 클 터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경험이니 뭐니 하는 얘기가 아니라, 저쪽은 그냥 인세에 내려온 신 같은 존재였다.
대훈이 특히 종교적인 인간이라서 단어를 이렇게 선택한 것일 뿐, 대략적인 느낌은 수혁을 아는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다.
‘일단…… 제일 중요한 건 역시 영상학적 단서가 되겠지.’
허나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마음이야 평생 수혁 옆에서 수발이나 들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여러 난관을 헤쳐나가야만 했다.
일단 교수가 되어야 했다.
펠로우는 계약직이고, 언제고 떠나야 했으니.
그냥 교수도 아니고 태화 의료원의 교수다.
쉬울 리가 없었다.
해서 대훈은 나름의 노력을…… 남들이 보기엔 정말이지 미친 수준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주변 림프절의 크기가…… 음…… 그렇게까지 커져 있진 않고. 곤 포커스(primary Ghon focus, 최초 결핵 병소)도…… 보이지 않아. 사실 이게 꽤 결정적인 단서가 될 텐데.’
곤 포커스(primary Ghon focus)란 결핵 감염 이후, 감염이 소실되면서 남겨지는 석회화된 병변을 의미했다.
실제로 폐결핵을 앓았던 이들에게선 대부분 발견될 정도로 흔한 소견이었다.
허나 이 아이에게서는 보이지 않았다.
‘소아라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무용한 생각이었다.
그쪽으로는 딱히 지식이 쌓여 있질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재활성의 증거가 있지도 않고…….’
결핵 하면 솔직히 뭐부터 떠오르던가.
실제로 결핵 환자를 보지 못한 사람들조차 이 증상을 떠올릴 수 있을 터였다.
바로 객혈.
제갈량이나 이상과 같은 역사적 위인들이 결핵을 앓았다는 건 아주 유명한 일이고, 그들이 그 질환 진단에 증거가 되는 객혈을 앓았단 사실 또한 아주 유명한 일이었다.
하여간 객혈이 생기는 이유는 폐결핵이 폐를 직접적으로 망가뜨리기 때문이었다.
결핵균에 잡아 먹힌 곳은 일종의 공동화 현상이 생기는데, 이쪽으로 혈액이 찼다가 기침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이 객혈의 기전이었다.
허나 환자에게는 이러한 공동화 현상조차 관찰되지 않았다.
따라서 안대훈의 추론은 우주를 유영하듯 허공만 헤집고 있었다.
“소아암에서…… 결핵이 발병할 확률은 정상 인구에서보다 22배 정도 높다는 보고가 있지.”
그때, 수혁이 입을 열었다.
언제나 그렇듯 정확한 수치를 입에 담으면서였는데, 이는 바루다 덕이라고 봐야 했다.
제아무리 수혁의 본체 또한 천재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다곤 해도, 모든 지식을 이렇게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건 불가능했다.
하여간, 수혁은 그 말에 자신을 주시하기 시작한 안대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연구는 미국에서 진행된 거야. 우리나라에 정확하게 대입할 수는 없단 얘기인데…… 유병률을 생각해 보면, 빈도가 올라가면 올라갔지 내려올 수는 없어.”
“아…… 하지만 병원 조사에선 환자가 결핵 확진자와 직접 접촉한 적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그래. 하지만 역학 조사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야. 일단 대중교통 같은 경우…… 그 안에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다 조사하는 건 불가능해. 하다못해 택시만 타도 그렇지.”
“아…… 그건…… 그렇겠네요.”
지하철?
버스?
이런 걸 어찌 조사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택시와 같이 상대적으로 소수의 인원이 타고 내리는 수단의 경우도, 역학 조사를 위해 정확히 알아내려면 행정력을 동원해야 했다.
태화 의료원이 제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만한 일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리고 환자는 암 환자야. 계속해서 우리 병원에 다녔지. 알다시피 우리 병원엔 정말 오만 환자가 다 다니잖아. 외래만 본 것도 아니고 중간중간 입원을 하고 검사도 다녔을 텐데…… 정말 접촉력이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는 법이지.”
“맞네요. 그렇구나. 아…… 그렇네. 결핵이라면…….”
“결핵은 공기 감염이 가능해. 게다가 이 아이의 경우엔 면역력이 뚝 떨어져 있으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아…… 하지만 교수님.”
안대훈은 말을 해 놓고, 지가 더 놀랐다.
내가 감히 교수님의 말에 ‘하지만’이라는 단어를 내뱉다니?
이거 이단이 된 거 아닌가?
해서 저도 모르게 수혁을 죄책감 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는데, 수혁은 그저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뭐 해?”
그러곤 말을 하라고 했다.
그때 알았다.
아, 나도 전문의구나.
이제 그저 학생 신분은 아니구나.
‘이런 날이 오다니…… 미쳤다, 진짜.’
안대훈은 감개무량함에 몸을 부르르 떨다가 이내 자기 생각을 말했다.
“영상학적인 증거가 없습니다, 교수님. 주요 소견이라 할 수 있는 공동화 소견이나 곤 포커스(primary Ghon focus) 등이 전혀 보이지 않아요. 하다못해 주변부의 임파선 비대도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흉부외과에 결핵 진단을 위한 조직검사 의뢰를 하는 건…… 강력하게 원한다면 할 수는 있겠지만…….”
