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2화 치프 우하윤 (1)
치프.
레지던트의 꽃.
아니, 왕이라고 해야 할까?
4년제가 아니게 된 지 오래인 지금도 이 명제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선생님, 다 모였습니다.”
“그래? 그래, 돌아보자.”
하윤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곤 2년 차를 따라 병동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예전에는 3년 차 그레이드가 시험을 보러 가면 그때부터 아래 연차가 치프 노릇을 했다고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전공의들의 근무 시간이 주 88시간으로 조정되면서, 더 이상 시험공부를 명목으로 한 달 정도 내보내 주기가 어려워져서 그랬다.
물론 그래도 어느 정도는 배려하지만, 시험이 끝나면 돌아와서 일을 해야만 했다.
말로는 치프라 해도 항상 위 연차와 같이 다니는데, 그게 무슨 치프란 말인가.
3월 2일.
그러니까 모든 치프들이 공식으로 나가고 난 다음 첫 평일인 오늘이야말로, 치프가 된 공식적인 첫날이라고 봐야 했다.
“조 교수님 환자 보고 있지?”
“네.”
하윤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롤모델이 이수혁이니까.
‘전설적인 치프…….’
하윤이 1년 차 시절, 수혁이 3년 차이지 않았나.
지금과 비교하면 진짜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해도 무방할 시절에 하필이면 수혁과 돌았다는 얘기였다.
‘안대훈 선배도 만만치 않았지…….’
하윤이 2년 차 시절 치프는 안대훈이었다.
그때는 뭘 좀 알아서 더 충격이었다.
고작해야 1년 더 위인데, 어떻게 저 인간은 저렇게 많이 알지 싶어서 그랬다.
이수혁이야 규격 외의 천재니까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안대훈은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그 정도는 해야…… 들어갈 수 있는 거야.’
하윤의 꿈은 그 둘처럼 통합진료센터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후로는 뭘 어떻게 하겠다 하는 생각이 딱히 없었다.
지금 당장은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꿈이었으니.
“김문수 환자부터 얘기해 볼까?”
“네?”
“환자 파악했을 거 아냐. 회진 돌기 전에…… 오늘 첫날이니까. 어떤 환자고, 왜 왔고, 지금 뭐 하고 있는지만 얘기해 봐. 1호실 환자부터. 환자일보 그렇게 세팅되어 있지 않아?”
“아, 네네. 네.”
그러기 위해선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말하면 모르겠다 싶었다.
수혁만 떠올리면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안대훈은 어느 정도 힌트가 되었다.
‘그 선배…… 내가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탈모가 그렇게 심하진 않았지…….’
그때는 좀 삭긴 했어도 지금처럼 신비로운 관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붙임성 있어 보이고 또 사람 좋아 보이는, 전형적인 내과 의사에 가까웠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어엿한 교수처럼 변해 버리지 않았나.
다른 사람들이 괜히 주교님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란 얘기였다.
‘머리털 뽑히는 건 좀 그렇지만, 하여간 죽도록 노력하다 보면 된다.’
하윤은 결연한 눈으로 나머지 일행을 바라보았다.
혈액내과 파트다 보니 주치의도 아무나 맡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2년 차 둘과 1년 차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년 차는 거의 깍두기라고 봐야 했다.
어제까지 인턴 했던 애가 어떻게 혈액내과 환자를 보겠나.
베테랑 주치의들도 팍팍 엎어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아…… 무서운데……?’
하여간 치프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아래 연차들은 죽어 나가게 생겼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른 치프도 아니고 우하윤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 양반이 보통 사람인가.
1등이었다.
그것도 압도적인.
“김문수 환자 남자 43세. 골수 이형성증을 주소로…….”
“주소가 진단명 말하는 거야?”
“아, 아닙니다.”
“다시.”
그런 사람이 눈에 불을 켜고 보고 있으니 원래 하던 일도 잘 안될 지경이었다.
“멍이 잘 드는 증상을 주소로 외래 내원하였고, 시행한 혈액 검사상 골수 질환이 의심되어 입원 후 골수 검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결과 골수 이형성증이 진단되어 항암 치료를 위해 입원 중입니다.”
“부작용은?”
“구역, 구토 외에는…….”
“혈액 수치는 어떤데.”
“범혈구 감소증을 보이곤 있으나 감염 등의 소견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 특별할 거 없어 보이는 환자야. 하지만 유의해서 봐야 해. 알겠지만, 혈액내과는 응급이 많고 대개의 응급이 아주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고.”
“네, 선생님.”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똑똑한 사람이 꼼꼼하게 봐 주는 건 좋은 일 아니겠나.
일할 때 좀 피곤하긴 해도, 사고가 안 나는 게 더 중요했다.
환자를 위해서도 그렇고, 레지던트들을 위해서도 그랬다.
합병증이라는 게 대개 그렇지만, 한 번 터지고 나면 환자고 주치의고 개고생이었다.
“그럼 다음…… 이수정 환자. 이분은?”
그런 생각이 한번 들고 나니, 이 질문 세례도 어느 정도는 견딜 만했다.
뭐가 되었건 모른다고 해서 지랄할 사람도 아니지 않나?
그렇다 보니 2년 차들도 어느 정도는 편안해진 얼굴로 보고를 이어 나갔다.
아무래도 첫날이다 보니, 2년 차 주치의들도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대개는 괜찮았다.
하윤이 교정해 줄 수 있었으니.
“네, 혈액암 환자는 아닙니다. 이수정 환자 여자 57세. 3년 전 본원에서 우측 유방암 진단되어 이에 대해 근치 절제술 및 항암 치료를 했던 병력이 있는 환자입니다. 발열을 주소로 어제 응급실 통해 입원했습니다.”
“응급실……?”
이 환자는 예외였다.
분명 하윤이 어제 와서 확인했을 때는 입원하지 않았던 환자라 그랬다.
휴일이라 응급실에서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네.”
“이런.”
하윤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최선을 다할 작정이었는데, 첫날부터 모르는 환자가 있다니.
낭패인가 싶었다.
그런 기색을 느낀 2년 차가 부리나케 부연했다.
“그…… 어제 당직이 저희 쪽이라 받은 거고, 오늘이나 내일 고형암 쪽으로 전과될 예정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우리 환자잖아?”
“네, 그건 그렇습니다.”
“우리가 봐야지, 일단은.”
“네.”
안심시키기 위함이었는데 별 소용은 없었다.
하윤은 한숨을 쉬고 난 후, 질문을 이어 나갔다.
손과 눈은 부리나케 움직이고 있었다.
어제 작성되었을 응급실 기록을 통해서 뭐라도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발열 원인은 뭐 같아?”
“일단 흉부 엑스레이 선상에서는 특별한 병변이 관찰되지 않았습니다.”
“검사 말고, 환자 다른 증상부터 말해야지. 발열 환자 보는데 기본은 문진 아니야?”
“아, 네. 죄송……합니다.”
“호흡기부터.”
“네.”
어제 응급실이 진짜 빡셌는지, 기록이 영 시원치 않았다.
하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당장 넘어갈 거 같은 환자가 있거나 하면, 기록에 아무래도 더 소홀해지지 않겠나.
하윤도 그런 걸로 문제 삼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문진 여부는 중요했다.
기본이니까.
무엇보다 하윤은 이수혁, 이현종이 이 문진을 통해 말도 안 될 정도로 어려운 환자를 진단해 내는 것을 수도 없이 본 산증인이었다.
“기침이나 가래는 없었습니다. 다만 목의 통증을 호소했습니다.”
“목 안은 어땠지?”
“그냥…… 빨겠습니다.”
“그게 뭐야. 편도가 빨겠어? 아니면 어디가 빨겠어?”
“그건……”
“이따 같이 보고. 소화기 증상은?”
“없었습니다.”
“흐음.”
없었다고는 하는데, 신뢰도가 이미 팍 떨어진 상황이었다.
목 안이 그냥 빨겠다니?