“탐탁지 않아 하겠지? 통합진료센터…… 이름으로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네가 말한 것들이 절대적인 건 아니야.”
“듣겠습니다.”
절대적인 건 아니다.
이 말을 하면서, 수혁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턱을 치켜들었다.
이건 잘난척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대훈은 그런 수혁의 심리를 꿰뚫는 사람이었다.
해서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답을 듣기로 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환자의 기저 질환이야. 암. 암 환자였지.”
“네.”
“거기에 CCRT(항암 방사선 치료)를 받기도 했어. 면역력이 떨어져 있다는 얘기야. 네가 말한 영상의학적인 소견들, 다 중요한 소견들인 건 맞아. 하지만 모두 면역 반응이 있어야 발생 가능한 소견들이기도 하지.”
“아……? 아…… 그렇긴 하네요.”
“이 환자에게서는 그러한 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는 거야. 오히려…… 면역이 억제되어 있는 탓에 각종 반응이 잘 나타나지 않을 상황에서, 양측 폐로 결절 소견이 나타났다는 게 더 중요하지.”
“어…… 잠시만. 저도 뭔가…….”
대훈은 머리로 피가 훅 하고 몰리는 것을 느꼈다.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로 뭐라고 해야 하나?
실마리가 잡히는 느낌?
“즉, 이 결절을 면역 반응이 아니라, 순수하게 균에 의한 탐식으로 발생한 소견이라 생각하고 보면 어떻겠어?”
“그러면…… 그럴 수 있는 균은…… 결핵이죠.”
“그래. 다른 균도 있을 수는 있지. 하지만 우리나라 상황에서 결핵균을 배제하는 건 말이 안 돼.”
“이런 논리라면 저도 검사를 해 볼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래, 가능성이 있잖아? 게다가 가능성이 있다면, 무작정 제거 수술을 하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야.”
수혁은 위험하다는 말을 하면서 얼굴을 굳혔다.
지금껏 보아온 케이스들 때문이었다.
통합진료센터 일을 해 온 것은 안대훈도 마찬가지였기에, 그 또한 비슷한 얼굴이 되었다.
숫자의 차이가 있을 뿐, 본 적이 없는 건 아니란 얘기였다.
[결핵으로 인한 경부 임파선 결절임을 간과하고 수술로 절제를 한 경우엔…… 해당 임파선부터 절개선을 타고 피부까지 결핵균이 감염되어 진짜 끔찍해지죠.]
‘그나마 약이 있어 다행이지만…… 그래도 치료가 어려워지지.’
[그게 폐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요.]
‘더군다나 이 아이는 소아암 환자야. 이걸 염두에 두고 검사를 해 봐야 해.’
[이런 말을 수혁이 한다면, 현시점에서는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그럼 다시 점검해 보자. 내가 이걸 이렇게 말함으로써…… 혹 환자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까?’
[역산 들어갑니다.]
수혁의 논리는 완벽했다.
아니,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대훈의 말마따나 이 말을 듣고 나면, 섣불리 암이라 판단하고 절제술에 나설 수는 없을 터였다.
아닐 경우 감당해야 할 부작용이 너무 커 보이게 되어서 그랬다.
허나 만약 암이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
[통상적으로 조직 검사를 통해 결핵균을 진단하는 데 있어, 완전한 ‘음성’임을 확인하려면 2주가량이 소요됩니다. 2주라는 시간이 환자의 횡문근육종 예후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합니다. 반대의 경우라면…… 뭐 말할 것도 없을 거 같군요.]
‘좋아. 그럼 가지.’
[네. 좋습니다.]
그래도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비록 희망을 줬다 뺏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환자나 부모에게 미칠 수 있는 정신적인 악영향도 있기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까지 고려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 않나.
암이 재발한 것과 아닌 것.
이건…… 그야말로 천지 차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네, 통합진료센터 이수혁입니다.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요.”
“아…… 네.”
해서, 수혁은 그 길로 흉부외과에 전화를 걸었다.
동시에 대훈은 차트에 협진 의뢰서를 작성해서 흉부외과에 의뢰를 넣었다.
딩동.
경쾌한 알람음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을 확인한 수혁은 말을 이었다.
“만 2세 소아암 환자입니다. 횡문근육종으로 CCRT 받았고, 1년 경과된 환자로…… 양측 폐에 결절 동반한 폐렴 소견 보여 항생제 치료했으나 호전 없었습니다. 오히려 진행된 양상을 보이기도 해, 해당 병원에서는 암 재발 및 전이로 보고 절제술 계획했습니다.”
“네. 합당해 보이는데요?”
“보호자가 동의하지 않아 통합진료센터에 의뢰되었습니다.”
“아.”
“제가 보니…….”
수혁은 아까 안대훈과 논의했던 내용을 좀 더 정제해서 입에 담았다.
‘그럴 리가 있겠…… 아니, 그런가. 흐음…… 맞는 거 같긴 한데. 어…….’
듣고 있던 흉부외과 의사의 심정 변화는 다음과 같았다.
‘말도 안 된다’에서 ‘그럴싸한데’를 넘어 이제는 불안해졌다.
‘혹시 이 환자가 지금 암 절제술을 받게 되면 어쩌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얘기였다.
“그럼 언제…… 언제 할까요?”
해서, 오히려 저쪽에서 더 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