무슨 놈의 의료진이 이따위로 답한단 말인가.
목 안에 구조물이 얼마나 많은데.
해서 하윤은 몸을 일으켰다.
묻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라 여겼기에 그랬다.
‘시간은…… 아직 있어.’
고개를 돌려 보니 아직 7시였다.
조태진은 8시쯤 돌 테니, 1시간이 남은 셈이었다.
첫날이라고 좀 급히, 그러니까 6시에 병동에서 본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환자 얼굴도 모른 채 회진을 돌 뻔했다.
“일단 다 돌고, 마지막에 이수정 환자한테 가자. 바이털은, 아직 괜찮은 거지?”
“네? 아, 네. 열이 있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좋아.”
하윤은 병동 스테이션을 떠나기 전에 커피로 목을 축였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수혁이 종종 커피를 마셔서 그랬다.
그때마다 머리가 붕붕 돈다는 말도 했었고.
하윤은 그 정도로 드라마틱한 카페인 각성 효과를 보진 못했지만, 안 마시는 것보다는 낫다는 느낌을 받았다.
‘좋아…… 다들 괜찮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환자들은 어제 봤을 때랑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대개 루틴 환자들이고, 조태진이 한번 싹 정리를 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조태진이 이현종이나 수혁에게 밀려서 그렇지 확실히 능력 있는 교수이지 않던가?
하지만 그런 그라고 해도,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입원한 환자까지 볼 수 있는 재주는 없는 법이었다.
환자를 보는 데 미쳐 버린 수혁이었다면 밤에도 여기 있었을 테니 봤겠지만.
그걸 일반인에게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아니, 죄였다, 죄.
끼이익.
마지막으로 남은 환자는 이수정이었다.
유방암으로 3년 전에 수술과 항암 치료를 했던, 어제는 갑자기 발생한 고열을 주소로 응급실로 온 환자.
증상만 보면 단순 감염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환자는 암 환자였다.
다른 질환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그 다른 질환은 대개 좋지 않았다.
‘검사 결과가…… CRP가 무려 20mg/L(정상 수치 5~10). 헤모글로빈은 9(정상 수치 12~16)…… 혈소판도 8만(정상 수치 15만~45만)으로 감소해 있지.’
마치 1년 차로 되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여러 명을 거느린 채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 있는 건 환자와 보호자 둘이었다.
남편은 오랫동안 병간호를 해 왔는지, 꽤 익숙해 보였다.
짐 싸는 거 하나만 봐도 이런 건 알 수 있는 법이었다.
‘다행이야.’
일단 정서적인 지지는 받고 있다는 전제하에, 하윤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혈액종양내과 우하윤입니다. 어제 응급실로 오셨다고요.”
“네네, 안녕하세요.”
환자도 고열로 얼굴이 달뜨긴 했지만, 여하간에 친절한 미소로 하윤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좋은 일이었다.
저 정도로 마음에 여유가 있다는 건, 신체적으로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일단 몸을 좀 보도록 할 텐데…… 목 말고 다른 곳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으세요?”
“어깨……?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아래쪽도요.”
하윤의 질문에 환자는 손으로 목부터 아래로 슥 훑었다.
단순한 몸동작이었지만, 좋지 않았다.
‘통증이…… 뻗치는 건가……?’
아니면 진행한다는 얘길까?
“어제랑 비교해서 더 아프거나 하지는 않으시고요?”
“어제…… 어제는 목만 아팠어요.”
“아, 그렇군요.”
진행했단 얘기였다.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나쁜 소견이었다.
왜냐.
‘경험적으로 항생제가 들어가고 있어. 진통제도…….’
아직 균 배양 검사고 뭐고 결과가 나온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CRP, 즉 급성 염증 지표가 20이 넘게 나왔는데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지 않겠나.
경험적 항생제라도 써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중에 바이러스로 나오더라도, 안 써서 환자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결론적으로 약을 썼다는 건데, 환자는 증상이 나빠지고 있었다.
‘으음.’
하윤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 건, 결코 오버가 아니었다.